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67화
평온한 나날이 반복되어 흘러가던 어느 날, 칼릭스는 생각했다.
이제 슬슬 영지의 관리에서 손을 떼도 될 것 같다고.
그가 보기에 영지의 운영 체계는 이제 상당 부분 안정화가 되었다.
대리인 닐슨과 각 도시의 현장에서 실무를 처리하고 있는 행정관들은,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잘 돌아간다 싶으면 문제가 없는 거겠지.’
대행 권한을 맡긴 닐슨이 일에 익숙해지며 대부분의 사무처리를 떠맡게 되어, 사실상 칼릭스가 영주관에 머무르지 않아도 운영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속성으로 훈련시킨 영지군은 약간의 잡음은 있을지언정 큰 탈을 일으키진 않았고, 수는 아직 적지만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영지 내 치안 수준도 점차 나아지고 있는 상태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새싹들은 순조롭게 성장 중이고, 난데없이 교관 노릇을 하게 된 제자 삼인방은 당황해하긴 했지만 금세 스승의 흉내를 내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도 되겠어.’
귀족의 힘은 영지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의 영지를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칼릭스는 다른 귀족들처럼 대규모의 사업을 구상하거나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기사이자 무인이었고, 귀족의 작위와 영주의 권한은 명예를 드높이는 과정에서 생긴 부수적인 결과물에 불과했다.
솔직히 영지는 그냥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굴러가면 그만이었다.
‘몇 달을 쉬다시피 했으니 실전 감각이 꽤 떨어졌겠군. 슬슬 영지 운영은 닐슨 선배에게 완전히 맡기고, 대수림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러 가도 될 것 같은데.’
원래부터 칼릭스가 이곳 변경의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던 것에는,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대수림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크게 한몫했었다.
수시로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는 변방지대는 남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위험한 땅이었지만, 그는 언제든 원할 때 실전적인 훈련을 행할 수 있는 좋은 수련장소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참에 말로만 듣던 대수림의 심처가 어떤 곳인지 구경해 봐야겠어.’
교관 시절에 생도들의 교육을 위해 대수림을 몇 번 찾아가곤 했었지만, 그때는 군부대들의 경계선 인근의 외곽지역에 잠시 머무르다 갔을 뿐.
몬스터들의 서식지 안으로 진입해 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대수림의 최심부는 극도로 위험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기에, 마스터급의 강자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마경이라고 들었다.
과연 그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매우 궁금했다.
“영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칼릭스가 영지를 탈출(?)할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대행을 맡긴 닐슨으로부터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듯한 보고가 들어왔다.
“7군단에서 저희 도시에 요청한 보급물자에 대한 건입니다만. 지난달과 그 이전 달에 대비해서 물량이 네 배는 차이가 나는지라…….”
“네 배?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일단은 매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군단 합동 토벌작전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다만 예비부대인 7군단이 몬스터 토벌을 주도하는 역할도 아닐 진데, 이 정도의 물량을 소모한다는 게 조금 의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왕국군 7군단은 현재는 마이언 변경백령인 이곳 영토의 방위를 기존에 담당하고 있던 곳으로, 대수림과 가까운 국경지대를 지키는 2선 부대에 속한 군단이다.
알펜시아 왕국령을 기준으로 대수림에 맞닿은 서부지대는, 1선 부대로 배치된 4군단과 5군단이 실질적인 통제를 책임지고 있으며.
약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북서지방과 남서지방에는 6군단과 7군단이 각각 2선 부대로 배치되어, 위급 시에 1선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흐음…… 매년 시행하는 작전이라면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요.”
“기록상으로는 항상 이 정도 물량이 빠져나갔던 것으로 되어 있긴 합니다만, 솔직히 납득이 가질 않아서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군요.”
칼릭스와 닐슨은 둘 다 왕국군에 몸담은 경력이 있는 기사들이다.
