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87화
왕위다툼
전쟁은 끝났다.
반란군의 주축이 되었던 하룬빌가는 철저하게 분쇄되었고, 적들을 이끌던 고위층들이 사라지자 서부 군단의 잔당들은 저항 의지를 잃어버렸다.
“하룬빌과 흑마법사들의 관계를 조사해 보니, 그들이 왕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면. 왕국 내 흑마법사들의 활동을 정식으로 공인해주고, 예산을 할당해 장기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었다더군요.”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구먼. 그렇지 않아도 배척받는 흑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범죄조직을 공인하겠다니. 타국들과의 외교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원.”
“뭐 결국 이제는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만.”
범죄결사 원 아이드 캣의 흑마법사들은, 패색이 짙어지자 어느 순간 서부군을 버리고 모습을 감추었다.
범대륙적으로 활동하는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알펜시아의 내전을 주도하며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거래대상이던 하룬빌가가 멸문하고 반란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괜히 더 손해를 볼 바에야 발을 빼고 숨어드는 것이 당연했다.
“아, 그렇지. 이건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자네에게 보고되지 않았을 것이네만…….”
“음? 제가 뭔가 또 알아야 될 게 있습니까?”
함께 전쟁의 사후처리에 대해 토의하고 있던 칼릭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의미심장한 태도를 취하는 알론드의 모습에 얼굴 가득 의문을 드러냈다.
“데이먼 하룬빌이 제국과 접촉하고 있던 듯한 정황이 있었다네.”
“……팔론시아?”
“그래.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네만, 어쩌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것도 제국과 어떤 커넥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변방의 중소국가에 불과한 알펜시아의 일에 제국에서 관심을 두었단 말입니까?”
대륙 전역을 통틀어 강대국으로 평가되는 나라는 여럿 존재하지만, 제국의 명칭을 쓰는 곳이 오직 한 군데뿐이다.
팔론시아 제국.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국가이자, 대를 이어 꾸준히 그랜드 마스터를 배출해내는 황제가문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곳.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한 명 보유할까 말까 하는 그랜드 마스터를, 어떤 시대이건 평균 잡아 세 명씩은 거느리고 있었으니.
제국이 지닌 무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락이 오고 간 정황은 있네만, 자세한 내용 자체는 남아 있지 않아서 뭐라 속단할 순 없네. 어쩌면 데이먼 하룬빌이 일이 잘못되었을 때, 제국으로 망명하려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
있을 법한 이야기에 칼릭스는 당황을 가라앉혔다.
‘확실히 반란이 실패했음을 알고도 삶을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지. 마스터라면 그 대단한 제국이라 해도 고위귀족의 대우는 해줄 테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추측이긴 해.’
물론 단순한 망명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무언가 더욱 긴밀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알펜시아를 하룬빌 가문이 집어삼키고 나면,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제국의 비호를 받기로 했다던가.
일왕자와의 일로 왕가 자체에 큰 적의를 품게 된 데이먼이라면, 알펜시아가 망가지게 두고 자신의 가문은 제국의 귀족가로 거듭나게 되는 거래를 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겠지. 혹시나 무언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해도, 일이 크게 틀어졌으니 제국에서 더는 관심을 두진 않을 테고.’
칼릭스는 제국이 이번 일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최악을 가정한다고 해도 내전으로 인해 큰 피해가 생긴 지금 어떠한 대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멀쩡했을 때의 국력으로도 제국과 대적한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빈 옥좌는 다음 후계서열대로 이왕자가 차지하게 되는 것 같더군. 병중이신 국왕폐하께서 일어나신다고 해도 다른 후계자를 지목할 리는 없을 테니, 그게 순리에 맞긴 하겠지.”
“예상한 대로군요.”
“이왕자 측의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대리청정하려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던데. 우리 쪽에도 국정을 도와줄 수 없겠냐고 제안이 들어왔네만, 만나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는가?”
