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17화
전면전(3)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제국의 정예기사단을 한순간에 갈아버린 칼릭스의 놀라운 힘.
그가 기마 돌격을 피해 자리를 옮기면 곧바로 병사들에게 침투를 명령하려 했던 제국군 지휘관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하나같이 창백해진 얼굴이 되었다.
초인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들의 상식을 벗어난 위력이었다.
“……정지!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궁병대! 화살을 쏴라!”
저 광경을 보고도 병사들에게 계속 진군을 명령할 순 없었다.
차라리 다른 부대들처럼 성벽을 공략하는 편이 낫지, 기사단의 돌격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는 상대를 병사들로 뭘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아예 모른 척할 순 없으니 형식적으로 화살이나 간간이 쏘아 보내도록 지시하고, 무너진 성벽 앞으로 모여들었던 제국군 부대의 지휘관들은 의식적으로 칼릭스가 지키는 공간에서 눈을 돌렸다.
“후욱, 후우으-!”
덕분에 숨을 돌릴 기회가 생긴 칼릭스는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요동치는 내부의 기운을 다스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고금제일을 다투는 절대자들의 무공을 펼치는 것은, 그랜드 마스터가 된 그로서도 적잖은 반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자칫 제국군이 미친 척하고 기사들을 따라 병력을 밀어붙였다면 꽤나 곤란해질 뻔했는데.
적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공세를 시들하게 만들어, 오히려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게 다행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쯤은 오러를 두른 맨몸으로도 견딜 수 있는 것이 그랜드 마스터이기에, 칼릭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제국군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군들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고. 적들도 더는 이쪽을 파고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알론드 님이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준다면…… 으음? 뭐지?’
살기를 뿜어내며 제국군의 접근을 차단하던 칼릭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적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움직였다.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성벽 한쪽을 무너뜨리고 물러났던 제국군 대마도사의 마법폭격이,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재개된 것이었다.
퍼어엉!
칼릭스가 서 있는 위치에서 대략 200미터쯤 떨어진 곳의 성벽에, 폭발음과 함께 대마도사의 마법이 작렬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위치이지만 예리한 감각을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던 칼릭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처음의 위치에서 물러나지 않은 건가? 적들이 알론드 님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아군 기사들을 이끌고 나간 알론드라면 지금쯤 충분히 적진을 파고들어 대마도사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적들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만, 그랜드 마스터가 포함된 기사단의 돌격을 완전히 봉쇄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에 가깝다.
기껏해야 병사들의 목숨을 대가로 최대한 벽을 쌓아 시간을 끄는 정도가 다일 텐데, 그렇게 번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마도사가 알론드를 피해 더 후방으로 대피하는 정도가 전부일 터였다.
하지만 적 대마도사는 후퇴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위치에서 태연하게 마법을 난사하고 있으니, 칼릭스가 혼란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기사든 마법사든 초인의 경지에 오르고 나면 기존의 장단점을 논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거리에서의 접전은 기사 쪽이 조금이나마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뒤집을 방법이라면 마법사가 미리 함정을 파두고 기다리는 정도가 전부일 텐데, 제국군은 바로 전날 오후에 이곳에 도착해 주둔지를 만들었고 동이 트기 무섭게 공세를 시작했다.
그랜드 마스터를 잡아낼 만한 대단한 마법함정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시야가 미치는 거리에서 대규모의 마력 운용이 있었다면 뜬눈으로 밤을 새운 칼릭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접근하고 있는데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계속 장거리 포격마법으로 마력을 소모하고 있다니. 제국의 대마도사가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 해도 말이 되질 않아.’
같은 초인인 알론드의 접근을 감지했을 것임에도 회피하지 않고 있다는 건, 무언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다.
따로 함정을 파둔 것은 아닌 듯한데, 대체 어떤 수단으로 방비를 한 것일까.
의문은 오래 걸리지 않아 해결되었다.
자신 쪽을 향한 공세가 줄어들어 여유가 생긴 김에, 칼릭스는 기감을 넓게 퍼뜨려 전장을 탐색했다.
전투 대신 탐지에 오러의 운용을 집중한다면,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도 어느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이 그랜드 마스터의 기감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경지의 초인들이 숨김없이 기운을 풍기고 있다면, 거리가 멀다 해도 탐지는 한결 수월해진다.
칼릭스는 이내 어렵지 않게 적진을 이미 사 분의 삼가량 파고든 알론드의 기운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최후방이면 적의 주력부대를 지나쳐 보급대와 예비대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사실상 대마도사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윽고 알론드가 뿜어내는 오러가 무언가와 충돌하며, 강렬한 기파를 사방으로 퍼뜨리는 모습이 칼릭스의 기감에 감지되었다.
“저건……!”
순간 평정심이 흔들린 탓에 집중력이 떨어지며, 알론드와 그의 주변을 탐색하던 칼릭스는 기감이 흐트러졌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집중이 깨져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발견한 그것은 분명 자신이나 알론드와 마찬가지의 격을 지닌 오러의 흔적이었다.
