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12화
초인은 귀하다.
인구수가 수백만 명에서 천만 명 단위에 이르는 국가에서도, 고작 한 사람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초인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초인을 보유한 나라는 그렇지 못한 나라와 비교했을 때, 국제적인 위상에서 큰 차이를 지닌다.
거기에 만일 초인을 둘 이상 보유하고 있다면, 주변 국가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초강대국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영토가 있는 곳을 제외한 다른 지역이라면, 세계의 패권을 논할 수 있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혹시 지금 당장의 국력이 중소국가 수준이라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연스럽게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초인이 없는 국가들은 알아서 바짝 엎드리며 상전을 모시듯 외교적 관계에서 대우를 해줄 테고, 초인보유국이라 하더라도 괜한 분쟁으로 자신들의 초인을 잃게 될까 봐 많은 부분에서 양보를 해주기 때문.
제국이 저렇게 절대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게 된 것도, 어느 시대이건 항상 둘 이상의 초인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아르마니아 역시 두 명의 초인을 보유하게 된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남부 지역의 패자라 할 수 있는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유독 다른 이들보다 더 알펜시아를 경계했다.
‘정말로 두 명의 초인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맙소사! 고작 삼십 대에 그랜드 마스터라고?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향후에는 저 알펜시아가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강국이 되겠군. 그리고 우리 아르마니아와 패권을 다투는 경쟁자로 자라나겠지. 아무래도 그전에 기선을 제압해 둘 필요가 있겠는데.’
알론드와 함께 모임을 찾아온 칼릭스를 발견한 아르마니아의 초인들이, 다짜고짜 실력 증명을 운운하며 시비를 걸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알론드와 칼릭스가 자신들과 같은 경지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경험이 부족한 지금 대련을 통해 패배를 맛보게 만들어, 아르마니아가 알펜시아보다 위에 있다는 인식을 각인시켜 둘 생각이었다.
‘한심하군.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그런 상대방의 생각을 파악한 칼릭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전력을 다해 제국에 대항해도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 힘을 합치기로 한 사람들끼리 아옹다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국가들에서 벌어진 난리를 보면서 이렇게 모여들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턱 아래로 제국의 칼날이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거지.’
연합을 구성하긴 했으나 대부분은 제국의 횡포가 잠잠해진 뒤의 이권 다툼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
제국이 진심으로 대륙통일을 노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국가는 아직까진 알펜시아가 유일했다.
정확히는 몇 차례 제국과 관련된 수상한 정황을 접한 칼릭스가, 의심을 품고 최악을 가정해 대비를 해온 것이지만.
어쨌든 진지하게 제국과의 전면전을 예상하고, 연합의 초인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실력 증명이라. 조금 당황스럽지만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럼 두 분이서 제 상대를 하시렵니까?”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고 약간 불쾌해진 칼릭스가, 차가운 음성으로 아르마니아의 그랜드 마스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커흠! 실제 전투도 아닌데 설마 우리가 둘이서 그대를 핍박하겠는가? 나 카르고 아우소만이 그대의 실력을 검증해보겠네.”
은근히 투기를 흘리며 칼릭스를 압박하던 초인들 중 하나가, 대련 의사를 보인 칼릭스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건방진 녀석. 둘이서 덤비겠느냐고?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허물고 나니 세상이 전부 자기 것 같은 기분이겠지. 나 역시 당시엔 그랬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초인의 경지에서도 격차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도록 하마.’
카르고는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넘은 지 이미 십 년이 지난 연륜 있는 기사였다.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 해도 막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인 칼릭스에게,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물론 승패에 절대라는 것은 없기에 결코 방심은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자신의 승산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8할 이상일 거라 예견하고 있었다.
두 초인의 대련은 주변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식이 알려지자 어느새 백여 명에 달하는 관중들이 모이며 순식간에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연합의 모임에 참가한 나머지 초인들은 물론이며, 그들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이들이 전부 몰려든 탓이다.
본래 초인들 간의 대련이라 하면 평범한 사람은 위험해서 가까이 있을 수 없어야 정상이지만.
대련을 참관하는 초인들 중 대마도사 두 사람이 방호결계를 펼치며 그럴싸한 무대가 만들어졌기에, 일반인들이 관람을 하기에도 딱히 문제는 없었다.
“선배 된 도리로 선공은 양보하도록 하지. 들어오시게.”
“…….”
검례를 취하며 마주 선 카르고가 먼저 공격하라는 말을 했으나, 칼릭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국과 직접 부딪히기 전까진 너무 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바디 체인지를 경험하며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칼릭스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노련한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마찬가지다.
마스터 시절에도 무림인들의 기억이라는 능력을 통해, 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끌어다 썼던 칼릭스다.
이제 온전히 초인의 경계 안에 발을 들인 그가, 실력이 상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험 부족의 애송이일 리가 만무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제대로 실력을 보이고, 연합 내의 영향력을 최대로 올리는 쪽으로 가야겠어.’
