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3화
“죄송해요.”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시엘라는 딱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처음의 모습과 마찬가지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짧은 사과의 말을 뱉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은 나는 모양이군?”
“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칼릭스의 질문에 시엘라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멍한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없는 듯한 모습.
뭐라도 변명을 해야 정상이지 않나 싶지만,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길을 마주하고 있자니 따져 물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혹시 머리가 조금 모자란 건가? 말투도 뭔가…… 고위귀족의 자제다운 교육을 받았단 느낌이 없긴 한데.’
그렇다고 또 딱히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가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라는 건 확실해보였다.
시엘라를 어떻게 취급할지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칼릭스는, 일단 며칠 정도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행동거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머무를 방을 지정해주고 어떠한 지시도 없이 마냥 방치해 두자, 시엘라는 그녀의 첫인상만큼이나 꽤나 기묘한 행동양식을 보여주었다.
“하루 종일 검술 수련만 한다는 건가?”
“예엡. 검을 휘두르거나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거나, 두 가지 외에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아! 음식을 가져다 놓으면 그때는 바로 하던 걸 멈추고 식사를 하기는 합니다만.”
하인의 보고를 받은 칼릭스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매만졌다.
하루, 이틀이 지나 일주일이 흐른 뒤의 보고였다.
그동안 칼릭스는 일부러 시엘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도 않는 것처럼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했다.
자신을 찾아오거나 하다못해 시종을 통해 뭔가 물어보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시엘라는 마치 그것 말고는 다른 무엇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묵묵히 검술수련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룬빌에서 어떤 꿍꿍이가 있다면 그녀를 통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텐데 말이지. 혹시 내가 영지를 비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의심만을 품은 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시엘라라는 아이 말일세. 내가 좀 알아보니 그만한 재능과 실력에도 소문이 퍼지지 않은 이유가 있더구먼.”
칼릭스는 알론드로부터, 시엘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입수할 수가 있었다.
10살 무렵부터 독보적인 재능을 드러내며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덕분에, 당시 귀족가 사이에선 잠시 그녀에 대한 입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하룬빌의 어린 검술천재에 대한 이야기는, 누군가 억지로 은폐하기라도 한 것처럼 싹 사라지게 되었다.
“명가 출신의 천재에 관한 소문은 원래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법인데, 갑자기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으니 이상한 일이었지.”
“이유가 무엇 때문이랍니까?”
“이건 사실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네만, 당시 사교계를 떠돌던 꽤 큰 스캔들이 하나 있었던 모양일세.”
시엘라의 외모는 모친을 포함한 외가 쪽 사람들과는 그다지 닮지 않은 생김새였다.
그렇다고 또 부계 쪽의 특징을 물려받았는가 싶어 살펴보면, 오히려 하룬빌가에는 아예 비슷한 외형을 가진 이조차 없다는 것이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시엘라 경과 데이먼 후작은 닮은 구석이 전혀 없긴 하군요.”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딸자식은 부친 쪽의 외형을 많이 닮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데이먼과 시엘라의 외모를 머릿속으로 그려본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는 건, 으음…….”
“예상하는 대로일세. 모친 쪽에서 몰래 불륜을 저질러 태어난 아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온 거지. 이후 그녀에 대한 소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걸 보면, 아마 하룬빌가에서 손을 쓴 것일 테고.”
사람들이 시엘라에 대해 떠들지 않게 입단속을 시키고 그녀의 외부활동을 완전히 차단한 것을 보면, 그 스캔들이 결국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주 난리가 났겠군. 하룬빌 후작가 같은 고위 귀족가문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주의 자식이 다른 누군가의 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시엘라의 첫인상이 기묘했던 게 이해가 갔다.
정말로 가문 내에 틀어박혀 검술을 연마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가주의 친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음에도 의문의 실종 따위로 처리하거나 가문에서 제명당하지 않은 것은, 그 엄청난 재능이 아깝기 때문이었나?’
어쨌거나 사정이 그렇다면, 그녀는 가문 내에서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또 다른 명가에서 불량품 판정을 받고 치욕 속에서 살았던 아이반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태까지 감춰두고 있던 가문의 치부를 어째서 내게 보낸 거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와 하룬빌가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엘라가 데이먼 후작의 친딸이었어도 이상한 일인데, 그런 바깥에 말하지 못할 일이 엮여 있다면 더더욱 자신에게 맡긴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스터 테슬리의 말대로 진짜 양측의 친밀한 관계를 다져보자고 그녀를 보냈을 리는 없을 터.
무언가 모종의 이유가 있을 텐데, 저들이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직접 부딪쳐서 답을 구하고자 생각한 칼릭스는, 시엘라를 찾아가 그녀의 속을 떠보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시엘라는 가문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기를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마스터의 감각은 일반인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예민함을 가졌고, 여러 무인들의 기억을 공유한 칼릭스는 특히나 다른 마스터들보다 예리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통제력을 지닌 같은 마스터나, 그런 쪽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요원이 아니라면.
눈의 떨림이나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등 사소한 반응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 거의 본능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엔 시엘라가 하룬빌가에서 어떤 모종의 임무를 받았으면서, 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무감정하게 속내를 감추려는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극심한 통제를 받으며 살아와서 그런지, 정말로 인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수동적이군.’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며 그녀의 성격에 대해 좀 더 파악해 본 칼릭스는, 자신이 호출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일주일이 아니라 일 년이 넘어가도록 계속 방 안에서 검만 휘두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허락되지 않고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없는 삶.
