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65화
상황을 지켜보던 하룬빌가의 두 마스터도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누구보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칼릭스의 제자 삼인방과 대련을 이어가던 기사였다.
“으윽…….”
첫 번째 대련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엔 여유가 가득했었다.
최근에 익스퍼트의 벽을 돌파했던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자신감에 차 있는 시기였고.
아직 익스퍼트에 오르지도 못한 이들과의 대련 따위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어른들로부터 가능하면 최대한 승부를 길게 가져가라는 언질을 받았기에, 그는 베네트라는 첫 출전자를 전력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조금씩 빈틈을 보여주며 시간을 끌었다.
‘그냥 뭐, 평범한데?’
왕국의 새로운 마스터라는 칼릭스 백작의 소문은 그도 들었지만, 그의 제자라는 상대의 검술은 딱히 특별한 점이 느껴지진 않았다.
적어도 존경하는 가문의 마스터들이 굳이 살펴보며 연구할 가치가 있을 만큼, 위력적으로 보이는 검술은 아니었다.
‘두 분 어르신들이 이렇게 나설 정도로, 칼릭스 백작의 검술이 우리 하룬빌가에 비견될 만큼 위협적이라 들었는데. 생각보다 제자들에게는 가르침이 인색한 사람인가 보군.’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긴장감조차 느슨해져가던 하룬빌가의 기사는, 이어지는 두 번째 대련에서 화들짝 놀라며 풀어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뭐야? 스타일이 앞의 상대와는 전혀 다르잖아?’
한 방, 한 방의 타격에 힘을 쏟아붓는 정통파에 가까운 파워검술.
발놀림을 통해 간격을 조절하는 기술도 제법이었기에, 조금만 더 방심하고 있었다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이쪽이 진짜 칼릭스 백작의 검술인가 보지? 확실히 위력적이긴 하네.’
하룬빌가의 기사는 상대를 경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대전자의 검형을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시점에 승부가 결정되었고, 이어서 세 번째 상대가 그의 앞으로 나섰다.
‘어억!?’
앞서의 상대가 보인 검술에 완전히 적응한 채 대비를 하고 있던 그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공격을 가해오는 마지막 상대의 검술에 기겁하며 몸을 뒤틀어야 했다.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거리를 조절하며, 곡예를 보는듯한 변칙적인 투로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초.
미리 예측하고 있었어도 대응하기 까다로웠을 공격인데 완전히 허를 찔려 버리기까지 했기에.
그는 무너진 자세를 수습하기도 전에 몰아치는 검격에 밀려나며, 한순간에 상대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안 돼! 익스퍼트도 아닌 녀석에게 기사인 내가 지기라도 했다간…….’
하룬빌가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퇴출당하는 상상을 한 기사는, 이를 악물고 오러를 끌어올리며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수준 차이가 나는 상대와의 대련인 만큼 암묵적으로 오러소드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 눈총을 받더라도 차라리 지는 것보단 낫다.
까강!
희미한 빛을 발하며 오러가 흐르는 검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아즐린의 검과 부딪쳤다.
자세가 무너져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오러소드의 효력은 부족한 위력을 보충해 주기에 충분했다.
“칫.”
승리의 기회를 코앞에서 놓친 아즐린이 아쉬움에 혀를 차며 재빨리 검을 뒤로 물렸다.
오러소드를 발하는 상대와 검을 맞대고 있어 봤자, 밀려나는 것은 자신 쪽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 잠깐의 부딪힘만으로 검날이 상해 이가 빠질 정도니, 1초만 늦었어도 아즐린의 검은 부러졌을 것이었다.
쉬이익!
죽고 죽이는 실전도 아니었으니 대련은 그 상황에서 멈췄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하룬빌가의 기사는 반격을 그만두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아즐린을 향해 공격을 이어갔다.
“저런 머저리가!”
대전을 지켜보던 테슬리 하룬빌이 욕설을 내뱉었다.
