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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96화 (96/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96화

기만

알론드의 패퇴 이후로 더 이상 다른 희망이 나오지 않았기에, 알펜시아군은 결국 그동안 적들을 막아내던 저지선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평야에서의 대규모 회전에서 밀려났으니, 이제 남은 전투방식은 성에 틀어박혀 수성전을 벌이는 것뿐.

그렇게 되면 전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된 성벽을 지닌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들이, 적군에게 짓밟혀 극심한 피해를 입겠지만.

전력 자체가 부족한 알펜시아군의 입장에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알론드 님이 계시니 전쟁은 당연히 필승이라 여겼거늘. 우리 영지군의 명성을 떨칠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는데, 설마 상대측에서도 그랜드 마스터가 튀어나올 줄은…….’

칼릭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기가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이도록 티가 나는 병사들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연이은 후퇴로 남부지역의 대부분을 적들에게 내어주었으니, 오히려 사기가 유지되면 그게 신기한 일이리라.

수성전은 분명히 공성을 해야 하는 상대방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이긴 하나, 초인의 존재는 그 차이마저도 크게 줄어들게 만든다.

강대한 오러로 폭증시킨 신체능력을 발휘해 몇 초 만에 성벽을 기어오를 수 있는 그랜드 마스터의 활약은, 성을 지키는 입장에서 가장 큰 골치였다.

적군의 마법사들에게 온갖 방어마법 및 보조마법들을 받고 달려드는 그랜드 마스터는, 미리 대비를 한다 해도 쉬이 저지할 수 없는 재난이다.

거기에 초인의 돌진을 막아보겠다고 한 지점에만 전력을 투자하게 되면, 결국 허술해진 다른 곳들이 쉽게 뚫리게 될 수밖에 없다.

알고도 못 막는 전술이니 당하는 입장에선 그저 답답할 뿐.

‘알론드 님의 부상이 완치되어야 그나마 수성의 이점을 살려, 상대측 초인을 함정에 빠뜨려 볼 만할 텐데.’

지난번 격돌에서 상대에게 밀려 부상을 입은 알론드는, 현재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최대한 몸을 추스르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겉에 난 외상은 종군사제들의 치료를 받아 금방 지워냈지만, 내부에 스며든 오러로 인해 입은 내상이 문제였다.

오러가 깃든 수단에 당한 상처는 본디 쉬이 회복이 되질 않는다.

하물며 오러 유저들의 정점에 서 있는 그랜드 마스터가 남긴 흔적은, 아주 위중한 상태가 아니라 해도 완쾌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의 정양이 필요했다.

‘전쟁이 있기 전에 알론드 님께서 새로운 경지에 대해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다면, 그나마 이리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동급의 경지라 해도 이제 갓 초입에 발을 들인 이와 자신의 경지에 숙달된 자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차이만 봐도 확실히 카이문군의 그랜드 마스터는, 알론드 님처럼 최근에 탄생한 초인은 아니야. 다른 왕국 출신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순 없지만, 그래도 역시 제국에서 은밀히 보내준 용병일 확률이 가장 높겠지.’

이미 거대하게 형성된 자신들의 울타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던 제국이, 어째서 타국의 전쟁에 관여를 하는 것인지.

당장의 전쟁 자체도 머리가 아프지만 뒤에 깔린 배경 또한 의문이기에, 칼릭스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당장은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

그가 왕국군 고위층들과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방법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때였다.

“칼릭스 공. 더 이상 작전회의는 필요 없을 듯하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미닉 각하.”

“후우……! 종전일세.”

수도군을 지휘하며 합류한 도미닉 이플리트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건넨 이야기에, 칼릭스는 무언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멍한 표정이 되었다.

“종전이라니요? 뜬금없이 무슨…….”

“폐하께서 항복 선언을 하셨다네. 더 이상 카이문 왕국과 충돌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지.”

“아니, 항복이라니……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어찌 이리 쉽게…….”

국토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유린한 침략자들에게 굴복하겠다는 결정.

국무의 정점에 선 왕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고 하니, 신하 된 이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해도 역전의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던 칼릭스의 입장에선, 허탈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알론드 프리즈먼 백작이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굉장히 놀라긴 했지만…… 카이문 왕국에도 그랜드 마스터가 등장했고, 초인끼리의 전투에서 이미 한차례 패배를 겪은 상태이지 않나.”

“아무래도 이제 막 한계를 넘으신 만큼 역량 면에서 차이가 있긴 했습니다만, 여건만 잘 갖춘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알론드 님의 부상도 거의 다 회복이 되었고-”

“알아, 알고 있네! 나한테 성토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나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일세!”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짜증을 내는 도미닉의 모습에, 칼릭스는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수많은 말들을 되삼켰다.

아무리 도미닉이 국가의 대들보라 할 수 있는 명문 공작가의 가주라지만, 국왕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터.

물론 그가 왕령을 거부한 채 자신의 세력들을 이끌고, 끝까지 적군에게 대항하려면 그렇게 할 수는 있는 능력을 갖췄으나.

알펜시아의 전체가 합심하여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분열된 상태로 아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내 입으로 모시는 주군을 욕되게 말하는 것도 좀 그러네만, 현 국왕 폐하께서는 성정자체가 소심하고 유약한 면이 있다네.”