군부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직접 경험해본 사람들이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입장에 있던 만큼, 소모되는 물자가 어느 정도인지 셈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부대마다 사정이 다르니 아주 정확히 파악할 순 없겠지만, 대략적인 수치를 역산할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군단에서 영지의 지원을 과하게 등쳐먹고 있었나 봅니다.”
“아니면 기존의 관료들이 한통속이 되어 알면서도 눈감아준 걸지도 모르겠군요.”
“쯧. 이건 확실히 현장에서의 실사가 필요하겠네요. 사실 매달 요청하는 보급품목도 조금 과한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변방의 영지들은 국경을 수호하는 군대를 지원할 의무를 지며, 그 대신 세금감면을 비롯해 국가로부터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나름대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인 것.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이건 군부의 윗선에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기생충 짓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이 땅이 왕실령으로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는 자기들끼리 얼마를 받아먹든 상관이 없었지만, 영지의 주인이 바뀐 지금에 와서까지 장난질을 쳐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과도한 보급요청도 문제이긴 했지만, 그런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면서 7군단 측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는 것도 괘씸했다.
변경백령 인근의 군사작전에 대한 최종적인 승인 권한은 영주인 칼릭스에게 있다.
영지의 보급지원을 받는다 해서 7군단이 칼릭스의 사병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이 땅을 통치하는 주인으로서 영토 내에 주둔한 부대의 군사적인 행동에 관여할 권한이 있었다.
‘영지의 지배체제가 바뀌며 혼란스러웠던 와중이라 가만히 두고 있었더니, 은근슬쩍 이쪽을 배제하고 움직이려고 했단 말이지?’
이전까지는 자신도 내실을 다지기 바빴기에 인근 부대의 일까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대로 기강을 확립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수림에 진입하기 전에 7군단을 한번 방문할 생각이었던 칼릭스는, 이참에 제대로 얼굴도장을 찍어놔야겠다고 생각하며 한달음에 군단 주둔지를 향해 날아갔다.
* * *
“설명을 해보시오.”
“아니, 그게…….”
난데없이 들이닥친 칼릭스를 맞이한 7군단장 피그만 자작은, 자신을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에 입이 굳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이전까지는 항상 따로 승인받을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던 작전인지라, 나 역시 영주께 미처 승인을 요청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소.”
“체계가 바뀌면서 생긴 사소한 실수였다? 변경백의 권한을 일부러 무시하려던 건 아니라는 말이군?”
“무, 물론이오. 그렇지 않아도 내 언제쯤 면담 자리를 마련해야 하나 고민하던 터인데, 영주께서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다 들어서…….”
“좋소.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깊게 따지지 않고 한발 물러나는 칼릭스의 모습에, 7군단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문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말이 군단통합작전이지, 계획 일정대로라면 7군단은 위수지역을 크게 벗어나는 것도 아니더군. 평상시에 운영하는 순찰대의 경계 코스를 그대로 따라 행군하는 게 전부잖소? 추가 보급물자를 요청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건 그렇지만…… 순찰대 같은 소규모 병력이 드나들 때와는 달리, 군단 단위의 병력들이 움직이다 보면 몬스터들을 자극해 필히 전투가 발생하기 마련인지라-”
“누가 들으면 7군단 혼자 대수림 심처까지 토벌을 나서는 줄 알겠군. 1선 부대도 외곽부에 주로 머물 뿐 그리 깊게 진입하진 않는 모양이던데, 그 주변 몬스터라고 해봤자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것들이 대부분 아니오?”
“그, 그렇긴 하지만, 군대는 언제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법이오. 심처의 몬스터가 외부로 흘러나오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비상사태라는 게 매년 항상 일어났소? 장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추가물자를 반납하거나 비축분으로 남겨뒀다는 이야기는 어째 찾아볼 수가 없던데.”
“으음…….”
“기록에는 보급품을 전부 소모한 걸로 되어 있는데, 멀쩡한 물자들까지 매번 전부 폐기한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질 않소만?”
