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76화 (76/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6화

서로 시선을 교환한 칼릭스와 알론드가,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한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불쾌하구먼. 썩은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야.”

“사이한 마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군요. 아까 전의 그자 외에 다른 흑마법사가 더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조심하도록 하세.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빠져나가는 것도 감안해야 하네.”

“주의하겠습니다.”

필드에서 갑작스럽게 적으로 마법사를 맞닥뜨리는 것과, 준비를 갖춘 장소에서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난이도가 전혀 다른 일이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전투경험이 풍부한 알론드는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칼릭스를 자신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음에도 퇴각을 염두에 두며 경고를 전했다.

스스로의 능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칼릭스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주의를 기울였다.

기분 나쁜 안개 속을 돌아다니던 어느 순간.

끼야아아악!

끄아아앗-!

“큭.”

“으음.”

찢어지는 듯한 여성의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향한 보이지 않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체형 몬스터 중에서도 고위험군에 속하는 밴시(Banshee)들의 울부짖는 소리였다.

육신이 없는 영체 형태이기에 마법이 깃든 무기를 가졌거나,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가 발현하는 순도 높은 오러 소드가 아니면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없는 몬스터.

게다가 듣는 이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밴시의 통곡은, 오러로 심신을 보호하는 기사조차도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칼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밴시 한 마리에게 기사단이 전멸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정신공격의 효과는 설령 마스터라 해도 완전히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칼릭스와 알론드 두 사람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잡스러운 것들이 설쳐대는군요.”

“경계를 늦춰선 안 되네. 저게 전부일 리는 없으니.”

현문정종의 내공심법들을 운용할 수 있는 칼릭스는, 이미 오랜 수양을 거친 고승처럼 단단한 부동심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알론드 또한, 어지간한 일로는 흠집도 낼 수 없는 정신방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물론 적들의 공격이 그게 다는 아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흐릿한 안개를 뚫고, 덩치 큰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두 사람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사람의 몸뚱이만 한 굵기의 통나무를 몽둥이 삼아 휘두르는 오우거와 트롤들.

‘아까 그 흑마법사처럼 몬스터들을 조종하는군.’

마법적인 강화로 인해 다른 평범한 개체들보다 월등히 강력해진 몬스터들의 합동공격은, 두 사람도 가볍게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스터급의 기사들은 오러로 육신을 보호해 피격시의 데미지를 줄이는 기술도 가능하지만, 몬스터들의 괴력이 담긴 공격은 그렇게 피해를 줄여도 전투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크게 어려운 점이 없기는 한데.’

쉬이익.

포위를 당해 피할 수 없는 일격을 허용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움직인 칼릭스는, 정교한 검법으로 몬스터들의 급소를 찔러 바람구멍을 만들어주었다.

기묘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그리 밝지 못했지만, 예민한 기감 덕분에 전투 수행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달려드는 적들을 가뿐하게 무력화시키던 칼릭스는, 도중에 발밑에서 음울한 기운이 밀집되는 것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자리를 벗어났다.

쑤욱.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두운 손길이 칼릭스가 밟고 있던 땅 위로 솟아나 허공을 잡아챘다.

“잘나신 마스터들께서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런 곳까지 행차하셨는가?”

흑마법사 커프만의 개입이었다.

몬스터들의 배후에 있을 흑마법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기에, 칼릭스는 은밀하게 발현했던 그의 마법을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론드 쪽은 사정이 달랐다.

“헛!”

검술 하나만큼은 칼릭스 못지않게 뛰어나지만, 신법이나 감지능력이 칼릭스에 비해 뒤처졌던 알론드는, 커프만의 흑마법을 피해내지 못하고 일순 움직임이 둔해졌다.

물리적인 억제가 아니라 저주가 담긴 마법이었기에, 오러의 힘으로 저항해봤지만 빠르게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뻐억!

“커헉!”

“알론드 님!”

오우거의 발길질에 적중당해 몇 미터를 튕겨져 나간 알론드가, 고통에 찬 신음을 터뜨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 몸을 웅크리며 어깨를 덮은 폴드런에 오러를 담은 채 공격을 받아내 피해를 최소화시키긴 했으나, 견갑골이 으스러져 한쪽 팔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나마 검을 쓰는 팔 쪽이 아니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퉷. 크흐, 괜…… 찮네! 난 신경 쓰지 말고, 놈을 상대하시게!”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일어난 알론드가, 걱정이 담긴 기색으로 달려오려는 칼릭스를 만류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한 자리에서 발목을 붙잡혔다간, 둘 다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합당한 판단이었다.

“이쪽의 몬스터들은 내게 맡기고, 어서!”

팔 하나 못 쓴다고 해서 당장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아니기에, 칼릭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부상당한 알론드가 염려스럽긴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흑마법사를 빨리 잡아내고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전력을 다해 신속히 흑마법사를 제압하도록 하되,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포기하고 퇴각해야 한다.’

마음을 정한 칼릭스가 오러하트를 맹렬하게 가동시키며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안개 너머에서부터 꾸역꾸역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벽을 아무런 마찰 없이 돌파하기란, 온갖 무공을 구사하는 칼릭스라 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다크 플레임]

어떻게든 최소한의 접전으로 길을 뚫으며 나아가려던 칼릭스를 향해, 마력을 품은 울림의 시동어와 함께 커프만의 공격마법이 날아들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불길한 어둠의 불꽃이, 칼릭스의 몸을 집어삼키기 위해 넘실거리며 몸집을 부풀렸다.

퍼엉!

