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18화
전면전(4)
어두운 밤.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에 맞춰 운신의 소음을 최대한 숨기며, 칼릭스는 제국군 주둔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면 결국 도시는 점령당할 것이다.
무너진 성벽들로 더 이상 수성의 이점을 살리기 어려운 상황이고, 양측의 병력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합군 측에서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한 가지뿐.
바로 제국의 초인을 전투에서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의 열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암살뿐일 터.’
야음을 틈탄 습격으로 대마도사를 제거하는 것이 칼릭스가 떠올린 계책이었다.
‘어차피 도시를 넘겨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기습이라도 시도해 보는 게 낫겠지.’
암살이 실패하면 무의미한 수성은 포기하고, 그대로 알론드와 함께 전장을 이탈하기로 정해두었다.
가능성을 따져도 대낮에 도시가 점령당한 뒤에 제국군을 피해 탈출하는 것이나, 적진에서 암살이 실패하더라도 주변이 어두울 때 도주하는 편이나 빠져나올 확률은 비슷하리라 판단된다.
과거 북부의 야만인 기지에 스며들었을 때처럼.
어둠에 스며드는 잠행술을 사용하며, 칼릭스는 조용히 제국군의 주둔지를 향해 접근했다.
이윽고 잠시 뒤.
칼릭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풀숲에 자신의 몸을 동화시켰다.
‘역시 제국의 강병들이라 그런지 경계가 허술한 부분이 없군.’
주변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횃불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어,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간다면 경비병들에게 모습을 들킬 것이다.
실로 삼엄한 경계.
빈틈을 찾아 주둔지를 맴돌던 칼릭스의 시선이 슬쩍 하늘을 향했다.
‘어기충소로 높이 뛰어올라 허공답보를 펼친다면…… 아니, 그래 봐야 정작 목적은 달성하기 어렵겠군.’
내력을 방출해 공중으로 솟구치는 어기충소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계단처럼 밟고 이동하는 허공답보.
둘 다 무림의 초절정 고수들이나 겨우 선보일 수 있는 최상승의 경공술 기예다.
무학의 발달이 더딘 이곳에서는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펼치기 어려운 수법들.
다만 그렇게 고등한 경공술을 펼쳐 경비병들의 경계를 뚫는 것은, 애초에 잠입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어버린다.
‘병사들의 경계망은 피해 갈 수 있겠지만, 다량의 오러를 소모하는 만큼 초인들의 감각에 걸리는 건 피하지 못할 테니.’
기사나 마법사나 분야가 다를지라도 초인의 경지쯤 되면 기감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접근해도 기습이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그리 요란하게 오러를 뿌려대며 움직여서야 암살을 시도하기도 전에 적들이 먼저 눈치를 챌 터.
‘결국 믿을 건 살수들의 무공뿐인가.’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일반 병사들로는 아무리 촘촘하게 경계를 세운다 해도, 결국 미세한 사각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전설적인 살수의 무공을 활용해 은신술을 한계까지 펼친 칼릭스는, 지면에 몸을 붙인 채 뱀처럼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제국군 진영을 향해 나아갔다.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횃불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주변의 음영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겨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칼릭스는 꽤 긴 시간을 소비하긴 했지만, 결국 경비병들의 감시망을 뚫고 제국군의 주둔지 안으로 잠입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지만 아직 여유는 있군.’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느 막사 뒤편에 몸을 숨긴 칼릭스는, 목표물을 찾기 위해 천천히 기감을 확장했다.
탐지는 어렵지 않았다.
일부러 기척을 숨기려 들지 않는 이상, 초인들이 풍기는 기운은 일반인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
‘찾았다. 이 기운은 게일 이그나스 후작인가. 그랜드 마스터 역시 근처에 있을 텐데.’
대마도사의 기운을 감지한 칼릭스는 그 주변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알론드와 전투를 벌였던 그랜드 마스터의 위치를 찾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더 이상 초인으로 느껴지는 존재의 기척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알론드 님이 묘한 이야기를 하긴 했었는데.’
문득 칼릭스의 머릿속으로 이곳에 오기 전 알론드와 잠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 말일세. 대마도사와의 거리를 거의 다 좁혔다 싶을 무렵에 갑자기 등장해서 내 앞을 막아서더구먼.
-갑자기라고 하시면, 전혀 감지를 못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물론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점들이 있군그래. 합공당할 것을 염려하여 바로 몸을 빼긴 했네만, 그 친구는 뭔가…… 분명 초인이긴 한데 초인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
당시에는 딱히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마도사 외에는 다른 기척이 잡히지 않는 걸 보아하니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기사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무림의 살수들과 비슷한 계통의 무술을 익힌 자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기척을 감추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박혀 있는 자라면 기감에 탐지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간다.
이곳 세상에서는 아직 기사와 마법사의 길 외에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경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제국이라면 대마도사 혹은 대검주와 동급의 암살자라는 특수한 케이스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대마도사 근처에 그랜드 마스터가 숨어 있다고 가정해야겠군.’
생각을 마친 칼릭스의 신형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신술을 유지한 채 느릿느릿하게 대마도사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가던 칼릭스는, 대략 백여 미터의 거리를 남겨두고 이동을 멈추었다.
마법적인 방비가 되어 있을 수 있으니, 접근은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적당하다.