11살 즈음부터 해서 19세가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엘라는 쭉 그런 생활을 보내왔던 것이다.
‘대련에서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굴던 건, 아무래도 그런 배경이 원인이었던 듯하군.’
하룬빌가의 검술 및 오러연공법은 정파보다는 사파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
무력의 향상을 위한 성취가 더딜지언정 마음의 수양에도 신경을 쓰는 정파의 무공들과 달리, 사파의 무공은 오로지 상대의 격살을 위한 실전적인 방식만을 추구한다.
그런 호전성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러의 수련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공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줄도 모르고 무작정 살초로 점칠 된 무공을 익히다 보면, 차츰 심성이 표독스럽게 변하며 절제 없이 피를 즐기는 마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이성을 잃고 날뛰는 건, 심마(心魔)의 증상이기도 하니.’
사실 이곳 세상의 오러연공법 자체가 무림에 비하면 워낙 원시적인 수준이라, 그런 성질의 구분이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다.
하룬빌가의 오러연공법이 사파의 성향에 가깝다고 해도, 그걸 익힌 하룬빌의 일원들이 전투에서 광인처럼 행동하진 않는다.
그들과 다르게 시엘라가 대련에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은 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성장 과정과 너무도 뛰어난 무재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정신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심신이 성숙해지기도 전에 너무 오러의 경지가 높아진 것이 원인이란 뜻이다.
아마 저대로 계속 수련과 성장을 거듭한다면 언젠가 그녀가 마스터가 된 후에도, 본인의 정신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무림의 기억을 빌려 표현하자면, 주화입마에 빠질 확률이 크다는 뜻.
잘못하면 이지를 상실하여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만 몰두하는, 희대의 살인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천무지체라는 축복받은 체질을 타고 난 이가, 그런 흉악한 운명을 맞이하도록 둘 수는 없지.’
칼릭스는 시엘라에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 하나를 전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에게 꼬리처럼 달려오는 하룬빌이라는 이름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칼릭스는 자신의 직감에 맡긴 판단을 믿기로 했다.
‘하룬빌가의 의도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시엘라가 그쪽의 첩자가 되어 내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
그가 시엘라를 마이언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제자로 삼을 것을 말할 때도, 그녀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표정으로 무심하게 알겠다는 답변을 내뱉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그녀에게 하룬빌가에서 익힌 모든 것들을 더는 수련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시엘라는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 얼굴이 되어 그에게 항의를 표했다.
“저는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제자로 들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검술을 가르쳐 줄 것이니 그걸 배우도록.”
“다른 검술…….”
눈가를 살짝 찌푸린 시엘라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걸 배워야 한다면, 그게 꼭 검술이어야만 하는 건가요.”
“음? 무슨 말이지? 검술이 아닌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리인가?”
“……네.”
“어떤 것을?”
“아, 그……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라거나.”
뜬금없는 이야기에 약간 당혹스러워하던 칼릭스는, 이내 속으로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노예처럼 가둬진 채 검술수련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억압된 생활을 해온 아이였지. 한창 이런저런 호기심이 많을 시기인데.’
칼릭스는 천무지체를 타고난 시엘라를 자신의 밑에 두고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무재가 아깝다고 오로지 무공만을 익힐 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동등한 사람으로서 대해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함이 옳았다.
“그럼 검술 쪽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요리에 대해 배우고 싶다 하니, 내 따로 그쪽의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지시를 해두겠다.”
칼릭스의 대답에 시엘라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근 9년 만에 갇혀 있던 공간을 나오게 되며, 바뀐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던 그녀다.
검술을 연마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엘라는, 반평생 해왔던 것을 포기하라는 말에 반발심을 느끼고 어차피 무시될 것이 당연한 요구라는 것을 해보았다.
한데 칼릭스가 그것을 받아들여 줬기에, 그녀는 역으로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충격에 빠져 있는 시엘라를 보고 있던 칼릭스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하고 싶거나 궁금한 것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도록. 뭐든지 들어줄 수는 없지만, 큰 문제가 없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 테니.”
“아…….”
“대신이라기엔 조금 뭐하지만, 나중에 내가 가르치는 수업에도 불만 없이 잘 따라와 주면 좋겠군. 지난번 대련 같은 경우가 또 벌어져선 안 되니, 시엘라 경은 다른 오러연공법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네.”
“…….”
크게 놀란 탓인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는 시엘라를 잠시 지켜보던 칼릭스는, 이윽고 그녀를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지만, 그나마 저런 감정이라도 드러내니 이제 좀 사람 같군. 다른 제자들처럼 저 또래에 어울리는 정서가 갖춰져야 할 텐데.’
영주대행인 닐슨에게 시엘라의 요리 수업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고, 그녀가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신경 써 달라 말한 뒤.
칼릭스는 그동안 지체되었던 대수림에서의 활동을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슬슬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로구먼.”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어차피 거기 가서는 제대로 휴식을 하지도 못하는데, 푹 쉬고 움직이면 좋은 거지 뭘.”
상위의 경지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같이 험지를 돌아다니자는 칼릭스의 요청을 마다치 않았던 알론드는, 이번에도 그의 행보에 어울리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며 두 번째 대수림행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첫 번째보다 익숙해진 두 사람의 수련활동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막을 내려야만 했다.
‘이게…… 뭐지? 대수림 심처에 어떻게 이런 게 있는 거지?’
지난번에는 찾지 못했던 특이한 무언가를 칼릭스가 발견하게 되며, 예기치 못한 커다란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