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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77화 (77/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7화

칼릭스의 장력에 내부의 장기들이 심각하게 망가진 흑마법사는,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뻐금거리다가 곧 피거품을 물고 절명했다.

마스터의 수준에서도 부담스러운 고강한 절기를 연이어 펼친 칼릭스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내력에 탈진감을 느끼고 휘청거리다가 결국 바닥을 짚고 주저앉았다.

‘후우, 이대로 누워서 쉬고 싶군.’

잠시 숨을 고른 칼릭스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육신을 억지로 일으키고, 아까 집어던진 검을 회수하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몬스터들이 남아 있으니 알론드를 도와 그것들을 싹 처리해야만 했다.

그나마 흑마법사가 죽으며 그가 해놓은 마법적인 조치들이 사라졌는지, 주변을 채우고 있던 안개들은 옅어져 가고 있었고.

주인 잃은 영체들이 지배력을 상실하고 흩어진 탓에, 강화되어 날뛰던 몬스터들은 역으로 부작용에 시달리는지 자연적인 상태일 때보다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정도는 부상당한 알론드와 기력이 바닥난 칼릭스라 해도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기에, 이내 지하 동공에 서 있는 생물체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칼릭스 공. 자네 괜찮은 건가?”

“멀쩡합니다. 알론드 님이야말로 다치신 곳은 무사하신 겁니까?”

“난 문제 없다네. 어깨가 약간 맛이 가긴 했네만, 이 정도야 약 좀 바르면 금방 낫는 상처 아닌가.”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은 일반인 기준으로는 최소 몇 달을 요양해야 하고, 상태가 좋지 않으면 영영 불구가 될 수도 있는 큰일이지만.

마스터급 강자들의 오러는 육체의 회복력에도 강한 영향을 끼치기에, 과장을 좀 보태면 그 정도는 찰과상과 비슷하게 치부할 수 있다.

알론드가 말한 약이 평민들은 구경도 하기 어려운 상등품의 치유포션이니, 더더욱 회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잠깐 쉬도록 하세. 자네도 겉보기처럼 속이 멀쩡하진 않을 것 같은데.”

“네. 조금만 더 무리했으면 또 내상을 입을 뻔했습니다.”

근처에 더는 적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에 잠시 휴식의 시간이 이어졌다.

알론드는 어깨에 포션을 뿌리며 부상을 돌봤고, 칼릭스도 심법을 운용하며 바닥난 오러를 회복시키는 것에 전념했다.

잠시 뒤, 몸을 추스른 두 사람은 지하 내부를 돌아보며 조사를 시작했다.

“몬스터들을 가지고 여러 실험을 했던 것 같군요.”

“능력만 놓고 보면 대단하긴 하더구먼. 몬스터를 지배하는 것뿐 아니라 강화까지 한다니. 잘 써먹을 수만 있다면 서부군 편제를 대규모로 감축할 수도 있을 텐데.”

“몬스터를 몬스터로 막을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겠군요. 흑마법사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양지로 끌어올리려면, 국제외교에서 문제가 크게 불거지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하긴 그도 그렇구먼.”

내부의 탐색 자체는 딱히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흑마법과 관련된 분야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도 않았으니, 손댈 만한 일이 별로 없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수련행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끝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겠구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왕실에 보고해 조사대를 파견하도록 해야겠지. 이자들이 단순히 연구만을 위해 이곳에 있었으리란 보장도 없고…….”

“예. 힘이 있으면 쓰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지요. 흑마법사들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국가전복 같은 계획을 논하던 정신병자들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허허! 그건 너무 많이 나간 것 아닌가. 그래도 다짜고짜 공격해 오던 것을 보아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불순한 무리임은 확실하겠네만.”

알론드는 농담이라 여겼는지 웃어넘겼지만, 칼릭스는 자신의 상상이 과한 걱정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전력이 대수림을 빠져나와 도시를 침략하려고 했다면, 과연 서부의 군단들이 막아낼 수 있었을까?’