“아니요. 지금은 저희 쪽의 일을 처리하기도 벅찹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당분간은 좀 쉬고 싶군요.”
격렬한 내전으로 인해 국력에 어마어마한 공백이 생겼으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좌에 오른 이가 감당하기는 쉽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왕자 측은 국가의 주요인사들, 특히나 왕국군을 승리로 이끈 칼릭스와 두터운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치판에 관심이 없던 칼릭스는 이전부터 그랬듯이, 새로 부상하게 된 권력자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기로 했다.
어차피 데이먼과의 전투로 무리를 한 탓에 내상을 입은 몸이라, 당장은 다른 일들보다 영지에서 조용히 요양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전처럼 오러를 다루기도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무리를 했다간 또다시 오러하트가 망가지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래. 큰일을 해냈는데 쉬어야지. 그럼 외부에서 들어오는 잡다한 일들은 닐슨 영주대리와 내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겠네.”
겉으로는 대등한 관계라지만 나날이 커져가는 칼릭스의 모습에 탄복한 알론드는, 사실상 가신에 가까운 입장을 고수하며 그를 보좌하기 위해 귀찮은 일들을 해결해주겠노라 말했다.
칼릭스는 그런 알론드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영지로 돌아가 내상을 다스리기 위한 칩거에 들어섰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냥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하룬빌가가 멸문하며 알펜시아를 양분하던 기사가문의 명성은, 이제 이플리트 가문 하나가 온전히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문의 명성은 아직 부족할지언정 개인으로서의 위상은, 왕국 내에서 더 이상 칼릭스를 따라올 자가 없는 수준.
하룬빌가의 영토에 대한 권리 대부분은 왕가의 인정을 받아 칼릭스에게 이양되었고, 마이언가에 내려졌던 귀족위계는 후작으로 승격이 되었다.
부랴부랴 새로 채워지게 된 서부의 군단들은, 이전 하룬빌가에 그랬듯이 칼릭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마이언 가문은 명실 공히 서부지역을 지배하는 강대한 토호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요양을 위해 쉬겠다고 공언한 후임에도, 칼릭스에게 줄을 대보고자 찾아오는 이들로 인해 영지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닐슨 선배를 영입하길 정말 잘했군. 대리인이 없었다면 상당히 귀찮았을 텐데 말이지.’
개인적으로는 번거로움을 덜어낸 것이기는 해도, 사실 왕국의 실세 중 하나가 된 칼릭스를 대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권한인지 본인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칼릭스는 닐슨의 성품을 신뢰했기에, 그가 권력에 취해 사고를 치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닐슨도 사람이니 자기 욕심에 흔들리지 않을 순 없겠지만, 까짓 지저분한 것들에 좀 물들면 뭐 어떻겠나.
지닌바 능력이 중임을 맡기에는 조금 부족할지언정 닐슨은 누가 뭐래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 칼릭스가 구렁텅이에 빠져 죽지 않도록 손을 잡아준 은인인 것을.
그가 기사로서 간과할 수 없는 배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는 사리사욕을 채우려 든다 해도 손대지 않고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알론드 님도 같이 계셔주시니, 정도를 벗어날 만큼 큰일을 벌일 리도 없을 테고.’
왕국의 기둥 중 하나가 된 자신의 위치로 인해 신경 쓸 일이 많아졌지만, 그렇게 주변인들에게 번잡한 일 처리들을 맡기고 칼릭스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던 어느 때였다.
“영주님. 쉬시는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왕실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이 아닌 듯하여…….”
“그래요. 제가 만나보도록 하죠.”
일이 바쁜 탓에 피로에 물든 닐슨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칼릭스는 내상을 회복하기 위핸 은거를 잠시 깨고 왕실의 인사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게 된 왕실 측의 사람에게서,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긴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자면 내용은 이랬다.
“……그러니까 내 가문의 기사인 시엘라 경의 신병을 왕실에 넘기라는 말이오?”
“후작 각하. 불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해 주십시오. 그녀는 반역을 저지른 하룬빌 가문의 인물입니다.”
