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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95화 (95/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95화

우르르릉.

한 공간에 과도하게 응집된 서로 다른 성질의 오러가 마찰을 일으키며,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초인들의 검이 부딪친다.

전장 안의 또 다른 전장.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의 공간이, 타인의 침범을 배제하는 성역과도 다름없게 변해갔다.

딱히 검초에 휘말리지 않더라도 이미 사방에 몰아치는 오러만으로, 기사들조차 움직이기 힘든 위험지대가 되는 것이다.

평범한 이들은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내장이 진탕되어 피를 토하고 쓰러질 터.

그나마 유일하게 칼릭스만이 오러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며, 두 사람의 전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시할 수 있었다.

막대한 오러가 충돌하며 생기는 반발력으로 주위의 흙먼지가 잔뜩 휘날려, 다른 이들은 이 중요한 순간을 제대로 보기조차 어려웠다.

씨이에엑.

바람을 찢어발기며 움직인 알론드의 검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상대의 급소를 파고들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그랜드 마스터 역시 양손검을 방패처럼 세우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하좌우에서 몰아치는 알론드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 냈다.

부아앙!

그러다 간간이 폭발적인 속도로 상대의 무기가 휘둘러져 넓은 원을 그릴 때면, 알론드는 공세를 멈추고 몸을 빼내 상당한 간격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가볍고 빠른 연격과 느리지만 묵직하고 넓은 범위를 점하는 일격의 싸움인가. 겉보기에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호각의 상대라는 느낌이야. 하지만…….’

칼릭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그랜드 마스터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무상의 경지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미세할지언정 분명히 수준의 차이는 존재한다.

분명 백중지세처럼 보이긴 하지만, 적측의 기사는 지금 손에 맞지 않는 무기를 쓰며 검술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

비록 종이 한 장 차이 정도일 뿐이라도, 본신의 실력은 알론드보다 상대방이 조금 더 우위라고 보는 편이 옳을 터였다.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경계해야 할 텐데. 알론드 님도 그쯤은 생각하고 계시겠지.’

오러로 강화된 육신을 움직여 눈으로도 쫓기 어려운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칼릭스는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칼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적진에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으니 협공을 해서라도 빨리 승기를 가져와야 하는데…… 저 안으로 끼어드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이미 마스터의 틀을 벗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였지만, 초인들의 싸움에 개입하는 것은 칼릭스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칼릭스 또한 작정하고 힘을 쓴다면 한시적으로 그랜드 마스터급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적진 한복판에서 심한 내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면 뒷일은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자칫하면 아무리 뛰어난 무공들을 알고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도박수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의 상황은 알론드 님이 큰 부상을 입지 않는 선에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며 빈틈을 유발하는 정도인가. 그러면 내가 적당히 힘을 끌어다 쓴 상태로 기습을 가하고, 큰 내상을 입지 않은 채 저자를 격퇴하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카이문군에서도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고 다른 마스터들 또한 다가오고 있을 테니,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결국 이쪽이다.

최대한 빠르게 기회를 잡고 전장을 이탈하지 않으면 위험은 점점 커질 것이기에, 칼릭스는 오러를 한껏 운용하며 두 초인이 구축한 영역 속으로 조심스레 접근하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대상에게 몰래 목소리를 전달하는 전음의 수법으로, 알론드에게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의사를 전달할까 생각도 했으나.

괜히 집중력을 흐트러뜨려 방해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에 그만두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칼릭스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최대한 은밀하게 목표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에 따로 대화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수차례 칼릭스와 합을 맞춰본 적이 있던 알론드가,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눈에 이채를 띠며 상대를 향해 더욱 매서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칼릭스에게 난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함.

물론 의문의 그랜드 마스터 역시 제삼자의 접근을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칼릭스의 본 실력을 모르기 때문에 크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얼굴을 가린 투구 속에서 쏟아진 무심한 시선이, 칼릭스를 향해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대단한 마스터조차도 진정한 초인들에 비하면 하수에 불과하니, 약간의 변수를 경계하긴 해도 그다지 주의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방심한 채로 있도록.’

두 사람의 격렬한 전투로 주변이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구덩이가 푹푹 파이는 와중에.

초인들의 기준으로는 거의 한 걸음이나 마찬가지인 거리까지 접근한 칼릭스가, 타이밍을 재며 비밀스러운 급습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쿠웅!

“크으...”

여태껏 적의 위력적인 공격을 피하고 흘려보내는 데만 집중하던 알론드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멈추고자 일부러 정면에서 적의 검초를 받아내었다.

커다란 양손검에 실린 강대한 위력에 자세가 무너진 알론드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의문의 그랜드 마스터는 스산한 살기를 흩뿌리며 그를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칼릭스가 지면을 박차며, 신속한 움직임으로 자신과 적의 사이를 잇는 최적의 선을 그렸다.

사일검법 오의.

후예사일.

기습을 위해서는 순간적인 속도가 빠른 쾌검류가 가장 적합하리란 판단에, 이전 데이먼 하룬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 쓰였던 사일검법의 절초가 펼쳐졌다.

칼릭스의 접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알론드를 공격하려던 기사가, 예상외의 속도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다.

