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63화
‘왕국제일검도 이 정도인가.’
데이먼 후작과 즐긴 잠깐의 놀이에 대해 생각하던 칼릭스는, 뿌듯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왕국 최강의 기사를 상대로 거의 완벽하게 동수를 이루었다.
어디까지나 제한을 둔 놀이였을 뿐이니 실전과는 조금 다르기야 하겠지만.
상대나 자신이나 전력을 다 드러내지 않은 건 마찬가지이니, 제대로 붙어본다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 같기는 했다.
‘내가 확실히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되긴 했군.’
무림인들의 기억이라는 기연을 얻은 지 이제 일 년을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다.
하물며 그중 절반가량은 오러하트의 부상을 치료하는 데 보낸 시간이었다.
한데 벌써부터 자국 기사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데이먼 후작과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으니.
본인에게 생겨난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새삼스럽지만 다시금 자각할 수가 있었다.
‘예전에는 마스터의 경지만 해도 평생의 목표라 생각하며 검을 수련해 왔었는데. 이제는 이마저도 머지않아 벗어던지게 될 껍데기에 불과할 뿐인가.’
미묘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이제 더는 자신과 같은 마스터들과 검을 겨룬다 해도, 이전처럼 가슴이 뛰는 느낌을 받긴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기에.
배부른 소리이긴 하지만 너무 빠르게 성장한 부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펜시아 왕국에 그랜드 마스터가 없다는 게 아쉽군. 그런 존재가 가까이에 하나라도 있어야, 나도 계속 자극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늘 위의 하늘이라 일컫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존재는, 이 드넓은 대륙을 전부 뒤져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라도 알펜시아에 소속되어 있다면, 언제든 찾아가 최상승의 경지를 이루기 위한 열정을 보충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이 칼릭스는 못내 아쉬웠다.
문득 자신이 평생을 속해 있던 이 왕국이, 의외로 비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막 작위와 영토가 생겼는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이 들다니.’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의 상념을 흩어버렸다.
비록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며 살아 있는 배움을 얻게 해줄 상대가 주변에 없을지라도.
위대한 무인들의 경험을 따르며 무공을 계속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전설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때가 되면 대륙을 유랑하며 타국의 그랜드 마스터들을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만, 지금은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아무튼 더 이상 수도에는 볼일이 없으니, 슬슬 내 영지가 어떤 곳인지나 보러 가야겠는데.’
생각을 마친 칼릭스는 제자들을 남겨둔 숙소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된 남서부의 변방에 위치한 영지까지 이동하려면, 마차를 타고도 꽤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될 것이었다.
* * *
이제는 마이언 백작령이란 이름이 되어 자신이 다스려야 할 영지에 도착한 칼릭스는,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영지의 운영에 대해선 가진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다시피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동안 왕실에서 파견한 행정관들과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의 협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그의 영지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며 적지 않은 문제들과 함께 몸살을 겪어야만 했다.
‘영지를 제대로 돌본다는 게 생각보다 더럽게 골치 아픈 일이군.’
사실 영지 일의 대부분은 행정관들의 선에서 처리되기 마련이기에, 영주가 직접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휘하의 관리들이 처리한 업무에 대해 보고를 받으며, 굵직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정도.
문제는 이 아랫사람들이 계속 그의 영지에 머물러 있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 이상 왕실령이 아니게 되었으니 파견을 나와 있던 영주대리 및 휘하의 여러 행정관리들은, 곧 이곳을 떠나 새로운 소속으로 발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나마 왕실에서도 배려를 해준다고 인수인계의 기간을 넉넉하게 잡아주긴 했지만.
자신의 사람이라고는 무공을 가르치는 4명의 제자가 전부인 칼릭스에게, 행정 쪽의 일을 이어받을 가신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진작 생각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내가 이런 쪽으로는 너무 서툴렀어.’