할 말이 없어진 7군단장은 땀을 뻘뻘 흘리기만 할 뿐, 칼릭스의 추궁에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가늘게 뜬 칼릭스가 날카로운 어조로 질문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내 왕실에 보고를 올려도 되겠소? 7군단 지휘부에서 군수물자를 횡령해 부정 축재를 벌이고 있다고 말이오.”
“그, 그런! 당치도 않소이다!”
“그럼 그리 주둥이를 다물고 있을 게 아니라,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게 아닌가!”
담담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던 칼릭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서슬 퍼런 기세로 외치자, 흠칫 놀란 7군단장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인이 소유한 작위와는 별개로, 왕국군 군단장에 자리한 고위 장교는 백작급 귀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7군단장은 차마 칼릭스의 앞에서 대등한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7군단장이, 이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유 물자의 대부분은…… 1선 부대로 전달되었소. 관례가 그렇다 보니…….”
“그게 무슨 소리지?”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에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2선 부대에 지원받는 물자가 어째서 1선 부대로 넘어간단 말인가?
이윽고 7군단장이 군부의 사정에 대해 털어놓으며, 칼릭스는 자신이 변경백에 봉해지기 전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또 하룬빌의 이름이 나오다니. 묘하게 자꾸 부딪치는 느낌이군.’
칼릭스가 왕국 남서부의 땅에 변경백으로 봉해졌듯이, 알펜시아 서부지대의 변경에는 오래전부터 하룬빌 가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애초에 무가로 유명해진 하룬빌가는 군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마침 서부지역의 변경이 그들의 영토이기도 하니.
그들은 대수림 인근에 배치된 서부군에도 자연스럽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4군단과 5군단의 고위층은 전부 하룬빌 후작가의 파벌에 속한 사람들이라 봐야 하오. 사실상 1선 부대 전체가 거의 하룬빌가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그리고 7군단을 비롯한 2선 부대 역시, 하룬빌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말이군.”
“……그렇소. 솔직히 서부군은 거의 다 하룬빌가의 파벌이라고 봐야하니, 무언가 요청이 들어오면 이쪽에선 거부할 수가 없는 입장이오.”
원래는 하룬빌가에서 지원을 담당해야하는 1선 부대의 보급수요를, 2선 부대에서 공급받으며 부담을 줄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7군단장과 휘하 장교들이라고 해서 그동안의 과도한 보급요청을 통해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만, 일단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쪽은 1선 부대와 그 뒤에 있는 하룬빌 가문이란 소리.
칼릭스로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룬빌 가문이 끼어 있다면 섣불리 뒤집어엎을 수도 없겠군.’
잠시 고민해본 칼릭스는 이 건에 대해서 당장은 더 파고들지 않고 덮어두기로 마음을 정했다.
부정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하룬빌가가 연관되어 있다면 그로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 두기만 해야겠군. 잘못을 들춰가며 맞서기엔 저쪽의 세력이 너무 커.’
비록 성미에 맞는 대처는 아니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무작정 머리부터 들이대고 볼만큼, 칼릭스가 융통성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알펜시아 왕국에서 하룬빌가와 그들의 파벌과 충돌하고도 무사하려면, 쉬운 조건과 어려운 조건 둘 중 하나를 충족해야만 했다.
하나는 하룬빌가의 경쟁세력인 이플리트가의 파벌에 들어가는 것으로, 후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고 할 수 있는 조건.
아니면 귀족들의 연합세력조차 우습게 여길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힘을 일신에 갖추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인 어려운 조건이다.
‘그랜드 마스터. 그쯤은 되어야 고위귀족파벌 어느 쪽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매를 비튼 칼릭스가, 이내 상념을 지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피그만 자작. 군단통합작전의 시행 일자가 언제라고 했소?”
당장의 능력이 모자라 비리를 덮어두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저들의 행태에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을 생각까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