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85화
“어, 어찌? 네놈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발작하듯 몸을 떨며 외치는 테슬리의 모습에, 주변을 돌아보던 칼릭스가 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세 사람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었던 테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분명 칼릭스 일행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가사상태에 빠지게 되어야 정상이었다.
‘소환의식이 실패한 건가? 병신 같은 흑마법사놈들! 전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니 뭐니 그리 잘난 척 떠들더니만!’
그랜드 마스터조차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함정이라 자신하더니,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은 테슬리는 다급히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심상세계에서의 전투로 인해 정신적으로 조금 지쳤다 한들, 적의 도주를 가만히 보고 있을 칼릭스가 아니었다.
카앙!
“어딜 도망가시나?”
“으윽.”
연이어 날아드는 검격을 막아내며 테슬리는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눈을 굴렸으나, 칼릭스가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공격을 가해왔기에 달아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악마는…… 설마 칼릭스 공이 처치한 건가?”
“으음. 정황상 그런 듯하구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전투부터 지원하도록 합시다.”
이어서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심력을 회복한 다른 두 마스터가 가세하며, 테슬리가 도망칠 기회는 완전히 봉쇄되고야 말았다.
푸욱.
“커억!”
옆구리에 깊숙하게 검이 박힌 테슬리가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날카로운 검격이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머리를 날릴 정도로 깊이 파고든 일격은 아니었으나, 치명상이라 말하기엔 충분했다.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친 테슬리가 손바닥으로 상처를 눌렀지만, 벌어진 피부 사이로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피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륵, 이럴 순…….”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쏘아보던 테슬리는, 이윽고 비틀거림을 멈추고 쓰러지며 스스로의 피로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끝났군.’
죽어가는 테슬리를 내려다보던 칼릭스는, 문득 묘한 상실감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절정의 경지를 이룬 고수들의 무위를 완벽하게 직접 펼치고 있었는데, 현실로 돌아와 원래의 수준에 맞게 몸을 움직이려니 어쩐지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만 체험해 보던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를 잠시나마 온전하게 실감했더니, 마스터의 수준은 그냥 하찮게만 느껴지는구나.’
억 단위의 인구수를 지닌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마스터급의 실력자는 겨우 몇백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한 줌에 불과한 강자들 안에서도 또다시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진정한 초인이라 할 수 있는 그랜드 마스터의 위용을 직접 체감해보니.
칼릭스는 자신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이번의 경험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극심한 내상을 각오해야 흉내 낼 수 있는 기억 속 무인들의 전력 발휘를, 아무런 페널티 없이 체험할 수 있었으니.’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로 향하는 길이 조금 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니, 상당히 값진 경험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칼릭스 공? 가만히 서서 뭐 하는가?”
“적의 핵심전력을 제거했으니 어서 전장을 정리하도록 하세.”
“으음. 알겠습니다.”
두 마스터들의 채근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칼릭스는, 이윽고 그들과 함께 남아 있는 몬스터 및 적병들을 처리하며 신속하게 전쟁을 지배해 갔다.
그렇게 수도로 진격하던 적들의 군세는 결국, 칼릭스와 알론드의 참전으로 전력을 보강한 왕국군의 반격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후우, 전부 끝난 건가?”
“마법사들이 파악한 적들의 본대는 여기가 확실했으니, 일단 전쟁은 승리했다고 봐야겠구려. 타 지역에 남아 있는 잔당들이야 있겠지만, 그건 얼마 되지 않는 세력들이니…….”
“그래도 승리를 축하하기는 이른 것 같군요. 아직 적의 수괴를 발견하지 못했잖습니까.”
심령을 지배당한 서부군과 몬스터들 그리고 테슬리를 비롯한 하룬빌가의 여러 기사들을 베었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데이먼 하룬빌의 모습은 전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를 일으켜 놓고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놈의 입장에서도 이번이 승부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전투였을 터인데.”
그들의 의문에 대한 답은 왕국군이 적을 궤멸시키고, 전후 처리를 하며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밝혀졌다.
수도와 가까운 후방에 따로 피신해 있던 최우선 왕위계승자인 일왕자가, 암습을 받아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이다.
암살자의 정체는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에 잠입해온 데이먼 하룬빌이었다.
“대체 무슨…….”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왕국군의 수뇌부들은 황당한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왕자의 죽음이 충격이기는 했지만, 도대체 그런 짓에 무슨 전략적인 가치가 있단 말인가.
후계자가 죽었다고 해서 반역도인 하룬빌 가문이 왕실을 지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으려 했다면 데이먼 역시 이번의 거대한 회전에 합세해, 도미닉을 비롯한 왕국군의 구심점들을 제거했어야 옳다.
한데 몬스터 군단을 포함한 서부군의 세력이 다 패퇴된 마당에, 이제 와서 일왕자를 암살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왕국군에 큰 힘을 보태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된 칼릭스 역시, 전해져 온 소식에 의문을 가득 떠올리며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일왕자가 죽어도 어차피 다음 후계서열의 계승자들이 있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이라면 또 모를까,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자리를 비우고 암살을 실행하다니?’
