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69화
대수림 심처
“칼릭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사이몬 공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군요.”
“하하,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마법이 부여된 장비의 필요성을 느낀 칼릭스는, 자신과 유일하게 인연이 있던 마도학파인 트리우드에 연락을 취했었다.
백작령쯤 되니 통신마법장치도 국가에서 설치해 주었었기에, 예전처럼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를 보내는 등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몬스터 부산물 및 약재들의 채집과 보관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한 상담을 했었는데, 나름 중요한 고객으로 대우받기 때문인지 학파장인 사이몬이 직접 영지를 방문해주었다.
그와 간단한 인사 및 잡담을 나누던 칼릭스는, 이내 시간을 끌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수림 안쪽을 탐험하시겠다니, 저희로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음. 일단 저희가 보유한 마법스크롤 중, 탐험과 전투에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대량으로 넘겨드리겠습니다. 비용은 나중에 부산물을 처분하실 때 원가로 셈해서 같이 계산하도록 하지요. 사용하지 않은 스크롤은 값을 치를 필요 없이 그때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가격이 상당한 상품들일 텐데.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순하게 힘세고 몸이 날랜 몬스터만 서식하는 장소였다면, 대수림의 심처가 마경이란 말로 표현되진 않을 것이다.
강대한 몬스터들 중에는 태생적으로 마법능력을 타고나는 종류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오우거조차 단칼에 찔러 죽이는 칼릭스라 해도 이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예기치 못한 낭패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말씀하신 물품의 보관수단에 대해선, 상태보존마법이 걸린 아공간 배낭이면 해결될 것 같군요. 지금은 작고하신 제 스승님께서 말년에 제작하신 아티팩트가, 다행히 소량이나마 보관 중에 있습니다.”
트리우드 학파는 주로 아티팩트의 제작과 유통을 통해 국내에 세를 넓힌 마법사단체다.
알펜시아 왕국 마법물품 시장의 점유율 절반 이상을 쥐고 있는 대형세력답게, 그들은 칼릭스가 요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간계 마법을 부여하는 공정은 일회성조차도 상당한 고난이도이기에, 이런 영구적인 아티팩트는 억만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운 물품이지요.”
“……흐음.”
말도 못 하게 비싸다는 이야기이기에, 칼릭스의 얼굴에 살짝 곤란함이 깃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완전한 소유권을 원하신다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칼릭스 님께서는 대수림에서 활동하시는 동안 필요하다고 하셨으니, 몇 가지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이 역시 대여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부탁이라 하시면?”
“일단 취득하시는 부산물들을 저희 외에 다른 곳을 통해 판매하지는 말아주셔야 합니다.”
“독점거래라.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다른 자리였다면 까다로운 논의가 오갔을 조건이지만, 칼릭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어차피 대수림에서 얻게 될 부산물들을 번잡하게 여러 곳을 거쳐 판매할 이유도 없었고, 트리우드 학파에서 자신을 상대로 가격을 후려칠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이 힘없는 귀족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마스터급의 무인쯤 되면 어지간한 수작질은 자동으로 걸러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수림에서 활동하시는 동안 얻는 내부정보들을 가능하면 모두 저희에게 공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칼릭스를 보며 사이몬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칼릭스가 고작 외곽부에서 깔짝거리려고 이런 준비를 하는 건 아닐 테니, 분명 대수림의 심처를 돌아다닐 생각일 터인데.
최소 마스터급의 강자여야 활동이 가능한 대수림 심처에 대한 정보라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상당한 가치를 지녔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우리 학파가 그간 서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잘하면 이 기회에 시장점유율을 더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서부의 대수림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 부산물이 공급되는 장소 중 하나다.
그렇지만 서부군 고위층 인맥은 하룬빌가의 파벌이 단단히 잡고 있고, 대부분의 거래는 그쪽에 연줄을 대고 있는 다른 마도학파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트리우드 학파는 그간 서부지방에서만큼은 국내 최대의 세력규모를 다툰다는 명성과 달리, 유의미한 거래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인연이 있던 칼릭스가 변경백으로 부임하고, 본인 스스로가 직접 대수림의 심처에 들어가 상품을 공급해 주겠다고 하니.
학파장인 사이몬의 입장에선 가능한 지원은 모두 밀어주는 것이 서로에게 윈윈이라고 여겨졌다.
만약 칼릭스에게 문제가 생겨 대여해준 물품들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학파장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되겠지만.
저 젊은 천재기사가 그리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산물의 채취에 대해선, 아쉽게도 아직은 완전히 자동화가 가능한 마법이 없습니다. 박피와 발골을 보조하는 분해술식이 몇 종류 있긴 한데, 이런 건 몬스터의 종류와 크기 및 사체의 훼손 상태에 따라서 시전자가 그때그때 수치를 조절을 해야 하는 방식인지라.”
“그렇습니까? 일일이 직접 손을 대야 한다면 작업이 너무 번거로워지겠는데…….”
“아! 그래도 피를 급속으로 뽑아내는 채혈 장비는 존재하니, 이 역시도 함께 내어드리지요. 몬스터의 피는 촉매제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이니, 부산물 회수에 시간을 들이기 곤란한 상황에는 그것만 사용해도 손해는 없을 겁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아공간 배낭과 채혈 장비, 두 세트씩 준비해 주십시오.”
