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98화
울컥.
칼릭스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간신히 다시 삼켰다.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다투는 천마의 무공은, 아무리 기억을 빌려 쓰는 칼릭스라 해도 아무 탈 없이 선보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부담이 적지 않았을 힘을, 남들보다 특별하다고는 해도 아직 마스터에 머물러 있는 그가 사용했으니.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기혈이 뒤틀리며, 몸속의 혈도 하나하나를 칼날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칼릭스를 덮쳐왔다.
‘크윽. 내상을 입을 건 각오했지만, 예상보다 더 부작용이 큰 무공이로군.’
그래도 허장성세로 적들을 멈추게 하려던 작전은 확실히 성공했다.
당장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기 힘든 상태가 되었지만, 칼릭스는 애써 허리를 쭉 피며 오연한 눈빛으로 장내를 쭉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카이문 군의 기사들이 다들 움찔거리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기사단을 이끌던 삼인의 마스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또 있었다니…….’
‘어떻게 알펜시아 같이 변변찮은 나라에서, 초인이 둘씩이나 탄생할 수 있단 말인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동공들을 마주하면서, 칼릭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지막하게 경고를 발했다.
“물러가라. 더 이상의 진입은 허락하지 않겠다.”
“읏…….”
칼릭스의 목소리를 들은 세 명의 마스터가, 몸을 움츠리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각기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연륜과 작위에서 가장 윗줄에 있기에 수장 역할을 하고 있던 카르베이 후작이, 의문이 담긴 음성으로 그를 향해 되물었다.
“우릴…… 그냥 보내주겠다는 말입니까?”
지진을 일으키는 것처럼 땅을 울리는 발걸음 하나에 이미 압도당한 마스터들의 입장에선, 칼릭스의 말이 반가우면서도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의 전력으로 그랜드 마스터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자신들의 목숨은 상대의 손아귀 안에 들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바로 공격하지 않고 곱게 보내주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러가라고? 지금 우리를 제거한다면 카이문 왕국의 전력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인데?’
‘종전협약을 논의하던 중에 기습적으로 기사단을 움직인 것은, 사실 비열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작전이었다. 한데 얼마든지 우릴 끝장 낼 수 있으면서도, 아무런 제제 없이 그냥 돌려보내주겠다는 건가?’
짧은 시간 사이에 머리를 굴린 카르베이 후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혹시 우릴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방금 같은 힘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다거나.’
카르베이는 칼릭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삼십대의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랜드 마스터라니, 솔직히 말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한다.
초인이 아니고서야 보일 수 없는 무위를 보여주긴 했으나, 어쩌면 그 한번을 위해 상대도 크게 무리를 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어망 속에 갇힌 물고기나 다름없는 자신들을 그냥 보내주는 것이라면?
하지만 카르베이는 차마 머릿속의 의문을 직접적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못했다.
“……자비에 감사하오. 물러나겠소.”
방금 전 경험한 상대방의 무시무시한 위용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데, 자신들의 목숨을 전부 걸고 상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만큼의 배짱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런 일말의 의혹 하나만으로, 초인의 무위를 보여준 자를 시험해보려 들긴 어려울 것이다.
‘작전은 실패다. 초인이 둘이라면 우리 측의 전략목표와 대응 역시 바뀌어야겠지. 일단은 어서 빨리 본대에 이 소식을 전해야만 하겠어.’
자신의 뜻을 통보했으니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만히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칼릭스의 앞에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카이문 군의 기사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한 채, 패잔병 같은 몰골로 마이언가의 영지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흐, 크큭…… 쿨럭!”
저 멀리 점이 되어 작아져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 짓던 칼릭스는, 이내 몸을 돌리고 바닥에 쓰러지며 비릿한 핏물을 토해내었다.
극심한 내상에 몸 상태가 완전히 엉망이다.
기만전술을 통해 영지를 지켰고 수도로 향하는 적의 정예전력들을 막아냈지만, 당분간은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정양에 힘써야 되는 몸이 되어버렸다.
‘큰일이군. 전쟁이 재개되었으니 다시 전선에 뛰어들어 왕국을 지켜야 하는데, 몸 상태가 이렇게 되어서야.’
카이문 군에 있던 정체불명의 초인을 막으려면, 알론드와 자신이 힘을 합쳐야만 상대가 가능할 텐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장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쫓아낸 마스터들을 통해 초인을 흉내 낸 자신의 정보가 저들에게 알려질 테니, 그로인해 카이문 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억제력이 생기리라 기대하는 수밖에.