말로만 제국에 대항한다 할 뿐이고 여전히 다들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 급급한 눈치인 것 같으니, 칼릭스는 이참에 강력한 발언권을 확보하고 제대로 제국을 경계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겠단 생각을 가졌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겐가? 대련을 할 생각이 없다면 기권해도 상관은 없네만!”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이 멀뚱히 서있는 칼릭스의 모습에, 카르고는 살짝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떤 무공으로 상대를 요리할까 잠시 생각하던 칼릭스는, 문득 자신을 향한 시선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의 얼굴이 있음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알펜시아의 수행원들 중에는 마이언가의 기사들도 몇 사람이 속해있었으며, 최근 젊은 기사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아즐린 또한 그런 인원들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제자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었지. 보아하니 아즐린의 성취가 상당해졌고, 매화검법도 꽤나 완숙한 수준에 이른 것 같은데. 이참에 상승의 경지에 대해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칼릭스는 손가락을 들어 관중들 사이에 있는 아즐린을 향했다가, 이내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제자에게 집중해서 보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에? 엇, 넵!”
당황한 아즐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켜본 칼릭스가, 이윽고 검을 뽑아 들며 인상을 굳히고 있는 자신의 상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야 이쪽을 보는군. 혹시 젊음을 무기로 삼아, 내가 늙어죽길 기다리고 있는 겐가? 그게 그대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할 것 같네만.”
“흠. 기다리게 만든 건 미안합니다. 이제 최대한 빨리 쉴 수 있게 해드리지요.”
“허! 자만심이 아주 대단하군.”
자신을 가뿐하게 꺾어 돌려보내 주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이해한 카르고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다가, 이내 이를 드러내며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기운을 발산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를 죽일 마음으로 유도한 대련이었는데, 저리 건방진 태도를 보이니 손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둘 생각도 사라졌다.
‘선공은 양보해 주기로 했으니 어디 한번 공격해 보거라. 검을 대는 순간 그대로 전력을 다해 박살 내주마.’
오러를 잔뜩 끌어올린 카르고는 자세를 취하며 칼릭스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칼릭스의 공세가 시작되며 초인들의 싸움이 막을 올렸다.
하지만 전투의 방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식으로 흘러갔다.
쉬시식-! 피릭!
칼릭스의 몸에서 솟구친 자색의 기류가 검을 따라 흐르며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가 싶더니, 이윽고 오러로 이루어진 꽃잎이 사방을 가득 메우며 어지럽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꽃? 오러로 만들어내는 잔상인 건가?”
“아름답긴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끼리 눈속임 따위가 통할 리는…….”
처음 보는 화려한 검술에 몇 마디씩 내뱉던 이들이, 훅 하고 콧속을 파고드는 향기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짙은 꽃향기를 맡은 그들은 칼릭스가 만들어낸 꽃잎들이 단순한 잔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칠절매화검법.
삼초식 향만천지.
매화의 향기가 천지를 가득 채우노니.
‘잘 보고 있어라 아즐린. 네가 다음에 배워야할 무공이니.’
몸에서 흐르는 희미한 자색의 기류는 화산파의 장문인에게만 전수된다는 자하신공의 흔적이며.
칠절매화검은 화산파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정예집단인, 매화검수에 발탁된 자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화산파 무공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거의 대성한 아즐린이라면, 충분히 그의 가르침을 따라올 수 있을 터였다.
‘아카데미 출신으로 아즐린처럼 매화검법을 전수받은 아이들도 제법 있으니, 나중에 아즐린을 기사단장으로 삼고 매화검을 익힌 인재들로 화산파의 매화검수 같은 정예집단을 마이언가에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기사단의 명칭이 너무 여성스러운 느낌이 될 것 같긴 하다만.’
대련 중에 그런 딴 생각을 떠올릴 만큼, 같은 초인을 상대하면서도 칼릭스에겐 제법 여유가 있었다.
“이런 괴상한 수작을!”
반면에 칼릭스의 공격을 받아내는 카르고는 생전 처음 보는 변검과 환검의 묘리가 담긴 최상승의 고절한 무공에, 선공을 흘려내고 강력한 일격을 날리겠다는 초기의 계획도 잊고 쩔쩔매며 연신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무슨 이딴 검술이 다 있는가!’
강맹한 위력이 담긴 검격으로 눈앞의 꽃잎들을 단숨에 찢어발겨도, 사방에 가득 찬 다른 꽃잎들이 금세 흔들거리며 날아와 빈자리를 채운다.
하늘거리는 꽃잎 따위에 무슨 위력이 있겠느냐 싶어 무시하고 싶지만, 초인의 날카로운 감각이 저 장난 같은 오러 현상에 결코 몸을 대어선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큭! 그렇다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만 장악하면 그만이다. 움직임을 방해받기 전에 단숨에 놈의 앞까지 도달하면 되겠지!’
쿠웅!
전력을 다해 오러를 운용한 카르고의 발이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이어서 산도 쪼갤 수 있을 듯한 무지막지한 힘을 담은 검격이, 주변을 날아다니는 꽃잎을 몰아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 보는 수법에 당황하긴 했지만 카르고 역시 검 한 자루로 초인의 반열에 든 강자.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강검을 극한으로 수련한 기사들의 정점이, 나풀거리는 오러의 꽃잎들을 파괴하며 칼릭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거대한 충돌음이 울리며 강렬한 기파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