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4화
원 아이드 캣
익스퍼트급 실력자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출동해야, 간신히 하나쯤 처치가 가능한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대수림 심처에서.
거대한 몬스터 한 마리의 뇌를 검으로 막 꿰뚫어 즉사시킨 칼릭스가, 움찔하며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순서대로 녀석의 몸을 해체할 준비를 하던 알론드가,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나? 또 뭔가 오는 것 같진 않은데.”
“저쪽에서 아까부터 뭔가 감각에 거슬리는 게 있습니다. 뭐라고 콕 집어서 말은 못 하겠는데…….”
“으음, 수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없어 보이네만. 그래도 자네가 괜한 말을 할 리는 없으니, 어쩌면 이능으로 은신하는 몬스터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구먼.”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두 마스터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딱히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없는 장소였다.
주변의 다른 지형보다 지면이 조금 움푹하게 들어가 있었고, 큼지막한 바위 몇 개를 중심으로 크기가 제각각인 돌 더미가 군데군데 뭉쳐 있을 뿐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네만?”
“예…… 몬스터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아!”
탄성을 터뜨린 칼릭스가 검을 집어넣고, 주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대수림의 심처는 외부의 다른 곳들과 비교해 매우 비정상적인 마나의 밀도 및 분포를 보이기에, 감각이 예민한 마스터조차도 대기 중의 자연적인 마나의 흐름을 분별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같은 마스터임에도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알론드와 달리, 칼릭스는 여러 무인들의 특별한 경험과 지식들을 한 몸에 품고 있었기에.
그는 이 장소를 맴도는 어떠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진법…… 하고는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머릿속의 기억들 중 하나를 빌려온 칼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주변의 사물을 관찰했다.
무가로서의 인지도 자체는 다른 유명한 세가들에 비해 조금 뒤처지지만, 그럼에도 무림정파를 대표하는 이름들 중 하나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문이 있다.
제갈이라는 성씨로 이루어진 이들 가문은 무공도 물론 나쁘진 않지만, 역리(易理)를 바탕으로 한 기문진법과 토목기관 등 다른 무림세가에선 잡학으로 취급하는 학문 쪽에 통달한 것으로 더 유명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런 제갈세가에 속한 어느 무인의 기억을 통해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칼릭스는, 칼집에 집어넣었던 검을 뽑으며 허공의 한 지점을 향해 벼락같은 일격을 휘둘렀다.
“으음?”
무언가가 바뀌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팔짱을 낀 채 의아한 눈으로 칼릭스를 지켜보고 있던 알론드는, 아까와는 달리 그 자신을 둘러싼 공간 자체가 미약하게나마 뒤흔들리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을 잡아낼 수 있었다.
“……정말로 여기 무언가가 있기는 한 모양이구먼.”
굳은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는 알론드를 내버려 두고, 칼릭스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기행처럼 보이는 행동을 반복했다.
오러가 실린 검으로 허공을 베어내거나, 바닥에 박혀 있는 돌덩어리를 찌르는 행위가 연이어 벌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론드가 느끼는 묘한 위화감은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앞에 여태까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토굴인가? 이런 곳에 지하로 이어지는 길이 숨겨져 있다니.”
기울어진 모양으로 박혀 있던 바위 하나의 아래로, 인공적인 조형미가 느껴지는 계단식의 입구가 나타났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음을 알 수 있는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계단 덕분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자네는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는가?”
“저도 이런 게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이곳에 뭉쳐 있는 수상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들을 잘라냈을 뿐입니다.”
“허허, 참…… 난 자네가 손을 쓰기 전까진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말일세. 아무튼 신기한 일이구먼. 이런 은폐 효과라면 필시 고위마법사가 펼쳐놓은 결계마법일 터인데.”
결계마법이란 공간에 영향을 끼쳐 일정 구역에 대한 외부의 접근 자체를 봉쇄하는 마법.
공간계통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난이도 자체가 매우 높다.
거기에 마스터의 감각조차 비틀 정도의 인식저하 기능이라면, 당연히 상당한 마법적인 힘이 동원되었다고 봐야 한다.
마법사(Mage)들 사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위대한 지식의 총화에 근접한 자.
한 학파를 대표하는 수장 혹은 원로급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마도사(Wizard)의 호칭으로 불리는 고위마법사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처럼 대수림 심처에서 활동하는 이가 또 있는 모양일세. 어쩌면 어느 학파의 고위마법사가 연구재료를 구하러 직접 이곳에 뛰어든 걸지도.”
분야는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마도사는 마스터급 기사와 비견될 능력을 갖춘 이들이니, 그들처럼 심처에서 활동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두 사람처럼 험지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겠지만, 마법실험의 재료가 지천에 널린 심처에는 위험만 감수하면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적지 않을 테니.
“이거 입장이 난처해질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아하니 안전한 거점을 만들어두려고 결계마법을 펼쳐둔 모양인데, 자네가 그걸 깨부쉈으니 그쪽에선 기분 나쁘게 여길 법도 하지 않나.”
“흠. 그렇긴 하군요.”
하지만 칼릭스는 어쩌면 현재의 상황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계마법이라. 진법과 흡사한 부분들이 있어서 성공적으로 파훼하기는 했는데, 무너뜨리는 내내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단 말이지.’
결계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을 오러의 힘으로 간섭해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칼릭스는 무척 음울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잔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 자체에는 딱히 조예가 없는 그였지만, 무인들이 다루는 오러 이상으로 다양한 성질의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 마법사들의 마력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오러든 마력이든 그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특성은, 그리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점도 안다.