“아니. 출신은 그렇다 해도 그녀는 나 칼릭스의 기사이며, 전쟁 당시에도 내 휘하에서 적들을 섬멸하며 전공을 세웠소. 그런데 이제 와서 역도들과 같이 묶어 죄인으로 취급하겠다고?”
시엘라를 포함해 칼릭스의 제자들은, 그와 함께 전장을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전투를 함께 치렀었다.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칼릭스가 많이 신경 써줄 수가 없었고, 대규모의 전쟁이라 익스퍼트급의 수준으로 눈에 띄는 큰 공적을 세우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작게나마 전공을 쌓은 인물에게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묻는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였다.
“아, 아닙니다. 시엘라 경을 죄인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유일하게 남은 하룬빌의 이름에 우려의 시선들이 있으니, 왕실에서 가까이 두고 주의 깊게 살피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감시의 역할이라면 나 칼릭스 마이언의 책임 하에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일이오.”
“크흠. 후작 각하. 이 일은 현재 왕위승계를 준비 중이신 이왕자 전하께서 주도하신 일이기에, 모쪼록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면서 할 말은 꼬박꼬박 해대는 왕실관리를 앞에 두고, 칼릭스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실에서 반역자 가문의 일원을 관리하겠다는 요구가 타당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게 과연 굳이 내 심기를 건드려가면서까지 이왕자가 직접 신경 쓸 만한 일인가?’
시엘라가 마이언가의 기사일 뿐 아니라 칼릭스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라는 것을, 왕실에서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아직 기초적인 심법이론을 가르쳤을 뿐 본격적인 무공 전수까진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겉으로 알려진 가문 내 그녀의 위치는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군. 그리고 그 내용이 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시엘라 하룬빌은 하룬빌 출신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하룬빌이 아니다.
칼릭스는 데이먼과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그녀의 진짜 핏줄이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었다.
‘시엘라의 친부는 일왕자였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녀의 진정한 신분은 왕가의 일원이었던 거지.’
왕세자였던 일왕자가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면, 시엘라의 신분은 왕녀가 된다.
그 사실을 실제로 인정받긴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내 제자가 알고 보니 왕녀였다니 조금 충격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따지면 시엘라의 후계서열은 이왕자와 대등한 수준이니…….’
국왕이 병으로 쓰러진 탓에 공식적인 후계서열에 따라 대리청정하고 있을 뿐, 이왕자는 정상적으로 왕권을 이양받지는 못한 상태이다.
반면 왕세자라는 정통성을 지닌 일왕자의 직계혈통이라면, 이왕자와 마찬가지로 승계 권한에 대해 언급하기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그리고 데이먼이 복수를 위해 일왕자의 거처에 들어서며, 성내에 있던 자들을 깡그리 죽여 버린 탓에.
일왕자의 자식 중 남아 있는 인물은 오직 시엘라가 유일했다.
이왕자와는 다른 문제로 정통성을 인정받기는 어렵겠지만, 자신의 신분을 공론화하며 억지로 우기려 든다면 왕위승계에 어깃장을 놓을 정도는 될 것이다.
게다가 마침 그녀의 뒷배라 할 수 있는 칼릭스가, 왕국의 새로운 실세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상황이기까지 하니.
‘왕가에서 시엘라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리도 없겠지. 결국 이왕자가 직접 나선 것은 정적의 가능성이 있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가. 후우, 이것 참.’
기나긴 사고 끝에 옅은 한숨을 내쉰 칼릭스가, 왕실의 관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아무래도 내 직접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군.”
“엇, 예에?”
사정은 알겠지만, 아니…… 몰랐다고 해도 자신의 제자를 정치적인 문제로 내칠 마음은 없다.
그리고 지금의 칼릭스라면 상대가 설령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 해도, 어느 정도는 배짱을 부려볼 수준이 되는 위치였다.
당황해하는 관리를 뒤로하고, 칼릭스는 영주관에 비치된 통신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