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92화
전쟁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갔다.
카이문과의 외교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국경지대 인근 도시들의 주민들은 매일같이 두려움에 떠는 생활을 지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전의 여파를 수습하느라 힘들던 시기에, 물가가 미친 듯이 치솟으며 생계는 더욱 궁핍해지기도 했다.
“카이문에 파견되어 있던 요원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그쪽과 저희의 국경 주변으로 주둔 병력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정말 전쟁을 원하는 건가?”
“이미 정황은 확실하오. 욕하고 있을 시간조차도 아까우니, 어서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합시다.”
왕국의 지도층은 전쟁이 벌어질 것을 상정하고,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채 병력과 군수물자를 모아 남부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지난 내전의 피해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군부는 비상이 걸린 채, 모든 인력과 자원을 극한까지 쥐어짜내며 한계에 달하는 운용이 강제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마침내 우려하던 대로, 카이문 왕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이 벌어졌다.
수만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알펜시아 남부로 진격해 들어왔다.
전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침공의 징후를 일찍이 감지했던 알펜시아는, 왕국군 전시 편제를 수정해 남부지역에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나.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는 침략군을 상대로 열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침략군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이유도 있고, 아직은 알펜시아의 귀족들이 전쟁에 모두 참가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남부의 저지선에 연일 뒤로 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카이문 측에서 계속 병력 규모를 충당하고 있는 걸 봐서는, 전쟁이 단기간에 종식되진 않을 모양인데…… 이 정도면 거의 총력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 카이문 왕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 끝장을 보려는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남부전장의 현황에 대해 닐슨의 보고를 듣던 칼릭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가를 매만졌다.
남부에서 전쟁 중인 침략군의 일부가 동부나 서부로 우회하여, 약탈을 시도하거나 왕국중심지로 침투할 가능성도 없지 않기에.
칼릭스는 전쟁 초기부터 사병들을 이끌고 남부지역에 참전하는 대신, 자신의 영지에 머무르며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본국의 사정이 좋지 않다지만, 카이문이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해 몰아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멸망하는 지경까지 가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보통은 도시 한두 개 선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적당히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여 종전 협정을 맺기 마련.
한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적들의 기세가 매우 심상치 않은 것이, 카이문 측에서는 진심으로 알펜시아 왕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정복전을 벌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카이문이 그렇게 군대가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왕국의 규모로 따지면 카이문은 알펜시아와 비슷한 크기를 지닌 중소국가에 해당한다.
다만 기사 전력이나 마스터의 수는 알펜시아보다 카이문이 명백히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나마 마법 전력에서는 이쪽보다 카이문 측이 약간 앞서 있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종합적인 군사력은 알펜시아가 더 우세하다는 뜻.
‘물론 본국의 군사력이 내전 탓에 일시적으로 크게 떨어지긴 했으나, 총력전에 돌입하면 카이문의 군대에 맥없이 밀릴 정도까진 아니거늘.’
모국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왕실대신들 사이에서도, 몇 달간의 전쟁 끝에 남부의 국토 일부를 내어주는 협약까지는 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있었다.
허나 그 이상으로 전쟁이 심화된다면, 결국은 서로 공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카이문 왕실에 미친 전쟁광들만 모여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사실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인데.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리 저돌적인 공세를 펼치는 건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전쟁이 길어진다면 나 역시 영지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겠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릭스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출정 지시를 내렸다.
“영지의 병력들에게 출진 준비를 시키십시오.”
“전원 말입니까?”
“흠. 아카데미의 생도들과 그들을 통제할 하급교관 일부는 남겨야겠지요. 병사들 중에도 훈련이 덜 된 신참들은 제외해야 할 테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최소한의 수비 병력은 있어야 할 테니…….”
“대략 삼 분의 일 정도는 남게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병력을 편성해 보고하도록 하겠습니-”
“허!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싶더니, 그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인가?”
“으음?”
“이런, 누구냐!”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감히 누가 영주의 집무실에 난입해 중요한 대화를 방해하는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며 문가를 바라본 두 사람은, 이윽고 묘한 표정이 되어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낯설어 보이는 외견임에도 또 잘 보면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불청객의 모습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이 과연 맞는 것인지 다른 사람의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분 혹시……?”
“어, 음…… 맞는 것 같군요.”
“저, 정말 알론드 님이십니까?”
한동안 폐관수련에 들어서느라 마주하지 못했던 칼릭스 세력의 중요인물.
알론드 프리즈먼이 웃음기를 띠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오래간만이라고는 해도 고작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두 사람이 알론드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일흔에 달하는 알론드의 외모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쉰이 넘지 않는 중년처럼 보였기 때문.