‘분명 전에 이와 비슷한 성향의 마력을 접해본 적이 있었지.’
아카데미에 머물던 작년 초.
현장실습에서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맞닥뜨리게 된 흑마법사가, 농도는 낮지만 이런 느낌의 속성을 지닌 마력을 다루고 있었다.
묘하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당시의 장소도 외곽부이긴 했지만 대수림 지역이었는데, 심처인 이곳에서마저 또 그와 흡사한 마력계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마냥 우연으로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군.’
어쩌면 심상치 않은 상황에 연관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 칼릭스는, 자신이 떠올린 사실들을 알론드에게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알론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드러난 공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예전에 당했던 암습에 대해 조사할 때, 그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도 한 적이 있었지 않은가. 분명 원아이드캣이라는 단체에 속한 자였지? 아무리 파헤쳐도 드러나는 단서가 없어, 자네에게 뭔가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진 못했었지만 말일세.”
“그 두 사건이 연관이 있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모를 일입니다만, 일단 여기 이곳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봐야 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흑마법사는 우연히 마주치게 된 생도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려고 했었다.
만일 지금의 장소가 흑마법사들과 관계되어 있다면, 이 역시도 구린내 나는 범죄와 관련된 비밀이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뜻을 합친 두 사람은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린 채,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탐색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결계마법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안에서 알아차린 것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침입자들을 반겨주는 인파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어떻게 결계를 파괴한 거지?”
6명의 사람들.
그중 맨 뒤편에 선 음침한 인상의 사내가, 사나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알론드가 슬쩍 칼릭스를 돌아보며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으나, 칼릭스는 입을 열기에 앞서 상대방의 구성을 둘러보느라 잠시 시간을 지체했다.
‘이 기운은…… 확실히 지난번의 그자와 같은 흑마법사다. 하지만 나머지들은?’
음침해 보이는 사내는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흑마법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팡이가 아니라 검을 든 나머지 5명의 사람들은, 어두운 속성의 마력이 아닌 오러를 몸에 품고 있었다.
‘기사들이다. 게다가 저 통일된 형식의 갑옷은…… 문양만 없을 뿐이지 왕국군 복장과 동일한데?’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에 칼릭스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흑마법사가 전부 범죄자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을 법한 장소에서 나타난 자들이다.
한데 그들 사이에 왕국군 기사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있으니, 그로서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쯧, 대답할 리가 없나. 어차피 여길 들어온 이상 곱게 보낼 수는 없으니 상관없겠지. 죽여라!”
흑마법사로 보이는 인물의 지시에,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검을 쥐고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덕분에 칼릭스는 복잡해져 가는 머리를 비워낼 수 있었다.
‘어차피 제압하고 알아내면 될 일이야.’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살수를 펼치는 자들을 상대로 머리 아픈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매서운 공격들이 두 사람의 몸을 향해 찔러 들어온다.
물 흐르는 듯이 절묘하게 연계한 합격.
하지만 상대를 너무 잘못 만났다.
고작 익스퍼트급 5명에게 당해줄 만큼, 마스터와 익스퍼트의 격차가 좁지는 않은 법이다.
칼릭스와 알론드가 한 초식씩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5명의 기사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닛!?”
놀란 흑마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서 그는 다급히 지팡이를 흔들며, 불길한 어둠의 마력을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릇, 크르르.”
“크아악!”
흑마법사의 손짓에 반응하여, 쓰러진 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잇! 아까운 전력을 소모하게 만들다니…… 할 수 없지. 어서 저것들을 치워라!”
“허어?”
죽일 생각까진 없었기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알론드는 신기한 것을 다 본다는 듯한 눈빛으로 일어선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풀려 있는 것도 그렇고, 하나같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군. 흑마법에 의해 조종을 받고 있는 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멍한 얼굴로 일어선 기사들을 둘러본 칼릭스는, 역시 배후에 있는 흑마법사를 빨리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지면을 박차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몸을 움직인 기사들이 칼릭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까보다 훨씬 더 신속해진 속도로 그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카가강!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을 튕겨낸 칼릭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적들의 수준이 갑자기 급격하게 달라졌다.
동작의 형태 자체는 여전히 그가 보기엔 단조로운 수준이지만, 속도와 위력만큼은 기사들 하나하나가 마스터와 비견될 정도로 빠르고 강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사이한 술법에 의해 마스터와 대등한 움직임을 보이는 기사들의 모습이, 진짜 마스터의 입장에선 일종의 모욕처럼 느껴졌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낸 칼릭스가 검신을 가로로 눕힌 채, 폼멜의 끝을 다른 손으로 받치며 다리를 넓게 벌려 자세를 낮추었다.
“후우우-”
쐐애액!
이곳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기묘한 기수식을 취하며 호흡을 길게 들이쉰 칼릭스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칼날들 사이를 파고들며 뇌전과도 같은 일검을 내질렀다.
절정에 달하는 상승의 경지는 단순히 힘과 속도가 비슷하다고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칼릭스는 진정한 마스터의 수준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도 없는 현묘한 무리가 담긴 검초를 펼쳐냄으로써, 그 차이를 적들의 몸에 친절하게 새겨넣어 주었다.
“무, 뭐야! 무슨 짓을 한 거냐!?”
과정을 보지 못하고 결과만을 목도한 흑마법사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잘려나간 다섯 개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시끄럽군.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네놈이야.”
퉁명스럽게 대꾸한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