한참 성장하기도 바쁜 제자들에게 생뚱맞게 행정직 업무를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칼릭스는 혼자 영지의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빡빡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히 도움을 청할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칼릭스의 그런 어려운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하급관리로 써먹을 만한 사람들을 몇 명 보냈으니, 적당히 대우해주면서 마음껏 부려먹으시게.
그의 요청을 받은 이플리트 가문에서 행정직에 쓸 만한 인원들을 보내주며,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기의 대가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았군.’
아이반을 두고 도미닉 공작과 내기를 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도미닉 공작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에는 분위기도 조금 그랬고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대답을 미뤄두었는데.
마침 급하게 영지를 관리할 인원이 필요해 그쪽에 문의를 하며, 이렇게 필요한 인력을 수급받을 수 있었다.
백작령 전체를 커버할 만한 수의 행정관을 구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그쪽은 워낙 막강한 공작가문이다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행정 분야는 최소한의 틀은 잡힌 것 같으니, 천천히 배워가며 고칠 점이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고. 남은 건 군사 쪽의 문제인가.’
그나마 군사 방면에 대해선 당장은 크게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왕실의 행정관들과 다르게 인근 주둔지의 병력들은,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국경수비의 임무뿐 아니라 가까이 위치한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범람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는 병력인지라, 영지의 사정과는 별개로 그들은 계속 서부지대를 수호하기 위해 뭉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변경백령 인근의 모든 군사통제권은 사령관의 권한을 가진 변경백에게 있기에, 병력이 필요한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저들은 이 땅의 주인인 칼릭스의 지휘를 따라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부대가 위치한 서부지대에서 발생하는, 외부의 적대적 세력이나 몬스터의 침입 등의 문제에 대한 안건에 한해서일 뿐.
군부의 병력이 칼릭스에게 종속된 사병인 것은 아니기에, 아무 때에나 저들을 움직여 필요한 일에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왕실령일 때에는 영지의 치안이나 물자수송 같은 일에도 관여했다는 것 같지만, 이제는 국경의 방위 임무 외에는 나서지 않을 테니.’
당장은 무력을 사용해야 할 일들이 있진 않지만, 영주의 손발이 되어줄 사병조직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기에 칼릭스는 아직 북부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알론드에게로 서신을 보냈다.
혹시 북부군 병력 중에 자신의 영지민이 될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북부에 많은 인원을 배치하며 국력을 과투자 했었으나, 야만인들의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으니 북부군의 인원편제 역시 점진적으로 감축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그렇기도 하고 딱 반년을 머물렀을 뿐이지만 북부에서 칼릭스가 제법 이름을 날렸으니, 그의 제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란 계산이 들었다.
‘기사든 병사든 험지에서 생활하던 북부군의 정예들이라면, 영지군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들이지.’
하는 김에 아카데미에 있는 닐슨에게도 영입 제안을 담은 편지를 하나 보냈다.
같이 아카데미를 떠나 전공을 세우자는 이전의 제안은 그가 거절했었지만.
최전방과 달리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영지의 기사직에 대한 건이라면, 닐슨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실력은 평범할지라도 신뢰할 만한 인품을 가진 닐슨 선배라면, 내 영지에서 한 자리 내어주며 대우해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그런 식으로 칼릭스는 새로운 환경에 점차 적응해 가며, 한 사람의 영주로서 영지를 제대로 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영지에 온 뒤로 워낙 바쁘다 보니, 데리고 온 제자들에게까진 크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칼릭스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제자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발전을 이뤄가고 있었다.
* * *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몸 안의 오러에 집중하며 그대로 검을 향해 흐름을 조절해가던 아즐린이, 칼날에 희미하게 맺혔다가 금세 사라지는 오러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네.”
검에 오러를 덧씌워 절삭력과 강도를 극대화하는 오러소드의 기술.