그야 막기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토벌경험이 부족했던 7군단 같은 경우는 오크 무리를 상대로도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긴 했었지만, 그래도 군단은 군단이기에 수비에만 전념한다면 허망하게 뚫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못 해도 수백에 달하는 병력들의 인명피해가 발생할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것도 우리가 처리한 몬스터들만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의 일이지. 혹시 대수림 내에 이런 장소가 몇 군데 더 숨겨져 있는 것이라면…….’

강화된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앞세우고, 아까 본 흑마법사 같은 자들이 몇 사람 더 뒤에서 지원을 해준다면.

정말로 나라가 뒤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알론드 님. 이번 일에 대해 왕실에 전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알론드 님께서 직접 관여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말인가?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긴 하네만…… 어차피 일은 마법사가 포함된 조사대에서 전부 하게 될 터인데?”

“마냥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사들이 연관되어 있던 것도 뭔가 수상하고, 실사 과정에서 생기는 정보들을 왜곡 없이 전해줄 저희 쪽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할 듯싶습니다.”

“흐음. 확실히 아까 그 기사들은 마음에 걸리긴 하는구먼. 어쩌면 이 일이 서부군의, 나아가서 하룬빌 가문의 비리가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겐가?”

“예. 저희 영지와도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이니만큼, 신경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칼릭스의 말에 알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사건을 보고하고 조사대를 요청하는 정도는 서신으로도 충분하지만, 실사에 관여해 영향력을 끼치려면 칼릭스나 알론드 둘 중 하나는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력이 아닌 다른 방식의 일 처리에 대한 수완은, 아무래도 칼릭스보다는 동원할 인맥과 경험이 많은 알론드 쪽이 더 낫기도 했다.

영지로 돌아오는 내내, 칼릭스는 흑마법사들과 하룬빌가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대수림에 숨어 있던 흑마법사들과 그들이 다루는 몬스터로 이루어진 병력.

대수림과 국토의 경계를 지키는 서부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아 보이던 하룬빌 가문.

두 집단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어야 정상이지만, 만약 실제로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서부군 전체를 손에 쥐고 주무르는 하룬빌가라면, 흑마법사들이 대수림에 자리를 잡고 몬스터들을 끌어모을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것도 가능하겠지. 물론, 이건 전부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비밀스럽게 키운 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알론드의 말대로 너무 과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칼릭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거운 주제의 상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 * *

-섹터 한 곳이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소. 아직은 메울 수 있는 손실이지만, 이런 일이 또 발생해서는 곤란하오.

“우리 측에서 더 신경 쓰도록 하지.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정리해 두겠네.”

-말로만 잘하겠다고 해선 안 될 것이오. 우리야 일이 잘못되어도 다른 곳에서 기회를 노리면 그만이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여유로운 입장이 아닐 텐데.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건가?”

-흐흣. 열 내지 말고 그냥 파트너의 충고라고 생각해 두시오. 어쨌거나 또 다른 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으니, 계획을 좀 더 앞당기도록 하겠소.

“잠깐, 섣불리 움직였다가 조금이라도 증거가 남는다면-”

-이제 와서 당신들이 주저할 입장은 아닐 텐데. 아무튼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 연락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룬빌가의 가주 데이먼은 빛이 사라진 통신마법구를 보며, 이내 상대가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쾅!

“염병할! 이놈이나 저놈이나…….”

화가 난 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충격을 버티지 못한 상판이 산산이 박살 나며 통신마법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칼릭스, 칼릭스 마이언! 정말이지 성가신 놈이군.”

화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며 데이먼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새로운 마스터의 출현을 알게 되고 신경을 기울이긴 했었지만, 설마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가문의 일에 깊게 엮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시엘라 그년의 무재를 알아본다면, 곧바로 제자로 삼아 교육에 전념할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몇 주도 되지 않아 다시 대수림에 들어갈 줄이야.’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기껏 준비했던 수단이었거늘.