그런 칼릭스의 생각이 적중한 것인지 완전히 끝장을 보자는 듯이 전쟁을 재개했던 카이문 군은, 진격속도를 늦춘 채 꽤나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였다.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에 집중하며 간간이 전해져 오는 바깥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칼릭스는, 자신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적들이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측의 전력에 그랜드 마스터가 둘이라고 생각할 테니, 용병으로 나선 카이문 군의 초인 또한 쉬이 움직이기가 어렵겠지.’
실상은 칼릭스의 속임수일 뿐이고 오히려 내상으로 인해 운신이 어려운 지금이 상대방에겐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카이문 군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혹시나 초인 둘의 합공을 받아 용병으로 끌어들인 아군 초인이 당하기라도 한다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게 될 것이기 때문.
다만 그렇다 해도 모든 상황이 알펜시아 측에 유리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칼릭스 공. 이쪽에서 움직임을 놓친 기사단의 진군을 막아냈다는 소식을 들었네.
“예. 공작 각하. 운이 따라준 덕분에 적들이 포기하고 물러가게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으음. 단지 운이라는 건가? 카이문 놈들의 진영에서 퍼지는 소문은 조금 다른 것 같았네만.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도미닉 공작의 말에, 칼릭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설마 제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문입니까? 그걸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아닌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소문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닙니다. 숨겨둔 한 수가 있었고 거기에 약간의 연출을 가미해, 적들이 지레짐작하고 겁을 먹도록 기만했을 뿐이지요.”
-그 자리에 마스터가 셋이나 있었는데 거짓으로 속일 수 있었을 리…… 끄응, 아닐세. 자네가 그렇다니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 그래도 매우 아쉽군. 정말로 초인이 한 명 더 합류한다면, 단번에 전황을 뒤바꿀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도미닉의 목소리에 칼릭스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절대고수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무공을 알고 있음에도, 아직 몸이 따라주지 못해 이 모양 이 꼴이니 답답한 마음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온전히 자신의 것들이 되긴 하겠지만, 당장의 상황이 이러하니 이렇게 사기적인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만족스러운 점이 생기곤 한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빨리 가세하여 도움을 드려야 할 텐데. 적 기사단을 막아내는 일로 상당한 부상을 입은 터라…….”
-아닐세. 그것만으로도 칼릭스 공은 할 일을 차고 넘치게 했지. 어차피 당장은 자네가 초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합류한다고 해도 전투에 투입될 수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도미닉의 말대로 지금 당장 가짜 소문의 덕을 잘 보고 있는 와중인데, 굳이 칼릭스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긴 했다.
괜히 상대측 초인의 눈에 띠어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면, 적들의 공세가 거세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전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좋지는 않네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군. 적들이 자네의 존재를 경계하는지, 최대한 초인의 행동을 노출하지 않으려 주의하는 중일세.
“우리가 초인의 수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이전처럼 쉬이 작전에 투입했다가는 빈틈을 찔러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군요.”
-그렇겠지. 분위기가 이대로만 계속 지속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종전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네. 그럼……. 이야기는 이쯤하지. 자네는 무리하게 더 나서려하지 말고, 몸조리를 잘 하고 있으시게.
“알겠습니다. 각하께서도 보중하십시오.”
알펜시아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는 도미닉 공작과의 이야기를 통해, 칼릭스는 대략적인 전장의 상황을 파악했다.
어차피 부상 중에 있기에, 당장은 무리해서 무언가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아군의 사정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릭스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요양에 집중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가 몸을 추스르고 다시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해졌을 때의 일이었다.
“여, 영주님. 급보입니다.”
“……또 무슨 일입니까?”
영주대행 닐슨의 얼굴에 떠오른 다급함을 확인한 칼릭스는,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게, 국왕 폐하께서 서거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 갑자기 언제 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이왕자께서 즉위한 건 이미-”
“그게 아니라, 그 새로운 국왕께서 명을 달리하셨다니까요!”
“아니…… 그럴 리가?”
중년의 나이이긴 하지만 역대 국왕들이 집권했던 때와 비교하면, 현 국왕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쌩쌩한 현역이었다.
그런데 그가 왕좌에 오른 지 고작 몇 달이나 되었다고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는 말인가.
그가 무슨 지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거늘.
‘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카이문 군의 그랜드 마스터가 암살자가 되어 성도에 침투하기라도 한 건가?’
황당해하던 칼릭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마법시설이 설치된 방으로 뛰어갔다.
닐슨이 받은 연락은 왕실 측에서 보낸 단방향 통신의 일방적인 짧은 전문이 전부였기에, 자세한 사정에 대해 듣기 위해선 당연히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확실했다.
알론드와 칼릭스가 권력을 휘두르는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현재 왕국에서 가장 강한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당연히 군부의 총사령관인 도미닉 공작이다.
그렇기에 최근에도 그와 통신을 한 적이 있던 칼릭스는, 곧장 도미닉 공작에게로 연락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