그것은 기사가 되기 위한 기본조건이자, 익스퍼트급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목표로 삼았던 그 단계에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아즐린은, 될 듯 말 듯 하며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오러소드의 모습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검을 옆에 내려놓았다.
“야. 너는 그래도 거기까진 잘 되기라도 하지. 난 오러가 맺힐락 말락 하는 것도 열 번 시도하면 반은 실패하던데.”
무엇이 부족한 걸까 고민하고 있는 아즐린의 옆에서, 같은 처지의 동료인 베런이 딴에는 위로할 생각인지 말을 걸어왔다.
“휴! 너랑 아즐린이 수준이 다른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런 소리 들어봤자 더 짜증만 날걸?”
“뭐 임마? 아즐린은 가만히 있는데 왜 베네트 네가 뻐기고 난리야!”
“그야 나도 너보다 잘하고 있으니까? 난 그래도 열 번 시도하면 일고여덟 번은 오러가 맺히려고 하거든?”
“에이 씨…… 어차피 완성까지 못 가는 건 우리 셋 다 마찬가진데, 고작 조금 차이가지고 으스대기는.”
“네, 다음 3등.”
“와 나 진짜! 아카데미에선 계속 내가 더 우수했었는데!”
“따라잡힌 게 자랑은 아니죠? 억울하면 심법 수련에 더 정진하세요, 베런 생도.”
“열 받네 정말…….”
근처에서 함께 수련을 하다가 어느새 투덕거리기 시작한 베네트와 베런의 모습에, 아즐린은 풋 하고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검을 주워들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 오러소드의 기술 때문에 답답했는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전환이 되는 듯했다.
아즐린이 검을 들고 다시금 오러소드를 이루기 위해 집중하자, 잠시 말다툼을 하던 두 사람도 그녀를 따라 입을 다물고 수련을 재개했다.
원래라면 꾸준히 노력해도 2~3년 정도는 더 후에나 닿을 수 있는 경지인 익스퍼트급에, 아카데미 삼인방이 벌써부터 거의 도달하기 직전에 이르게 된 것은.
그들이 칼릭스가 만든 영약을 섭취하며, 오러의 수준에 큰 증진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동일한 성질의 기운을 두 번째로 흡수하며 더는 프로즌 만드라고라로 효능을 보기 어렵게 된 칼릭스는, 남은 한 뿌리의 프로즌 만드라고라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었다.
수도에 도착한 뒤로 왕실의 사람들을 통해 자잘한 재료들을 추가로 구입하여, 제자들을 위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영약을 제조한 것이다.
프로즌 만드라고라를 팔아서 거액의 돈으로 바꾼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키워주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처음 칼릭스가 복용했던 영약과는 다르게 냉기를 중화시켜, 빙령심결 같은 특수한 심법이 아니어도 내공의 증진 효과를 볼 수 있는 단환이 열 개가 만들어졌다.
열 개로 분할된 만큼 효능이 크게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했거나 익스퍼트 초입 수준의 오러 사용자라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약이었다.
칼릭스는 그중 세 개를 삼인방에게 복용시키며, 그들이 익스퍼트급에 오르기 위한 노력해야 할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주었다.
‘스승님 덕분에 기사가 되겠다는 꿈도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어.’
‘이런 식으로 오러를 늘릴 방법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저분의 능력은 대체 어디가 끝인 걸까?’
‘역시 스승님을 따르길 잘했어!’
특수한 체질 덕분에 칼릭스의 곁에서 기운을 나눠 먹으며 엄청난 성취를 이룬 아이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카데미 삼인방은, 오러의 수준만큼은 익스퍼트 초급에 해당하는 경지에 이른 상태다.
아직은 운용 능력이 부족해 오러소드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세 사람이 조만간 온전한 익스퍼트가 되리라는 것은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되면 삼인방은 칼릭스의 이름 아래에서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바쁘고 정신없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칼릭스와 연관된 모든 상황들이, 큰 탈 없이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외부인이 영지를 방문하며,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