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01화
평범한 이들에겐 절대적인 권력으로 여겨질 왕위라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시엘라는 별다른 감흥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동적인 성향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배움에 목말라하던 그녀였기에, 칼릭스와 도미닉이 붙여준 조언자들을 곁에 두고 왕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익혀 나갈 뿐이었다.
국력이 크게 쇠퇴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알펜시아의 회복세는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위정자들이 합심하여 전쟁의 후유증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웠던 국내의 정세들이 금방 안정기에 도달하는 게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본래는 이런 상황에도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부정부패를 일삼는 귀족들이 많아야 정상이겠으나.
새로운 왕권에서 휘두르는 칼날 앞에 자기 욕심을 채우려던 몇몇 지도층들의 목이 날아갔기에, 알펜시아는 큰 소란 없이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백성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한 정치를 시행할 수 있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지금 시기에 내 쪽의 세력에 반기를 들려는 이가 있을 리 없겠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군부의 권한이 막강한 시기이니만큼, 왕국 최강의 군벌이라 할 수 있는 칼릭스나 도미닉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려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백작급 이상의 고위귀족들이라 해도 두 사람의 앞에선 몸을 납작 숙여야만 했다.
사실상 알펜시아의 실권은 이 두 사람이 나눠 갖고 있는 상황.
특히나 칼릭스의 경우엔 적법한 절차에 의해 자신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을 국왕의 자리에 올려두었으니, 누가 봐도 왕권을 등에 업은 가장 강력한 권력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국왕에게 직언을 넣어 시행하는 정책들은, 기존의 기득권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힘든 시기를 빨리 지나 보내려면, 나라의 근간이 되는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들부터 해소되어야만 하겠지. 닐슨 선배의 말처럼 배부른 돼지들이 설치고 다녀서야 국력의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을 터.’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칼릭스는 도미닉과 힘을 합쳐, 알펜시아의 귀족가문들과 관료들을 모조리 다 탈탈 털어대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표적은 카이문 왕국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힘을 보태지 않고, 눈치만 보며 몸을 사리던 일부 귀족들.
전시에 작은 공적조차 세우지 못했으며, 국가적 위기에 걸맞은 태도를 취하지 못한 자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폐하. 힘든 시기에 자신의 잇속을 채우느라 귀족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던 자들을 처벌하려 하니,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승님의 뜻대로 하세요.”
얼마 전까지 가문의 기사이자 제자로 두고 있던 시엘라에게, 이제는 군신의 예를 취하며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게 조금 어색하긴 했으나.
형식이 달라졌을 뿐 시엘라는 여전히 칼릭스를 마음속으론 윗사람으로 여기며, 그가 요청하는 모든 일들에 반대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칼릭스는 여전히 공경해야 할 스승이며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은인이었다.
왕의 자리에 오르며 여러 가지 공부에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엘라는 여전히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칼릭스가 가르친 무공을 수련해 왔다.
“왕이라는 자리, 아직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건 나쁘지 않네요. 여기 있는 것만으로 스승님께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기도 해요. 물론 스승님께서 그만하라고 하면 언제든 이 자리에서 내려올 테지만요.”
“으음.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후후, 저도 이제 그 정도 눈치는 볼 줄 알아요.”
왕국 역사상 이 정도로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신하는 없었을 것이다.
국가 최고의 무력과 권력을 양어깨에 나란히 얹은 칼릭스는, 부하들과 함께 친히 귀족가의 영지들을 돌아다니며 개혁을 위한 칼날을 휘둘렀다.
고위귀족들부터 하급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칼릭스의 눈길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인물이나 세력 따위는 알펜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토를 봉쇄한 채 영지민들을 가혹하게 쥐어짜 곳간을 채워두고, 수틀리면 타국으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던 이들.
그런 자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로 국고가 풍족하게 채워졌다.
“이 돈으로 진즉에 인재를 양성해 군사력을 키웠다면, 나라에 마스터 두어 명 정도는 더 보유하고 있었을지도.”
“쓰지도 않고 쌓아두기만 할 거면서, 다들 왜 그리 악착같이 영주민들을 혹사시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게 일반적인 귀족들의 태도로서 정상인 걸지도 모르겠군요. 기사 출신인 우리는 아직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 비슷한 모습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칼릭스가 최근 들어 성향이 제법 변한 것처럼 보이는 닐슨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올려뒀는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제 손으로 직접 처벌을 해야 할 테니.”
마이언가의 영주 대행으로 온갖 잡무를 처리해 왔던 닐슨은,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귀족작위를 받아 백작위에 오르게 되었다.
원한다면 자잘한 절차 따위 무시하고 작위를 내려주는 것이 어렵지 않은 칼릭스였기에, 그의 힘으로 가신 한 사람쯤 백작급에 임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번 일로 숙청당해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들만 해도 두 자릿수에 달하니, 새로운 귀족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 타이밍이었고 말이다.