폭발하는 불길을 피해 몸을 뒤로 날린 칼릭스를 향해, 커프만은 계속해서 파괴와 저주의 힘이 뒤섞인 흑마법들을 시전했다.

[데스 휩]

[컨퓨즈]

[다크니스 크로우]

[패럴라이즈 핸즈]

마스터에 비견되는 위자드급 흑마법사인 커프만은 고속영창으로 짧은 시간에 여러 종류의 마법들을 난사했고, 그때마다 칼릭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마법까지 피하려니, 몸뚱이 하나로 감당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짜증스러운 상황에 칼릭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강화된 몬스터 수십 마리에 마법 지원까지 더해지니, 놈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아.’

그나마 공격마법은 범위에서 벗어나면 그만이지만, 저주계통의 마법은 칼릭스로서도 완전히 피해낼 수 없어 조금씩 영향이 누적되고 있었다.

오러의 힘이 만능은 아니기에, 저주의 침식으로 감각이 둔해져 가고 몸이 점점 무거워져 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안 되겠군. 어차피 전력을 다하기로 했으니, 몸 사리지 말고 조금 무리를 하는 수밖에.’

강력한 한 수가 필요하다고 느낀 칼릭스가, 전신으로 막대한 기운을 퍼트리며 오러하트를 최대한도까지 혹사시켰다.

일순 칼릭스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여럿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미러 이미지? 그따위 얕은 수작을…….”

감히 진짜 마법사 앞에서 마법으로 눈속임을 하려 하다니.

칼릭스가 분신을 만들어내는 환영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고 짐작한 커프만은, 비웃음을 흘리며 칼릭스의 환영마법을 파훼하려 시도했다.

“……어엇?”

그러나 먼지 한 톨 만한 마력조차도 컨트롤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인 그의 마력운용능력으로도, 칼릭스의 환영에서 가짜와 진짜를 분별해 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짐작과는 달리 그것은 조잡한 환영마법 같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림칠십이종절예.

연대구품.

신비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공능을 지닌, 소림무학의 정수 중 하나였다.

천년소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터득한 이가 손에 꼽힌다는 전설적인 무공을 펼친 칼릭스가, 아홉으로 나뉜 분신들을 활용해 몬스터들을 돌파하며 커프만을 향해 나아갔다.

하나하나가 본체와 같은 실력을 발휘하는 분신이었기에, 순식간에 마스터가 아홉 명으로 늘어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칼릭스가 연대구품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몇 초의 시간은, 전황을 뒤집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쐐애액!

몬스터의 벽을 뚫고 들어온 칼릭스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커프만의 머리 위에 벼락같은 일격을 내리 꽂았다.

그러나 고위의 흑마법사인 커프만은 그런 칼릭스의 공격에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슈욱.

‘……사라졌어?’

상급 전투마법사들의 구명수단인 블링크 마법을 통해 공간을 도약해 거리를 벌린 커프만이, 목표를 놓치고 멈춰선 칼릭스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데들리 스트라-]

“후웁!”

자신을 향한 주문의 영창을 인식한 칼릭스가, 몸을 돌리며 커프만을 향해 손에 쥔 검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연대구품을 펼치느라 이미 대량의 오러를 소모한 마당에, 다시 또 아까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에.

뒤를 따질 겨를도 없이 어떻게든 지금 승부를 봐야만 했다.

“으윽.”

오러가 실린 검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에, 커프만은 다급히 주문을 캔슬하고 다시 한번 블링크를 시전했다.

즉발성의 공간계 이동마법인 블링크는 분명히 구명수단으로는 탁월하지만, 마력의 소모가 엄청나고 사용자의 몸속에 구성된 마력회로에도 상당한 과부하를 주는 마법이다.

그런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며 생긴 부담으로 심장 부근에 통증을 느낀 커프만이,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입가에 웃음기를 띠며 마음속으로 칼릭스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멍청한 놈. 내가 이겼다.’

기사가 검을 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싸우겠는가.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지, 상대가 맨손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커프만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플링이라도 걸어볼 셈이냐? 미안하지만 몸 쓰는 것에는 취미가 없어서.”

달려드는 칼릭스를 조롱한 커프만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배리어 마법을 사용했다.

이윽고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기류가 그의 몸을 감싸며, 외부의 충격을 차단하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크큭큭!”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에는 두어 번 만에 깨져나갈 주문이지만, 검이 없는 기사를 상대로는 절대보호주문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커프만의 앞에 도착한 칼릭스가 바닥을 힘차게 박차며 그를 향해 손바닥을 쭉 내밀어 뻗었다.

‘흐흐,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오러 블레이드도 한 번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방어막이니, 맨손으로 때려봐야 자신이 피해를 입을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커프만은 칼릭스를 비웃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려 그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헛된 발악으로만 생각했던 칼릭스의 손바닥이, 방어막을 부드럽게 파고들며 그의 몸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무, 뭣!? 허억!”

맨손이 무기를 든 것보다 약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무공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상식이 파괴되는 효력이 깃들어 있다.

소림칠십이종절예.

대력금강장.

모르는 이의 눈에는 주먹도 아니고 손바닥을 내뻗는 칼릭스의 모습이, 일견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가 펼친 것은 연대구품에 비하면 살짝 명성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소림 최상승의 무학으로 분류되는 장법이었다.

퍼엉!

“꺼헉…….”

가슴께가 손바닥의 모양대로 자국을 남기고 함몰된 커프만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찬 감정이 그의 눈빛에 서렸다.

“그륵, 이런 개에 가튼…….”

조직을 이끄는 고위 간부인 엘더로 추앙받던 그는, 자신이 무슨 파리처럼 사람의 손바닥에 맞아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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