‘저쪽에도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니! 그럼 제국에서 초인을 둘이나 보냈단 말인가? 이 지역에 그렇게 과투자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대륙 여기저기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대도시이긴 해도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요충지도 아닌 이곳에, 제국에서 초인을 둘씩이나 보내다니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두 명의 초인을 상대하는 것은 최악의 최악을 가정했을 때나 벌어지는 일이었거늘. 설마 그게 실제로 일어나게 되다니.’
콰광! 퍼버벙!
자신과 떨어진 시야에 보이지 않는 위치의 성벽을 두들기는 마법폭격의 소음에, 칼릭스는 낭패한 얼굴이 되어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에 의해 알론드의 발이 묶였으니, 대마도사는 아무 방해 없이 도시의 성벽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구멍 하나는 나 혼자서 막아내기라도 할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 또 성벽이 무너진다면 수성의 난도는 급격히 올라가게 될 텐데.’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딱히 마땅한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알론드 쪽에 힘을 보태러 나갔다가는 그사이에 도시가 점령당할 테고, 그렇다고 마냥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결국 다른 곳에 틈이 생겨 적들이 밀려들 것이다.
‘도시를 내주고 아군들이 전멸한다 해도, 차라리 적 초인들을 제거하고 탈출하는 편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쉬이 실행에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가 아르마니아 소속인 것도 아니니 굳이 목숨 걸고 이곳을 지킬 필요는 없다.
상황이 좋지 않다면 연합군 병사들과 도시를 포기하고 빠져나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 역시도 문제 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칼릭스는 상대가 누구라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무너진 성벽을 홀로 지키느라 적지 않은 힘을 소모한 상황.
만약 알론드와 합류해 적 초인 두 명을 모두 쓰러뜨리고 난다면, 그 역시 한계라는 게 있는 이상 상당히 지친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과연 그 상태로 꽤 수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이만 명이 넘는 제국군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무림에서도 대단한 고수라 한들 관군과의 마찰은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그런 인해전술 때문이니.’
마스터만 해도 수백 수천 단위의 싸움에선 무적에 가깝다.
그랜드 마스터라면 홀로 만 명의 적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동일한 경지의 상대와 생사결을 벌여 지친 후라면 어떨까.
여전히 몇 수 아래의 기사쯤은 한 칼에 베어낼 수 있겠지만, 초인이라 해도 탈진한 상태에선 일반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창칼과 눈먼 화살에 다칠 수 있는 법이다.
생각이 깊어진 칼릭스가 쉬이 대응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라 기감에 쉽게 감지되고 있던 알론드가, 아군이 있는 방향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느껴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후퇴할 수밖에 없겠지. 일단 알론드 님과 합류한 뒤 의논해서 대응책을 정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발밑으로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대마도사의 마법폭격에 결국 다른 쪽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지만 적들의 공세가 딱히 거세지지는 않았다.
알론드가 제국군을 무참히 베어 넘기며 아군 진영으로 복귀하고 있어, 전열에 서 있던 적들이 뒤에서 느껴지는 소란에 신경 쓰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여유를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가 알론드의 뒤를 쫓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유리한 상황이지만 추가로 쐐기를 박으러 나서진 않는 건가. 하긴 저들 입장에선 양측 병력 간의 우위가 확실하니, 굳이 불확실한 초인끼리의 싸움을 우선시할 마음은 없을지도.’
성벽에 구멍을 두 군데나 뚫어놓았으니, 야금야금 연합군의 전력을 갉아먹기만 해도 점령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제국군 지휘부에서 전열에 후퇴 명령을 전달하며, 몇 시간에 걸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면목이 없구먼.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네.”
“그랜드 마스터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설마 제국의 초인이 둘씩이나 나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르마니아 측에 대가를 단단히 청구해야겠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이 도시를 지켜냈을 때나 가능한 일이네만. 오늘은 저들이 물러났지만 내일 다시 공세가 펼쳐지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알론드의 말에 칼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부분을 보강하도록 지시했지만, 그런 임시방편으로는 적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겠지요. 대마도사의 마법이면 또다시 성벽에 균열이 생길 테고…….”
“어찌할 텐가? 이대로 싸움을 계속해 봐야 연합군의 패배는 확정일세.”
오늘 있던 전투의 피로를 풀고 만전의 상태로 내일 적극적인 점령을 시도할 생각인지, 제국군은 주둔지까지 병력을 후퇴시키고 휴식을 취하는 선택을 했다.
칼릭스와 알론드는 연합군의 도시 수비가, 이대로는 결코 내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가 시도할 만한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인가.’
훗날을 도모하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두 사람만이라도 몸을 빼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적인 방법으로 변수를 만드는 것.
쉽게 말해 도망치거나 무리하게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의 방침을 정해야 한다.
고민하던 칼릭스는 결국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조국의 영토와 국민들이 아니라지만, 이곳에 있는 아군들을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정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도주해야겠지만, 시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부터 실행하고 싶었다.
“알론드 님. 아무래도 저희가 조금 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쓸 만한 비책이라도 있는가?”
전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칼릭스의 말에, 알론드가 눈을 빛내며 방법을 물어보았다.
이윽고 칼릭스의 입이 열리며, 적잖이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계획안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