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71화
시엘라 하룬빌
“7군단에서 수급하던 물자는 이제 완전히 끊어지게 된 건가?”
“어쩔 수 없습니다. 그쪽 인사들은 아직 완전히 저희 영향력 아래 놓인 상태도 아니었으니. 알아보니 7군단에서 자체적으로 계속 군사 활동을 벌이는 모양이라, 더 이상 물자 지원을 요청할 명분도 사라졌습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진즉에 우리 쪽 사람들을 채워 넣었어야 했나.”
“아마 그랬어도 결과는 비슷했을 겁니다. 칼릭스 백작이 상당히 강경하게 지휘부를 휘어잡은 모양이더군요. 직접적으로 저희에게 항의하진 않았지만, 마찰을 두려워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칼릭스…… 칼릭스 마이언. 난데없이 튀어나온 못 하나가 계속 거슬리게 만드는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데이먼 하룬빌의 중얼거림에, 회의장에 자리한 하룬빌가의 사람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군부 쪽의 관리비용이 늘어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대수림에 관심을 가지는 건 곤란해. 듣자 하니 알론드 그자까지 끌어들여서 심처를 헤집고 다닌다는 모양이던데.”
“그렇습니다. 트리우드 학파를 통해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알론드 백작은 요주의 대상이긴 해도 딱히 큰 변수는 아니었거늘. 칼릭스 그 작자 하나로 인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설마 그들이 대수림에서 ‘그걸’ 발견하진 않겠지?”
가주의 질문에 서로를 돌아보던 하룬빌가의 사람들이 이내 부정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스터가 아무리 대단한 경지라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일행에 마도사가 섞여 있다면 모를까…….”
“일단 그쪽에 있는 이들에게 좀 더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질 않아. 곧 거사를 치를 시기가 다가오지 않나. 약간의 변수도 가능하면 차단해두는 것이 좋겠는데, 놈이 대수림에 출입하는 걸 막을 방도가 없겠나?”
“…….”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스터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기가 쉬울 리는 없으니 당연한 침묵이었다.
“여자를 붙여보는 게 가장 무난한 방법일 듯싶습니다.”
“여자라…… 치마폭에 휘둘릴 놈처럼 보이진 않던데. 이미 여러 가문들에서 딸 장사를 시도하고 있을 테니, 눈길을 확 사로잡을만한 방식도 아닐 테고.”
“크흠. 그렇긴 하겠지요.”
귀족가의 혼인에 대한 천박한 표현에, 말을 꺼낸 가신은 헛기침을 하며 민망하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저, 이런 방법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 말해보게.”
“칼릭스 백작은 제자양성에 대한 욕심이 꽤 큰 것으로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영지를 돌며 주민들을 모아두고 직접 사람을 선별해 영주성으로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음. 보고받은 기억이 있는 일이군. 그래서?”
“저희 쪽 인재들을 잠시 위탁시켜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선물도 적당히 보내서 맡겨두면, 적어도 몇 달 정도는 영지에 묶어둘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입니다.”
“호오.”
누군가가 꺼낸 의견에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본 데이먼 후작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군부 쪽에서의 트러블로 우리를 경계하고 있을 텐데. 그런 제안을 한다고 받아주기는 하겠나?”
“아, 역시 그렇겠지요? 끄응…….”
“그래도 의견은 나쁘지 않은 것 같군. 흠…… 아예 그 두 가지를 섞는 것도 괜찮겠어.”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데이먼 후작이, 이윽고 테이블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지시를 내렸다.
“칼릭스 백작에게 혼담을 넣어보도록 하게. 어차피 거절할 가능성이 높고 서신만으로 시간을 끌기엔 부족할 테니, 그자가 영지에 돌아오는 대로 사람을 보낼 수 있게 준비하도록 하지.”
“예. 그런데 누구를…….”
“시엘라.”
“예엣?”
예상 밖의 이름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직된 얼굴로 가주인 데이먼을 바라보았다.
“외모가 반반하고 나이도 적당하니 대상으로 적합한 편이고. 검술에 대한 재능만큼은 확실히 인정할 만하니, 어쩌면 칼릭스 백작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시엘라 하룬빌.
고작 19세의 나이지만 이미 익스퍼트 중급에 도달해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는, 역대 하룬빌가를 통틀어서도 재능으로만 따지면 비교할 자가 없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왕국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도 퍼져 있지 않았다.
더불어 하룬빌가 내에서도 시엘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하룬빌 가문의, 정확히 말하자면 가주인 데이먼 후작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존재였기에.
“혼담은 사양하더라도 몇 수 가르쳐달라는 부탁까지 연이어 거절하기는 어렵겠지. 그러면 못해도 일주일 정도에서, 그자가 관심을 보인다면 그 이상까지도 발을 묶어둘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엘라의 외부활동은 철저히 금지하기로 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상관없네. 어차피 대계를 이루고 난 후엔 그 물건 역시 처분할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해서, 계획을 완벽하게 치를 생각만 하면 되는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딸을 물건으로 지칭하는 가주의 말에도, 가신들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만한 속사정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차 말하지만 이제는 정말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네. 다들 맡은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엄중히 신경 쓰도록 하게.”
“옛!”