곁에 있던 데이먼 후작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수준에 맞춰 어울려주는 대련에서 위기에 몰려 오러소드를 사용한 것도 추태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반격을 이어가는 것은 그나마 사과하고 물러날 여지까지 집어던지는 행동이었다.
사실 그 상황에서 가장 당황한 것은, 싸우고 있던 하룬빌가의 기사 본인이었다.
짧은 순간에 위력적인 검식을 연계해 필살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 하룬빌가 특유의 검술 스타일이다.
그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여유를 잃고 오러소드를 발하며 전력을 다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평소에 수련하던 대로 몸에 익은 가문의 검초를 최대로 펼치고 만 것이었다.
‘나도-’
볼품없이 바닥에 몸을 던져서라도 피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즐린을 물러나는 것을 멈추고 도리어 검을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납게 요동치는 검이 아즐린의 목 부근을 베어 들어가며,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이, 이런!”
깜짝 놀란 데이먼 후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고에 사고의 연속이다.
갑자기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간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실수를 한 마당에 칼릭스의 제자가 죽기라도 한다면, 칼릭스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도 보이는 걸로 판단한 것과는 다르게,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할 수 있어!’
암향표를 펼치며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검세 안으로 파고든 아즐린이, 오러로 빛나는 검을 휘둘러 상대의 일격을 차단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애써도 제대로 된 형상이 만들어지질 않고 뚝뚝 끊어지던 오러소드가, 생사를 가르는 경계에서 극도로 발휘된 집중력 덕분에 막힘없이 흘러나오며 연한 홍색의 빛을 뿌렸다.
까가각!
오러를 품은 검들이 서로 부딪히며 두 사람의 신형이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힘겨루기도 아주 잠시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하늘거리는 동작으로 상대의 검격을 흘려낸 아즐린이, 당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상대의 목 앞에 검을 들이대며 마지막을 결정지었다.
“아…… 져, 졌소.”
“후우, 좋은 승부였습니다.”
대련을 지켜보던 하룬빌가 사람들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실수를 하며 추태를 벌인 것도 모자라 아예 지기까지 했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질 나쁜 장난에 휘말린 기분이군. 백작의 검술을 연구하려던 당초의 목적은 이루지도 못했고, 괜히 꼴불견인 모습이나 보이다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데이먼 후작은, 칼릭스에게로 다가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오, 칼릭스 백작. 우리 측 기사가 부끄러운 실수를 저질렀구려.”
“으음…….”
팔짱을 끼고 불쾌하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고 있던 칼릭스가, 후작의 사과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빌가의 기사가 오러소드를 발할 때만 해도 개입할 생각으로 신법을 펼치려 했었으나, 아즐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발을 멈춘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러의 수준이 달라졌군. 이제 명확하게 익스퍼트의 수준에 접어들며 안정화가 이루어졌어.’
그렇지 않아도 아즐린은 경지의 벽을 허물기 직전이었던 상태였는데, 방금의 대련이 마지막 주춧돌을 치워내는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아즐린이었기에, 칼릭스는 데이먼 후작의 사과에 크게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였다.
여기서 길길이 날뛰며 하룬빌가에 더 수모를 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귀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며 가문과 영지를 일구느라 바쁜 마당에, 왕국의 실세 중 하나인 하룬빌가와 척을 지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다.
‘다만 조금 전의 일은 저쪽의 잘못이 확실하니, 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줄 수만은 없지.’
칼릭스는 후작의 사과를 받으면서도 일부러 계속해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결국 그에게서 가문에 돌아가는 대로 적절한 성의 표시를 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 문제는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지요.”
“고, 고맙네. 음. 한데 말일세, 크흠…….”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약간의 불상사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조금 아쉽지 않은가.”
“으흠? 혹시 저보고도 대련에 나서라는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그럼 적어도 왕실에 권고에 따른 안전조치를 준비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 물론 그런 말은 아닐세. 아직 나서지 않은 제자가 한 명 더 있지 않냐는 뜻이었네만.”