이어서 도미닉은 남부 대부분이 완전히 카이문군의 손에 넘어가니, 금방이라도 왕성에 있는 본인에게까지 적들의 창칼이 들이닥칠까 국왕이 겁을 먹고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

“조만간 카이문 왕국 측과 종전에 대한 협의가 있을 걸세. 무슨 원한으로 벌어진 전쟁도 아니고 우리 역시 초인을 보유하고 있으니, 아마 카이문에서도 적당히 합의를 보려고 하겠지. 그렇다 해도 아마 남부의 많은 토지들과 엄청난 양의 재화가 넘어가게 되겠지만. 염병할!”

“하, 하…….”

헛웃음을 흘린 칼릭스는 욕설을 내뱉는 도미닉 공작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군영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이들이 이렇게나 있는데 항복이라니.

겁쟁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결정을 내린 국왕의 행동에, 자신 역시도 절로 욕이 나왔다.

‘허무한 결말이군. 좋게 포장하자면 애꿎은 국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빠른 결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만…….’

국왕의 결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긴 어렵다.

그저 기사라는 이름으로 싸우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업을 지닌 칼릭스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결정일 뿐.

도미닉 공작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알펜시아와 카이문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종전을 위한 협의가 오가는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쇠붙이가 아닌 혓바닥을 무기 삼아 싸우는 자들이 활약해야 하는 판이 깔렸으니, 더 이상 최전방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칼릭스는 영지군을 이끌고 자신의 영지로 복귀했다.

다만 마이언가의 소속 중 유일하게 알론드만이, 왕실의 관리들과 합류하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알론드 역시 국왕의 신속한 항복에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감상을 보였지만.

종전에 대해 가장 큰 발언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초인이 협상 테이블에 동석하는 편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이기에, 조국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최소화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영지로 돌아온 칼릭스는 휘하 병력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적당한 포상과 휴가를 내려주었고, 본인 또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휴식에 들어섰다.

‘피곤하군. 협의가 끝나고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진 쉬는 편이 낫겠어.’

그러나 곧 마무리가 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전쟁은 쉬이 끝나지가 않았다.

칼릭스가 휴식기에 접어든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다급히 그를 찾은 닐슨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보고를 전해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입니까?”

“전쟁이 재개되었답니다. 카이문 측에서 협상 자리를 깨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게 무슨?”

세부적인 조건에 대한 논의로 담당자들의 설전이 길게 오가고 있긴 해도, 종전협의 자체는 차근차근 잘 진행되어가고 있다 알고 있었거늘.

뜬금없이 모든 논의가 물거품이 되고 다시 전쟁이 재개된다는 소식에, 칼릭스는 당황한 내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저 망할 것들이 협상을 하는 척 기만을 하면서, 뒤로는 자기들의 군대를 움직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협상 자리를 파하자마자 주둔 중인 저희 왕국군의 본대를 피해, 적들이 서부로 우회하여 병력을 북진시킨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미친…….”

휴전 상태에서 종전을 위한 협의를 논하는 척하며 기습을 준비하다니.

외부에 알려지면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을 행위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법이지 않은가.

‘카이문 왕국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단순히 우리 왕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생결단을 내자는 것처럼 보이질 않나.’

아마도 제국 소속일 가능성이 큰 초인용병의 출현도 그렇고, 국격에 큰 손상을 입을 만한 불명예스러운 행위까지 감수하는 카이문 왕국의 태도까지도.

전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여러모로 괴상한 일들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의문이야 어쨌든, 당장은 벌어진 사태에 대한 대처가 필요했다.

적들이 서부로 우회해서 돌아오려 한다면 아주 당연하게도, 서부에서 남서부까지 이어지는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칼릭스의 영지를 지날 것이다.

병력을 소집하여 이에 대비해야 했다.

“급보입니다! 보르문 시에서 적습에 대해 알려왔습니다!”

“보르문? 벌써 카이문군이 거기까지……?”

그러나 그가 탄탄한 대응책을 갖추기도 전에, 벌써부터 적병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져왔다.

보르문은 마이언가의 영지에서 크게 중요도가 높지 않은 작은 도시였지만, 칼릭스의 영주성이 자리한 대도시와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위치한 장소이기도 했다.

“적들의 군세는 어느 정도인가?”

“확인된 것만 약 삼백여 기가량의 기사단입니다. 그리고…….”

“뭔가? 어서 말하게.”

“그게, 정확하진 않으나…… 기사단에 포함된 마스터가 세 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뭐?”

칼릭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삼백이라는 숫자가 적들의 전체 병력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그게 전부 기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면 엄청난 수치이다.

게다가 마스터가 세 명이라니?

‘그 정도면 카이문 왕국의 남아 있는 마스터가 거의 다 몰려온 수준인데. 설마…… 기사들의 기동력을 통해 그대로 왕성까지 진격할 속셈인 건가?’

적들은 종전협의를 하는 척 행동함으로, 기습에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거기에 알펜시아 왕국군의 본대는 마찬가지로 카이문군의 본대와 맞물려 발이 묶여 있는 상태.

그 상황에 최정예 기사들을 선별하여 마스터들과 함께 보냄으로써, 왕국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을 생각이라면?

말을 타고 성벽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지만, 마스터들이 포함되어 있는 정예기사단이라면 현재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왕성을 함락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도박적인 수이긴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마냥 낮아 보이지도 않았다.

“으음…….”

칼릭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기사단 삼백이라 해도 자신의 영지군으로 막아내려면 큰 피해가 있을 텐데, 무려 마스터가 셋씩이나 포함된 최정예기사들이라니.

자신의 힘으로 저들을 막으려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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