가신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데이먼 후작은 의자에 기대 턱을 괴고는 칼릭스에 대해 떠올렸다.
‘한 일 년만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그런 인물이 나타나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계속 거론되는 그 이름이, 데이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슬려 자꾸만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영주님. 그…… 하룬빌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하룬빌? 또 무슨 일이랍니까?”
자리를 비운 동안에 발생한 영지의 일들에 대해 살펴본 칼릭스는, 특별히 나서야 할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다시금 대수림으로 향하기 위한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한데 영지를 방문한 외부인들이 있다는 닐슨의 말에, 간단한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출발하려던 일정을 잠시 미뤄야만 했다.
“아마도 혼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분명 거절하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보냈지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엔 도착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서신과는 별개로 저를 만나려고 애초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단 소리인데.”
“흐허허! 거 하룬빌가에서 꽤나 애가 탄 모양이구먼. 하긴 어느 가문이든 안 그렇겠는가? 나도 손녀딸이 있었다면 자네랑 이어주려고 꽤나 머리를 굴렸을 걸세.”
“편지까지는 상관없지만 이렇게 찾아와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건 질색입니다. 다른 가문들도 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는데요.”
옆에서 껄껄거리는 알론드의 모습에, 칼릭스는 머쓱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하룬빌에서 저렇게 나온 것은 좀 의외이긴 하군. 자네가 그 음흉한 치들하고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마찰이 있긴 했었지요. 아무튼 찾아온 손님을 마냥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시 만나보긴 해야겠습니다.”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닐슨이 옆으로 따라붙으며 방문자들의 신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단은 응접실로 안내해두었습니다. 사용인들을 제외한 하룬빌가의 인원은 테슬리라는 자와 시엘라란 이름의 여성, 그렇게 두 사람입니다.”
‘테슬리? 지난번에 봤던 그 마스터로군. 데이먼 후작의 숙부라던가.’
가주인 데이먼 후작 다음가는 실세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나선 것을 보면, 하룬빌가에서 이번 일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혼담을 논하고자 찾아왔다지만 여성 쪽에는 어차피 별 관심이 없기에, 칼릭스가 동행한 마스터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알론드가 이마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을 잡으며,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엘라…… 시엘라 하룬빌?…… 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같은데.”
“음? 혹시 제가 알아둬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칼릭스의 물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민하던 알론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기억으로는 한 칠, 팔 년? 그 정도쯤 전에 하룬빌가에 엄청난 천재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네. 아마 그때 들은 이름이 시엘라였던 것 같긴 하네만.”
“그렇습니까?”
“한데 최근에는 전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긴 하군. 저 하룬빌가에서 그런 소문이 날 정도면, 분명 상당한 무재이긴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던 알론드는, 곧 칼릭스의 얼굴을 보고는 실소를 흐리며 말을 이었다.
“하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봐야 자네에겐 미치지 못할 테니, 놀랄 일도 아니겠다만.”
“이런. 또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잖나. 아무튼 생각나는 건 그 정도가 전부일세.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데 내가 괜히 발길을 잡은 것 같구먼.”
“아닙니다. 그럼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칼릭스는 알론드를 남겨두고 자신을 찾아온 하룬빌가의 일원들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곧 응접실로 들어선 그의 눈에, 소파에 앉아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차려진 다과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고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두 사람이, 칼릭스가 들어서자 그에게 시선을 보내며 인사를 보내왔다.
“칼릭스 백작. 그간 별고 없으셨소?”
“예. 이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허허,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구려.”
“아닙니다. 한데 어쩐 일로 이리 급하게 찾아오신 건지?”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테슬리 쪽이었기에, 칼릭스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었다.
곧이어 테슬리의 입에서 혼인에 관한 용건이 흘러나왔다.
뻔한 소리이긴 했지만 하룬빌가와 혈연으로 맺어진 돈독한 동맹관계가, 마이언가에 어떤 득이 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귀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은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는지라, 이에 대해 계속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 듯합니다.”
“허어. 가문의 후사를 생각해서라도 가정을 어서 이루셔야 하지 않겠소?”
“걱정은 감사하지만 저도 나름의 계획이 있는지라, 일단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먼저 해결하고 싶군요.”
테슬리는 입맛을 다시며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완곡한 거절의 의사에 결국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럼 아쉽지만 혼인에 대한 제의는 이쯤에서 접어두도록 하겠소. 한데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가문을 대표하여 백작께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소이까?”
“음? 말씀해 보십시오.”
이야기는 끝났지만, 체면치레를 위해 하루 정도는 영주관에 이들을 머무르게 하며 대접을 하려던 칼릭스는, 가문의 대표를 운운하는 테슬리의 말에 다른 용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시엘라는 우리 하룬빌가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지닌 기사라오. 다만 아직까진 가문 바깥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참에 백작께서 이 아이에게 조금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구려.”
테슬리의 말에, 칼릭스는 방금까지 자신과 혼담이 대상이 되고 있었던 여성에게로 천천히 눈길을 옮겼다.
귀족 여성치고는 묘하게 푸석푸석해 보이는 흑발을,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늘씬한 체형의 여성.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 점의 감정이 서리지 않은 눈빛으로, 시엘라 하룬빌은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