데이먼 후작의 말에 칼릭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칼릭스보다 조금 뒤편에 시립해 있던 아이반이, 시린 안광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저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음. 이플리트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칼릭스 백작의 기사이면서 그에게 검술도 배우고 있다지?”
“예. 가문의 연공법은 제게 맞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렇군. 혹시 자네도 우리 하룬빌가와 검술을 겨뤄볼 생각이 있는가?”
“주군께서 허락하신다면…….”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생각에, 데이먼 후작은 아이반을 판에 끌어들이려 했다.
‘다른 어린 제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플리트가의 직계가 가문을 포기하고 따라올 정도라면, 분명 칼릭스 백작에게 비전을 일부라도 물려받았을 것이다.’
데이먼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눈치 채고 있던 칼릭스는, 속에서 일어나는 웃음기를 억누르며 아이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쁘지 않은 기회이니 한번 경험해 보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대련이 성사되자, 칼릭스가 익스퍼트 상급 수준으로 판별했었던 하룬빌가의 기사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거의 중급에서 상급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는 아이반에게, 실력을 겨루기에 딱 적당한 상대였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며 두 대전자들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허, 허어.”
“……이제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는군.”
열기를 다루는 이플리트가의 플레임 오러에 대해서, 하룬빌가의 인물들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경쟁 관계에 있는 가문이니 당연한 일.
데이먼 후작은 아이반에게서 이플리트가 기사들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번에야말로 그에게서 칼릭스의 검술을 찾아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그런 예상을 비웃듯이 또다시 완전히 다른 검술이 펼쳐졌으니.
옆에서 턱수염을 잡아 비틀며 신음을 흘리는 숙부처럼, 그 역시 할 말을 잃고 허탈한 얼굴이 되어야 했다.
‘냉기를 다루는 오러라니, 플레임 오러 대신 프로즌 오러라고 불러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군. 저것도 칼릭스 백작이 가르친 거라고?’
데이먼 후작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칼릭스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여러 종의 검술을 다룰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물론 그가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오러의 수준은 상대가 한 수 윗줄이었지만, 속성을 다루는 특이성 덕분에 대련 상황은 팽팽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반이 내뿜는 오러에 담긴 냉기는 상대의 몸을 얼리며 감각과 반응속도를 둔하게 만들었고, 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 상대는 생소한 아이반의 검술에 동수를 이루기도 급급했다.
“제기랄…… 이플리트가의 기술만큼이나 지랄 맞은 게 또 있다니…….”
팽팽한 싸움 끝에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맺음 되었다.
검에 서린 성에를 굼떠진 손으로 더듬거리며 닦아낸 상대가,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덕분에 제자들이 값진 경험을 했군요. 감사합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괜히 창피만 당하고 돌아가게 생긴 데이먼 후작이, 입가가 부들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칼릭스와 눈을 마주쳤다.
“……제자들이 하나같이 뛰어나군. 물론 저들을 키워낸 칼릭스 백작이야말로 대단한 것이겠지만.”
“하하, 과찬이십니다.”
속마음을 드러내며 캐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건 너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기에, 데이먼 후작은 결국 이쯤에서 그만하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백작에게 신세를 지고 가네.”
“더 머물다 가셔도 되는데, 아쉽군요.”
“……아닐세.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더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하룬빌가의 사람들은 칼릭스의 성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뒤를 돌아본 데이먼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릭스 마이언.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인물이군.”
“난데없이 새로운 마스터가 출현한 것도 곤란한데, 아무래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물론이오. 어쩌면 우리의 대계에 큰 변수가 될 수도…….”
“숙부님! 바깥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아, 이런! 조심하겠소, 가주.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보니.”
잠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은 하룬빌가의 두 마스터는,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식솔들을 이끌며 칼릭스의 영지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