어쩌면 악마를 통해 왕국의 마스터들을 제거할 계획을 확신하고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한 인물이 전장에서 생길 변수들을 생각지 못하고 이런 허술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데이먼 후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작은 무슨. 그 반역자는 암살에는 성공했지만,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힌 상태라더군.”
“……마스터가 말입니까?”
“치욕스럽게도 경호에는 실패했지만, 근위기사들과 궁정마법사들이 놈을 포위해서 가두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일세. 완전히 제압한 것은 아니지만, 성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둔 모양이야.”
“마법사들이 대비를 해둔 공간은 마스터라 해도 돌파하기 쉽지가 않겠지. 물론 처음부터 잘 막았다면 암살조차 성공할 수 없었을 테니, 칭찬할 일은 아니긴 하네만.”
“데이먼 그자 역시 흑마법사들의 힘을 빌렸을 테니, 마냥 근위대를 무능하다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바로 그쪽으로 넘어가 봐야겠습니다.”
완전히 제압한 게 아니라 마법적인 조치를 통해 가둬두기만 한 상태라면,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니 서둘러 적합한 무력수단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공작 각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알아봐 주겠네.”
도시 간의 왕래는 가깝다 해도 일반적으로 말을 타고 며칠은 가야 하는 거리이기에, 평범한 이동수단으로는 수도까지 가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곳 주둔지에는 큰 전투가 있던 직후이니만큼, 종군 중이던 고위마법사들이 적잖이 모여 있었기에.
칼릭스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곧장 수도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다만 작은 문제가 있기는 했다.
“죄송하지만 다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하고 준비가 미흡하기에, 여기서 페트라온까지 단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인원은 딱 한 분뿐입니다.”
공간이동이 가능한 것은 한 명뿐이라는 말에, 칼릭스는 다른 두 마스터들을 보며 본인이 움직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알론드 님은 여기 남아서 공작 각하를 보좌해 주십시오. 데이먼 그자의 처리는 제가 맡겠습니다.”
“괜찮겠는가? 자네의 실력은 인정하네만, 반역도들이 또 무슨 흉계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데…….”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같이 육로로 이동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자칫하면 기껏 잡아놓고 있는 적의 수괴가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 위험하다고 며칠씩이나 지체할 수는 없는 상황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알론드와 도미닉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혹시나 데이먼 역시 테슬리처럼 악마를 부르는 마도구를 지녔을지도 모르니, 누군가 가야 한다면 칼릭스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이 중에서 악마를 격퇴하는 데에 성공한 것은 칼릭스가 유일했으니.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악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심상세계에서의 경험을 또 느껴보고 싶으니 말이지.’
무인들의 기억을 활용하면 심상세계에서 만큼은 자신이 무적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칼릭스는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신형이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장소를 향해 도약했다.
* * *
암살이 벌어진 성 주변을 빼곡하게 포위한 근위대에게 신분을 확인받은 다음.
한번 마법을 캔슬하면 다시 결계를 재가동할 수 없다는 마법사들의 우려를 차가운 눈빛으로 잠재운 뒤, 칼릭스는 그들이 열어준 진입로를 통해 성안에 들어서서 시체 더미 위에 앉아 있는 데이먼과 대면했다.
“칼릭스 마이언. 네 녀석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먼 후작.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시오. 전쟁은 끝났소.”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내 부하들의 도움을 받기는 어렵게 된 모양이군.”
“서부군과 몬스터 군단의 침공은 이미 진압되었소.”
“쯧. 흑마법사 놈들의 꼬임에 넘어가 손을 잡은 게 잘못이었나. 그렇게 오랜 준비를 했음에도 결국 이 정도에서 끝나게 되다니.”
피에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조하는 데이먼의 모습에, 칼릭스는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지? 설령 반란이 성공했다고 해도, 하룬빌 가문이 왕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일진대?”
흑마법사들이 주축이 된 범죄단체와 손을 잡고 반역을 저지른 하룬빌 가문이 국가의 수장이 되어봤자, 주변국들에서 정통성을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왕실의 후계자들 중 하나를 끌어들여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섭정가문으로 활동하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전으로 인해 국력이 반 토막이 난 왕국의 섭정자리에,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오르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
‘서부군은 물론이거니와 왕국의 여러 군단들과 대도시들이, 내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알펜시아 왕국은 이제 향후 수십 년간, 피해를 복구하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하겠지.’
이미 이플리트 가문과 함께 알펜시아의 귀족세력을 양분하고 있던 하룬빌 가문이, 명예를 바닥에 처박으면서 실리조차도 그다지 챙기기 어려운 행동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미친 짓처럼 보였겠지. 하나 내겐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칼릭스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데이먼이, 쓴웃음이 떠올라 있던 표정을 지우며 자신의 속에 든 이야기들을 천천히 내뱉었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복수겠지. 내 짓밟힌 자존심에 대한 복수.”
이미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는 비밀을 발설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