칼릭스의 말에 사이몬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어…… 용량은 충분히 넉넉한 물품들이라 둘씩이나 필요하진 않으실 겁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제법 귀한 아티팩트라, 단순히 예비용으로 더 지급하기는 저로서도 조금 곤란합니다.”
“아니오. 예비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혼자 가는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예? 아무리 칼릭스 님이라도 그런 위험한 장소에서 누굴 보호하며 활동하시기는…… 아아! 혹시?”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질문을 한 사이몬은, 이내 웃음을 흘리며 칼릭스의 요구대로 아티팩트의 추가 지급을 승인했다.
그가 떠올린 바가 맞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 * *
“이렇게 금방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할 일도 거의 없는데 북부에 계속 남아 있어 봐야 뭐하겠나? 차라리 자네를 쫓아다니는 게 내겐 더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네.”
당분간 자신의 영지에 몸을 의탁하고 싶다며 찾아온 알론드를 향해, 칼릭스는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위험한 여행을 떠나려는 차에 타이밍 좋게 마스터급의 인력이 품에 들어왔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저와 함께 밥값이나 하러 가시지요. 말씀드렸다시피 대수림에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수련을 하면서, 겸사겸사 수익도 내보려던 참이라.”
“크흠. 이 늙은이를 굴릴 생각으로 가득하구먼.”
“하핫, 아닙니다.”
“괜찮네. 죽기 전에 염원하던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안락하게만 지낼 생각은 포기해야지.”
알론드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옆에 두고 트리우드 학파를 통해 필요한 준비도 갖춘 칼릭스는, 그와 함께 대수림의 심처를 탐험하기 위해 지체 없이 여정에 올랐다.
대수림까지 향하는 길이 짧지는 않기에, 두 사람은 그동안에 밀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몇 달 보지 못한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구먼. 하룬빌이라…… 무인으로서는 존중할 만한 자들이지만, 알고 보면 꽤나 음흉한 구석들이 있는 가문이지.”
“제가 아직 귀족세력 간의 관계에 대해 밝지 못합니다만, 알론드 님은 하룬빌가와 가깝지는 않으신 모양이군요.”
“으응? 아, 나는 딱히 파벌이랄 게 없는 사람일세. 평생 검술 외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으니, 괴팍한 노인네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겠군.”
“기사가 검술에 매진하는 것을 어찌 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껄껄! 그렇긴 하지?”
칼릭스의 말을 들은 알론드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파벌이니 뭐니 하며 서로 물고 빨거나 드잡이질하는 걸 보면 그만큼 꼴불견이 따로 없더군.”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 사람은 그렇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초인들만이,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평생을 꿈꿔오던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대해서 떠올리는지 잠시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알론드가, 이내 상념에서 깨어나며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자네 제자들도 참 많이 컸더군. 특히 이플리트가의 그 청년은 북부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던데.”
“다들 재능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성장이 말이나 되는가? 진짜 천재는 제자를 키우는 속도마저도 상식을 벗어난다고 해야 할지. 자네를 만나고 내가 알던 지식과 경험들이, 참 여러모로 많이 붕괴되는 중일세.”
“하하…….”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툴툴거리는 알론드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인 칼릭스는, 자신을 따라오고 싶어 끙끙거리던 제자들이 생각나 한 번 더 실소를 흘렸다.
이번 여로에는 아카데미 삼인방은 물론이고, 호위를 자처하며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려 하던 아이반 또한 함께할 수 없었다.
대수림의 심처는 마스터인 그조차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니. 제자들을 데려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1구역에서 2구역으로 이어지는 오크 군락지 정도라면 녀석들에게도 괜찮은 훈련장소가 될 텐데.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애매하니.’
아직 경험이 부족한 기사인 제자들과 훈련이 부족한 영지군을 대수림에 밀어 넣는 것은 시기상조다.
칼릭스가 마냥 하나하나 전부 돌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언젠가는 저들끼리 위험을 감수하고 실전에 뛰어들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사고의 가능성을 줄여두려면 그에 맞는 준비단계가 필요한 법이다.
‘일단은 7군단에 지속적으로 1구역 내에서 군사훈련을 하도록 지시해 두었으니, 나와 알론드 님이 심처를 돌고 나오면 상황이 또 달라지긴 하겠지.’
대수림의 자세한 지형정보에 대해선 여러 학자들의 갑론을박만 많을 뿐 정확히 파악된 것이 없었지만, 일단 예상되는 전체 면적이 어지간한 나라 하나의 국토와 비교될 정도라는 건 확실하다.
그 거대한 밀림을 외곽부에서 3구역 너머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그 안에서 또 한동안 활동할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여정은 가뿐히 한두 달 정도는 지나갈 터.
그때쯤이면 7군단도 부족한 실전경험을 적당히 채웠을 것이고 오크 군락에 대한 통제도 어느 정도 가능해질 테니, 상황을 봐서 제자들과 영지군을 토벌작전에 합류시키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저쪽이 자네가 말한 7군단의 전방초소인 모양이구먼.”
“아, 맞습니다. 거의 다 도착했군요.”
본인이 맡은 일들에 대한 미래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칼릭스는, 알론드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제 슬슬 자잘한 일들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야성을 일깨운 채 검 한 자루에 몸을 맡기고 날뛸 시간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마스터는 그렇게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는 드넓은 정글의 생태계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