허리와 무릎이 비틀리며 기사가 자신의 무기에 가하던 힘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와 함께 알론드를 비스듬하게 내려찍던 양손검의 검로가 변경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을 동시에 베어내려는 듯 긴 가로 베기의 동작이 이어졌다.

‘그래 봐야 이미 늦었다!’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인상을 찌푸리며 밀려나는 알론드.

알론드를 날려 보내고 그대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양손검을 보며, 칼릭스는 상대의 공격보다 본인의 검이 목표지점에 닿는 것이 더 빠를 것이란 확신을 내렸다.

그러나 적의 대응수법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쩌적.

양손검의 한가운데로 다량의 오러가 밀집되더니, 검날이 깨지며 수백 개로 조각나 비산하는 폭발이 일어났다.

‘이런!?’

근거리에서 쏟아지는 오러가 실린 수백 개의 파편들은, 조금만 반응이 늦어져도 치명적인 부상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칼릭스는 다급히 펼치던 무공을 변경하며, 오러를 한껏 끌어올린 채 자신의 정면으로 검을 휘둘러 수많은 선을 그려냈다.

예민한 감각의 경고와 함께 극도로 발휘된 집중력으로 인해, 칼릭스는 자신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수히 만들어낸 선과 선이 이어지며 별빛이 흘러내리는 듯한 찬란한 검기의 벽이 형성되었다.

검막(劍幕).

오러를 담은 무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어수단이었다.

덮쳐오던 파편들 대부분이 검막에 부딪혀 오러가 상쇄되어 힘을 잃고 떨어지거나, 몸에 닿지 않는 방향으로 튕겨져 애꿎은 대지를 할퀴며 땅속으로 틀어박힌다.

‘망할…….’

방어는 성공적이었으나 칼릭스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상대의 과감한 공격을 자신은 성공적으로 전부 막아냈지만, 알론드의 형편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윽…….”

칼릭스에게 향한 것보단 적은 숫자였으나 묵직한 연격을 막아내며 일순 자세가 무너졌던 알론드는, 가까이에서 터진 폭발에 완벽히 대응해 내지 못했다.

나름대로 검을 휘둘러 파편들을 튕겨내긴 했으나, 오러가 담긴 쇳조각 몇 개가 몸을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다루는 오러는 그 어떤 기운보다도 파괴적이기에, 작은 파편에 담긴 것이라 해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알론드.

그가 입은 상처는 생명이 위태로운 치명상까지는 아니었으나, 당장 전투를 지속하기엔 무리가 있는 부상이었다.

게다가 칼릭스 또한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랜드 마스터를 기습하기 위해 상당한 오러를 소비했는데, 급하게 수비초식을 펼치느라 또다시 힘을 끌어다 써야 했다.

그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오러하트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한 번 정도는 더 공격이 가능할 것도 같지만…….’

칼릭스의 머릿속이 수많은 생각으로 뜨겁게 달궈진다.

의외의 반격에 계획이 헝클어지긴 했으나, 상대는 무기를 잃어 전투능력이 감소한 상황.

다시 한번 공격을 가한다면 상당한 부상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성공적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해도 뒷감당이 문제였다.

그렇게까지 무리를 한다면 자신은 내상을 입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에 빠질 테고, 부상을 입은 알론드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채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야만 한다.

홀몸이었다면 부상 중이라 해도 그랜드 마스터인 알론드가 자리를 피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지만, 움직이기도 힘든 짐짝 하나까지 더해진다면 그 또한 장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무기를 잃었다고 해서 초인이 쉽게 당해줄 리도 없고. 아쉽지만 여기선 물러나는 게 맞겠어.’

마음을 정한 칼릭스는 재빨리 몸을 날려 알론드를 어깨 위로 둘러메고, 곧장 몸을 돌려 아군이 있는 진영을 향해 내달렸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네.”

“더 싸운다고 해봐야 여기서 저자와 공멸하는 게 최선일 뿐이겠지요. 그건 옳은 선택이 아닙니다.”

“끄응…….”

투지를 보이며 저항하려던 알론드가, 칼릭스의 말에 수긍했는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맡겼다.

“어서 돌아가세. 다행히 쫓아오려는 것 같진 않군.”

따가운 시선이 등 뒤에 꽂혔지만 추격하는 기색이 느껴지진 않았다.

분명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는 아닌 것으로 보임에도 위협적인 공격을 가했던 칼릭스를 보며, 상대 역시 쉬이 뒤쫓을 생각을 품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후퇴한다!”

“퇴로를 뚫어라!”

두 사람을 따라왔다가 초인의 등장에 밀려 주변에서 수비진을 펼친 채 대기하고 있던 영지군 기사들이, 칼릭스를 호위하며 다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적진 한복판에서 빠져나가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방해물이 많지는 않았다.

처음 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보인 신위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적극적으로 그들의 앞을 막으려 드는 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

거기에 사기가 오른 알펜시아군이 맹공을 가하며, 전황 자체가 카이문군이 뒤로 밀려나고 있던 차였기에.

마이언가의 기사들은 적진으로 돌진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큰 피해 없이 무사히 아군들의 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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