물론 귀족이 되었다고 해도 닐슨은 여전히 그의 충직한 가신으로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능력이야 사실 고만고만하지만 애초에 믿고 실무를 맡길 수 있을 만한 이가 드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문의 일이 그리 많진 않은 것 같지만, 세력이 커진 만큼 행정관을 더 늘려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니, 일이 많지 않으신 건 대부분의 업무를 다 저한테 떠넘기시니까…….”
“으음?”
“크흠, 아닙니다. 인력을 늘리자는 이야기면 저야 무조건 찬성입죠. 한데 쓸 만한 인재가 남아 있을지…….”
숙청과정에서 기존의 왕국 관료들 중에도 귀족가문들과 결탁해 탈세를 돕거나 사업에 과도한 특혜를 주는 등, 부정행위에 연루되어 잘려 나간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영지 일을 돌볼 행정관을 수급할 곳도 마땅치가 않은 실정이었다.
“인재가 부족하면 키워서 쓰기라도 해야 하겠군요. 아카데미에 행정과목에 특화된 반을 신설해, 하급관리들의 양성에도 자금을 지원해 보도록 합시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칼릭스는 국고로 환수한 귀족들의 재산을, 양질의 무력을 키워내기 위해 설립했던 아카데미에 투자하며 그 규모를 국가적인 단위로 확대하고 있던 차였다.
거기에 추가로 행정관 육성을 위한 코스를 작게 만드는 것쯤은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내 지식들을 활용해 수준 높은 기사들을 키워낸다면 왕국의 힘은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겠지. 거기에 관료들까지 아카데미 출신으로 자리를 채운다면, 내 가문의 영향력은 사실상 왕가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어.’
이미 예전의 평범했던 시절에 바라던 수준 이상의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었기에, 여기서 더 국내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것에는 크게 흥미가 생기진 않았으나.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가문의 힘이 커지는 것을 굳이 꺼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뀌게 되면, 독재에 가까운 힘을 지닌 내 가문의 모습이 좋지 않게 변질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런 것까지 따져가며 행동을 조심할 여유는 없으니.’
남들 손에 맡겨뒀다간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 같으니, 지금 같은 시기엔 자신이 주도적으로 국가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게 맞을 것이라 본다.
많은 귀족들이 앞에선 그에게 굽실거리다가 뒤에선 이 나라엔 왕이 두 명이라며 칼릭스의 욕을 일삼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믿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알펜시아의 회복속도는 빠른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배부른 돼지들을 도살해 국가의 원동력인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하고, 미래를 위해 많은 투자를 아낌없이 퍼붓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동안.
칼릭스의 마음속에 있는 걱정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제국이 언제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해올지 모르니 불안하군.’
지난 카이문과의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정체불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실상은 제국에 소속된 초인이라고 칼릭스는 이제 확신하고 있었다.
알펜시아의 역량을 동원해 제국의 동향을 살피는 데에 적잖은 노력을 들임으로써, 그들의 행동거지가 매우 수상하다는 점을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 중소국가들의 인재를 빼가는 건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빈도가 굉장히 심해졌다고 했지.’
추가로 알펜시아와 카이문의 전쟁처럼, 대륙 전체로 봤을 때 묘하게 국가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잦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었다.
게다가 아직 명확한 증거까지는 없지만, 그 또한 배후에서 제국이 어떤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발견되었다.
타국의 인재 유출, 그리고 전쟁 조장.
전자는 그러려니 넘어간다 해도 후자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국가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수작을 부리는 듯한 모습이군. 하지만 이미 대륙 최강의 국가인 팔론시아 제국이 왜 그런 짓을…….’
칼릭스는 대륙인이라면 그 위용을 모르는 이가 없는 제국과 그곳의 황가에 대해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팔론시아 황가는 핏줄로 이어지는 뛰어난 무재와 막대한 지원이 더해지며, 한 세기에 최소 한 사람 이상의 초인을 배출해 내는 대단한 가문이다.
가문에 초인의 공백기가 한 번도 없던 만큼,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긴 세월 동안 막강한 권력을 발휘해온 팔론시아 황가.
그 절대자의 혈통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검술과 오러 비술들은, 검을 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도 그런 대단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도록 만든다.
‘제국 황가의 비술이라면 내 기억 속의 무공들과 비교한다 해도 쉬이 우열을 가리기 어렵겠지.’
어쨌거나 그 잘나신 제국과 황가에서, 무엇을 위해 타국의 일에 배후에서 간섭하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주변 나라들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집어삼켜, 자신들의 영토를 더 확장하려는 속셈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알펜시아는 제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다.
이해가 가지 않아 고민에 잠겨 있던 칼릭스는, 문득 떠오르는 충격적인 생각이 있어 팔뚝에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