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72화 (72/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2화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인형을 보는 것 같군.’

인형 같은 아름다운 외모라는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다.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감정이 결여된 표정에,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알론드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하다 보니 조금은 궁금함이 들었기에, 칼릭스는 테슬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조심스럽게 시엘라를 살펴보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하여, 내심 상당히 의아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였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것처럼 매끄럽지 못한 머리카락과, 몇 년쯤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귀족가의 여성답지 못한 수상한 모양새다.

‘마치 어디 건물 안에서 몇 년쯤 갇혀 지낸 사람처럼 보이지 않은가.’

빛이 들지 않는 수용소에 감금된 죄수, 혹은 중병을 앓느라 오래 병치레를 한 환자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그렇게 관리되지 못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얼굴만큼은 미녀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외모였던지라, 역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고위귀족 가문의 일원다운 외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문이 날 정도로 무재가 뛰어난데 외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참 기묘한 이야기로군. 무슨 큰 병에 걸려 몇 년쯤 누워 있기라도 했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저 손과 오러의 수준이 또 말이 되질 않는데.’

언뜻 보기에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병약한 미소녀 같은 분위기지만, 잘 살펴보면 몸 전체에 고된 단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창백한 피부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근육의 선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

이제 19살이라고 들었는데, 느껴지는 오러 또한 익스퍼트 중급은 되는 수준.

가문의 지원을 받는 귀족 자제들이 재능까지 타고나야 그 나이쯤에 간신히 익스퍼트급에 발을 들인다는 걸 생각하면, 천재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속도의 성취다.

게다가 언뜻 보이는 손바닥은 물집이 수도 없이 터졌다가 아문 듯이 굳은살이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박혀, 여성의 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무가의 사람들이 고된 수련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손이 가진 형태는 그런 걸 감안해도 상당히 과하게 혹사당한 흔적이었다.

‘요약하자면 수년간 건물 안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검만 휘두르는 생활을 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데.’

시엘라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칼릭스는, 고개를 돌려 테슬리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가르침이라 하면, 지도대련을 해달라는 소리입니까?”

“그런 단발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백작께선 지금도 여러 제자들을 두고 계시지 않소? 이플리트가의 아이반 경처럼, 시엘라 역시 마이언가의 기사이자 제자로 삼으시면 어떻겠냐는 말이었소.”

테슬리의 말에 칼릭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언뜻 봐도 굉장한 무재를 지닌 기사인데, 다른 가문에 선뜻 넘겨주겠다고? 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기사가 섬기는 주군을 갈대가 흔들리듯 이리저리 바꿔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어지간한 변고가 생기지 않는 이상, 어느 가문에 한번 충성을 맹세했으면 다른 곳으로 다시 소속을 옮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그런 짓을 했다간, 명예가 없는 기사란 소리를 들으며 귀족사회에서 매장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었다.

“너무 이상하게 보진 마시오. 혼담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가시겠소? 우리 가문은 진심으로 마이언가와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싶은 것뿐이라오.”

“으음…….”

혼인으로 동맹을 맺는 데 실패했으니, 배우자가 아닌 다른 방향에서 관계개선을 시도하겠다는 말.

노골적인 이야기이고 선뜻 납득이 가진 않지만, 아주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당장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으니, 곁에 두고 천천히 판단을 해보시길 바라오.”

마치 어떤 방식으로든 시엘라를 떠넘기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테슬리는 이후로 몇 마디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짧게 나누고 곧장 칼릭스의 영지에서 떠나갔다.

혼담과는 달리 칼릭스도 이번만큼은 자신에게 의탁하겠다는 시엘라에 대해, 곧바로 거절하고 돌려보내기가 곤란했다.

겉보기에는 유능한 기사를 넘겨주는 하룬빌 측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모양새였기에, 저쪽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제안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기 때문.

‘말하지 않은 꿍꿍이속이 더 있는 것 같지만, 무슨 생각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군.’

수상하긴 했지만 아무튼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칼릭스는 시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의도야 어쨌거나 혼약과 달리 칼릭스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가르칠지 말지는 그의 자유였으니 별 부담이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이제 뭘 해야 하나요.”

고저 없는 밋밋한 음성이 들려와 칼릭스는 시엘라를 돌아보았다.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낮이가 없는 어조다.

‘나이는 아카데미 생도들과 비슷한데, 표정이나 말투는 왜 저러는 건지.’

첫인사 이후로 테슬리가 대화를 주도하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던 그녀였기에, 제대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드러나지는 얼굴과 눈빛에 말투마저 저러니, 사람이 아니라 무슨 골렘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잠시 시엘라를 바라보며 그녀를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지 생각해 본 칼릭스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시엘라 양. 아니, 시엘라 경. 가문 대 가문으로 혼담을 논하는 자리는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편히 말하도록 하겠네.”

“상관없어요.”

“음. 아무튼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머리가 좀 복잡하긴 하네만. 우선은 먼저 자네의 실력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칼릭스의 말을 들은 시엘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관 근처에도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멀리 걸음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손에 검이 쥐어지자 시엘라는 곧바로 자세를 취하며, 가상의 적을 상대로 하룬빌가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잠깐, 멈추게.”

검을 휘두르는 시엘라를 제지하자, 표정 없는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의문의 감정이 서린다.

가만히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칼릭스는 검을 뽑아 들고는 그녀의 앞에 다가가 섰다.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검을 맞대는 것이니, 굳이 허공에다 펼치는 칼춤을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대해 줄 테니 공격해 보도록.”

“…….”