“하하…… 정말, 정말로 성공하셨군요.”
“다 자네 덕분일세. 허헛!”
미소를 짓는 알론드를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칼릭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결국 이루어내셨구나. 육체의 노화마저 거슬러 오르는 초인의 경지를.’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알론드의 외형은, 젊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평범해 보였다.
오러를 수련한 기사 특유의 강렬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길거리의 흔한 일반인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더욱 비범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마스터를 능가하는 칼릭스의 기감으로도 그의 수준이 전혀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염원을 달성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네만, 일단은 나중으로 미뤄야겠구먼.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카이문 왕국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카이문이라. 이웃의 약한 모습에 흉계를 품고 이빨을 드러내는 건가. 치졸한 놈들 같으니……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구먼그래.”
알론드의 말에 칼릭스는 씩 웃음을 지었다.
전쟁에 대한 고민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카이문 왕국. 좋은 기회라 여기고 크게 일을 벌인 듯한데, 운이 더럽게도 없게 되었군.’
무려 그랜드 마스터의 참전이다.
이보다 더 든든한 아군이 어디 있을까.
벌써부터 두려움에 떨며 놀라 자빠질 침략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양국의 전력은 비등비등한 수준. 하지만 카이문에는 초인이 없다.’
그랜드 마스터는 같은 그랜드 마스터나 대마도사급의 전력이 아니고서야, 상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카이문 측의 마스터들이 전부 달려들고 마법 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야, 그나마 승산을 계산해 보기라도 할 수 있을 터.
사실상 알펜시아의 전력이 두 배 정도로 불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승리를 자신하며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곧이어 출정 준비를 마친 마이언가의 병력들과 함께,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인간병기가 남부로 향했다.
* * *
“더러운 침략자들을 응징하라!”
“죽여! 저 개X끼들!”
“으아아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욕설과 고함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진다.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넘긴 남부군 사령관 제로스 지안은, 피로에 찌든 눈으로 적들과 충돌하는 아군 병사들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명령을 내리느라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선유지도 거의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병력이든 물자든 다른 눈에 띄는 지원이 더 없다면, 남부군은 며칠 내로 이곳을 버리고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우리가 적들의 진형 중앙을 찔러 그대로 지휘부가 있는 곳까지 파고들 테니, 병력을 움직여 뒤를 받쳐줄 수 있도록 해주시오.”
덤덤한 태도로 말하는 눈앞의 젊은 후작을 바라보며, 제로스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표출되지 않도록 억누르느라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칼릭스 마이언.
반역도들을 격퇴하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영웅이자, 왕국 최강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천재 기사.
분명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그런지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심히 당혹스럽다.
아무리 대인전에서 무적에 가까운 마스터라 할지라도, 만 단위의 군세를 소수의 병력으로 돌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마스터 둘에 기사들 수십. 물론 상당한 전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카이문 왕국에도 아군의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마스터급의 기사가 존재하고, 온갖 마법으로 마스터의 활약을 억제하는 마법병단이 포진되어 있다.
상대의 진형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이들만으로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지휘사령부까지 파고든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무리한 작전입니다. 후작 각하의 기사단이 전원 마스터로 이루어져 있거나, 말로만 듣던 그랜드 마스터가 끼어 있다면 모를까. 그런 도박적인 전술을 펼치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그럼 말로만 듣지 말고, 이참에 눈으로 보면 되겠군.”
“예? 무슨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말을 뱉으며 피식하고 웃음을 보이는 칼릭스의 모습에, 사령관 제로스는 이마를 긁적거리며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론드 프리즈먼.
왕국의 최고령 마스터가 그와 눈을 마주친다.
‘저분은 한 십 년쯤 전인가 잠시 뵌 적이 있었지. 그런데 어째……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진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게다가 마스터가 아니라 무슨 노학자처럼 유약해 보이는 느낌인데.’
이맛살을 찌푸린 제로스는 잡티 하나 없어 보이는 알론드의 피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노귀족들은 젊음을 그리워하며, 그간 모은 재산으로 온갖 비싸고 진귀한 약들을 얼굴에 처바르며 지낸다.
그 대단한 마스터도 결국은 사람인지라, 나이가 많아지니 다른 귀족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단련된 기사 특유의 강인함도 느껴지지 않는군. 내전 이후로 완전히 검을 손에서 놓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마스터이니 충분한 전력이 되기야 하겠다만…… 소문과 달리 실망스럽군.’
패기만 넘치고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 젊은 마스터와, 전혀 기사처럼 보이지 않는 고령의 마스터.
왕국이 지닌 무력의 최고봉에 도달해 있는 이들의 모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 제로스는 지원군으로 받아들인 두 사람과의 전술논의에서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