칼릭스의 계획에서 그 혼자의 힘으로 진행하는 단계는, 딱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이제 알론드 님의 신호를 기다린다. 시간을 꽤 소모했으니 금방 때가 오겠군.’
칼릭스가 생각한 암살 계획은, 일종의 양동작전을 동반한 방식이었다.
아무리 살수의 무공을 사용한다 해도, 동등한 경지의 상대에게 기습이 무조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니 칼릭스가 목표물인 초인과 최대한 거리를 좁힌 후 은신 상태로 대기하고 있으면, 정해진 시간 뒤에 알론드가 소란을 일으켜 대상의 주의를 끈다는 것이 이번 암살 계획의 주요 골자였다.
‘홀로 암습을 감행하는 것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높을 테지. 설마 적이 자신들의 진영 안에서 함정을 파고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음! 시작되었군.’
저 멀리서 익숙한 기운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곧 여기저기서 경비병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움직임과 함께, 잠든 병력들을 깨우는 요란한 타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습이다!”
“기상! 적이 나타났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칼릭스는 대마도사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호흡을 멈추고 혈류를 조종하여 심장의 박동마저 거의 멈춘 상태로 만들었다.
생물이 지니는 미세한 생기조차도 제한하는 극한에 이른 은신술.
그 상태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목표로 했던 상대인 제국의 대마도사 게일 이그나스가 칼릭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된 일이더냐?”
“연합군 초인의 습격입니다. 경계대상 2호로 판별되며, 아직 다른 전력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2호라면 그 노인네인가. 승산이 없다 판단한 모양인지 별 무의미한 수작을 다 부리는군. 한데 그 작자 혼자 움직였을 리는 없는데…….”
부관의 보고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본 게일은, 이내 마력을 넓게 퍼뜨리며 광범위한 탐색마법을 시전했다.
“흐음? 다른 초인의 기운이 포착되지 않는군. 정말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분명 칼릭스란 놈이 함께 있을 거라 여겼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게일의 머릿속으로 적국의 초인들, 칼릭스와 알론드에 대한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부에서 진행하던 계획들을 엉망으로 만든 알펜시아 놈들을 다시 마주치는 건, 꽤 나중 일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곳 아르마니아에서 만나게 될 줄은.’
알펜시아를 포함한 서부의 국가들 역시 감히 제국에 대항하는 무리에 속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저 두 사람이 점령을 계획한 아르마니아의 도시 안에 있을 줄은 그도 몰랐던 일이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초인 전력을 더 운용해서라도 확실하게 놈들의 목숨을 끊었을 것을.
아쉽게도 현재의 전력으로는 도시를 점령하고 저 둘을 몰아내는 정도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일 것이라 판단되었다.
‘한데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저렇게 홀로 동떨어진 채 공격을 해오다니. 잘하면 적들의 중요 전력 중 하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을 마친 게일은 알론드가 도주하기 전에 쫓아가 발을 묶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레비테이션.”
부양 마법을 펼쳐 지면에서 5미터가량 몸을 띄운 게일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어느샌가 그의 곁으로 다가온 한 명의 기사를 향해 말했다.
“따라와라.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전력을 발휘하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게일은 탐색마법에 걸린 적측 초인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50미터, 30미터, 10미터.
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게일을 주시하고 있던 칼릭스는, 급격히 줄어드는 거리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검을 움켜쥐었다.
‘운이 좋군. 이렇게 쉽게 간격을 좁혀주다니.’
은신술이 해제되며 정상으로 돌아온 힘찬 맥박에 맞춰, 막대한 양의 오러가 전신을 타고 퍼져 나갔다.
허리를 비틀어 발검할 준비를 마친 칼릭스가, 무릎을 굽히며 꾹 눌렸다가 풀린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기 직전.
칼릭스의 시선이 비행하는 게일의 뒤를 따라 뛰어오는 기사 쪽으로 잠시 향했다.
‘호위기사?’
딱히 강자의 기운을 풍기는 자는 아니었다.
느껴지는 오러로 판단할 때, 익스퍼트 중급이나 될까 싶은 정도.
칼릭스의 입장에선 흔한 피라미나 다름없는 한참 아래의 존재다.
한데 묘하게도 그에게는 눈길을 잡아끄는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은 잔챙이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기척을 드러냈기에, 잠시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칼릭스는 호위로 보이는 뒤편의 기사를 무시하고, 땅을 박차며 게일을 향해 솟구쳐 검을 휘둘렀다.
“헉!?”
전혀 경계하지 않던 위치에서 날아든 검격에, 게일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다급히 손에 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허를 찔렸다지만 그 역시 초인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
찰나의 순간에 마력이 지팡이 끝으로 모여들며, 게일의 의지에 따라 방어의 마법이 구현되었다.
“앱솔루트 배리어!”
물리적인 충격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속성에 내성을 지닌 수십 종의 보호막이 겹겹이 중첩되어, 견고한 방벽을 만들어내는 방어계통 마법의 최고봉에 자리한 주문.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도 일격으로는 결코 파훼할 수 없는 절대보호의 마법이, 게일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법이 완전히 완성되는 속도보다, 다가오는 칼릭스의 검속이 조금 더 빨랐다.
콰지직!
서걱!
완전히 압축되지 못한 보호막들이 오러가 일렁거리는 검 앞에서,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고 깨지고 찢겨 나갔다.
“끄아아악!”
지팡이와 함께 잘려 나간 게일의 오른 손목이, 긴 비명 소리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