그러나 칼릭스의 지시에도 시엘라는 방금 전처럼 바로 검술을 펼치지 않고, 묘하게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그러지?”

“괜찮은 건가요. 사람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그동안 쭉 금지였는데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하는 시엘라의 모습에, 칼릭스는 살짝 당황했다.

‘마치 사람을 상대해본 지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말하는군. 하룬빌 정도면 내부에서 기사들끼리 자주 대련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이상한 구석이 많은 그녀였다.

어쨌든 잠시 지체되긴 했지만 칼릭스가 다시금 공격을 지시하자, 망설이던 시엘라가 이윽고 선공을 가하며 대련이 시작되었다.

카강!

‘움직임이 상당하군. 검술 자체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걸 활용하는 감각적인 부분도 타고난 모양이야.’

시엘라의 검을 받아주며 실력을 파악해 본 칼릭스는, 처음에 들었던 대로 그녀의 재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이건 그냥 뛰어난 정도가 아닌 것 같군. 아즐린도 동급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였는데, 이 아이는 그보다 훨씬 윗줄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어.’

오러의 수준은 익스퍼트 중급에 해당하지만, 검을 다루는 솜씨를 봐서는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와 겨루어도 단번에 패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칼릭스가 가르치는 이들 중 가장 수준이 높은 아이반도 보기 드문 천재라고 부를 만한데, 시엘라는 그런 아이반과 붙여 놔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다.

고작 19살의 나이임을 생각하면 말이 되질 않는 실력이었다.

‘나처럼 특별한 기연을 경험한 게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몇 개 되지 않겠지. 어쩌면 내가 의심하는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군.’

사실 수상해 보이는 하룬빌가의 제안에도 바로 물리지 않고 시엘라를 받아둔 것은 여러 복합적인 사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칼릭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 여기까지 하지.”

슬슬 시엘라에 대한 파악을 끝낸 칼릭스는, 검을 거두며 대련을 중지하려고 했다.

실력을 확인해 보며 그녀를 처음 봤을 때 품었던 의혹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으니, 이제 그녀의 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쉬익-!

“시엘라 경?”

한데 멈추라고 말했음에도, 시엘라는 공세를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칼릭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슉! 까강. 쉬싯!

“지금 뭐 하자는…….”

공격을 중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살기 짙은 검초를 강하게 뿌려대는 시엘라의 모습에 인상을 굳힌 칼릭스는, 마치 트랜스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허, 완전히 몰입에 빠져서 내 말이 들리지도 않나 본데.’

무공을 수련하며 간혹 어떤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저런 순간에 빠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보아하니 시엘라는 그런 축하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 단순히 칼릭스와 검을 맞대는 것 자체에 과몰입한 나머지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목표에 정신이 매몰된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칼릭스가 계속 그녀의 검격을 쳐내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아예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그의 검을 붙잡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전쟁터에서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병사들은 여럿 봤지만, 고작 대련을 하면서 저리되는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황당해하던 칼릭스는 이내 주먹을 뻗어 그녀의 명치를 빠르게 가격했다.

계속 미친 사람처럼 날뛰게 둘 수는 없으니 일단 제압을 해둘 생각이었다.

“윽.”

고통을 느끼고 정신을 차려주면 좋았겠지만, 시엘라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칼릭스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누가 보면 칼릭스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줄 오해할 것 같은 광경이다.

신법을 펼쳐 시엘라의 뒤로 돌아간 칼릭스가 목과 등 주변의 주요 혈도들을 점혈하며 몸을 굳게 만든 후에야,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움찔움찔 거리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기절한 시엘라를 내려다보던 칼릭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복부에 손을 짚었다.

이어서 시엘라의 몸속에 미세한 오러를 흘려 넣은 칼릭스는, 세밀한 오러 컨트롤로 그녀의 체내를 구석구석 살펴본 후에 손을 떼었다.

‘……혹시나 했는데. 이게 진짜 실존하는 체질이긴 했군.’

세상에는 아이반의 극음지체처럼, 극히 희박한 확률로 평범함을 벗어난 형태의 체질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

종류와 성질도 다양한 그런 체질들은, 무인의 입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축복이 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체질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게 취급되는, 자신의 무공을 물려줄 후계자를 찾는 모든 무인들이 눈에 띄길 바라마지 않는 하나의 체질이 존재했다.

어떤 무공을 배우든지 대성할 수 있고 삼류수준의 토납법만 익혀도 내력이 쑥쑥 차오르는, 천부적으로 고수가 되는 길이 열려 있는 무인에 최적화된 체질.

무림에선 그런 체질을 일컬어 천무지체라고 부른다.

‘내부와 외부의 근맥 전체가 유연하면서도 강인하고, 기혈에 어느 한 곳 막힘이 없으니 숨만 쉬어도 오러가 쉽게 쌓이는 몸이겠어.’

눈으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직접 몸에 손을 대며 근골을 확인한 칼릭스는, 시엘라의 체질이 바로 그 환상처럼 거론되곤 하는 천무지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신기하고 놀라운 것과 별개로, 칼릭스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린 얼굴로 쓰러진 시엘라를 쳐다보았다.

다른 곳에서 발견한 인재였다면 기쁜 마음으로 영입을 하려 들었을 텐데, 하필이면 껄끄러운 하룬빌가의 사람이라니.

게다가 아까의 광증과도 같은 행태는 또 뭐란 말인가.

“……쯧! 이것 참, 이상한 걸 떠맡아버렸군.”

복잡한 심경에 크게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찬 칼릭스는, 턱을 매만지며 그녀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