정말이지 쌍으로 꼴도 보기 싫고 방해만 되는 연놈들이다.

‘대수림에 들어간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도대체 어떻게 숨겨진 시설을 발견한 거지? 결계마법 분야에 능통한 학파의 수장 정도가 아니면, 위치를 찾아내긴 고사하고 숨겨졌다는 사실조차 알아보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던가.’

마법사 없이 마스터 두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파티였다는데, 무슨 수로 결계를 뚫고 들어간 건지 의문이었다.

‘흐…… 그래, 뭐 좋다. 어차피 지나간 일일 뿐이니,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지. 거사의 진행을 앞당기겠다고 했지?’

자신과 가문의 숙원이 섞인 계획을 이룰 수만 있다면, 자잘한 일 따위는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칼릭스 마이언과 알론드 프리즈먼?

분명 커다란 변수이긴 하지만 지금부터 끼어든다고 해봐야, 그들이 자신들의 대계에 대해 과연 어디까지 파헤칠 수 있을까.

‘앞으로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 곧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될 것이야. 그때가 오면…….’

데이먼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윽고 연초를 태우기 위해 붙인 성냥의 불꽃이,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와 함께 아른거렸다.

* * *

영지로 돌아온 칼릭스는 어그러진 일정으로 인해 생긴 시간을, 간만에 제자들의 교육에 몰두하는 것으로 소모했다.

대수림을 오가는 일에 신경 쓰느라 몇 달 동안 관심을 주지 못했던 그의 제자들은, 그동안 게으름피지 않고 열심히 수련을 했는지 눈에 띄게 진보를 이룬 상태였다.

“초식의 형은 이제 완전히 숙달되었군. 나름대로 응용과 변초를 가미하는 법도 깨우치는 중인 것 같고.”

“넷!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스승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재능의 차이는 있긴 해도 누구 하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제각기 성취를 이루었기에.

칼릭스는 흡족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이전에는 전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무공초식들을 가르쳐 주었다.

매화검법의 전반부 초식을 막힘없이 능숙하게 펼칠 수 있게 된 아즐린에게는, 후반부의 초식 일부분을 전수해 주었고.

나머지 제자들 역시 각각의 수준에 맞게, 익힌 무공의 심화 초식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풀어서 가르쳐주었다.

‘우리 특이한 막내에게도 무공을 가르치기는 해야 하는데.’

재능만 놓고 보면 아마 대륙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천무지체를 타고난 시엘라.

일정이 틀어진 탓에 생각보다 이르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칼릭스는 일단 그녀를 불러들이고 수련에 대한 의사를 물어보았다.

“검에서 아예 손을 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가 가르치는 것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흐른 재회였지만, 시엘라는 첫 만남 때보다는 사람다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무감정한 억양의 말투였지만, 그래도 눈빛에서 전보다는 훨씬 생기가 느껴졌다.

“그럼 요리와 재봉, 꽃을 재배하는 방법은 더 이상 배울 수 없나요.”

자리를 비운 그 며칠 사이에 관심사가 몇 가지 더 늘어난 모양이다.

“아니. 하고 싶은 걸 억지로 그만두게 하진 않지. 다만 그대가 지난번 대련 때처럼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하룬빌가의 오러연공법을 버리고 새로운 수련을 할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그렇다면 좋아요.”

칼릭스는 시엘라에게 다른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심법을 익히기 위해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전 지식들을 전해주었다.

자라온 환경 탓에 사람이 모자라 보일 뿐 오성 자체는 뛰어난 편인지, 그녀는 금세 칼릭스가 전수한 지식들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며, 칼릭스는 한동안 영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수림의 사건에 대한 조사에 관여하고자 떠났던 알론드가 돌아오며, 칼릭스에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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