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62화
하룬빌
“-이에 기사 칼릭스 마이언을 백작위에 봉하며, 알펜시아 왕국의 귀족이 되었음을 공표하는 바이다.”
아이반의 일로 도미닉 공작과는 조금 서먹서먹한 상태가 되었으나,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 작위 수여식의 날은 다가왔고.
얌전히 수도에 틀어박혀 지내던 칼릭스는 무사히 행사를 마치며, 마침내 알펜시아 왕국의 귀족명단에 적을 올린 고귀한 신분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반갑소이다. 본인은 추밀원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린체스트 후작-”
“건축자재와 곡물을 주로 취급하는 상회를 운영 중인데, 혹시 사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여기 계신 레이디는 대법원의 수석 재판관이신 플라노르 백작의 장녀로-”
작위 수여식이 끝나고 이어진 연회에서, 칼릭스는 자신과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 다가오는 귀족들의 접근에 진땀을 빼야만 했다.
‘어지럽군. 이름만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인데.’
대다수는 그저 인사 정도에서 그치고 물러났지만, 은근슬쩍 자신들의 파벌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의미의 권유를 넌지시 흘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정치판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귀족들과의 관계를 아예 무시할 수도 없기에, 칼릭스는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적당히 중립적인 태도로 그들을 상대했다.
‘후우, 검 대신 혓바닥을 놀리는 건 역시나 영 못 해먹을 짓이야.’
공식적으로 해야 할 일은 끝마쳤으니 이런 번잡한 행사 따윈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명목상 연회의 주인공인 그가 여러 권력자들이 모인 파티에 불참하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향한 관심들에 응대해줘야 했다.
한참 귀족들과 형식적인 인사 및 담소를 나누던 칼릭스가, 슬슬 자리를 비워도 결례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기세 하나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건……?’
한순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돌린 칼릭스의 시선에, 삭막한 인상의 한 중년인이 자신 쪽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걸려 들어왔다.
그가 일반인은 절로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기운을 흘리며 다가오는 탓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두 사람과의 거리를 두었다.
한눈에 그가 자신과 같은 경지의 무인임을 파악한 칼릭스가, 마음속에 작은 동요가 이는 것을 느끼며 상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데이먼 후작 각하.”
“초면인 것 같은데, 바로 날 알아보는군?”
사람이 아니라 한 자루 검을 보는 듯한 인상만큼이나 냉담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대꾸하는 그에게, 칼릭스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어찌 자국 내 최강의 검사를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기사 서임을 받기 전부터 후작 각하를 흠모해 왔습니다.”
데이먼 하룬빌.
이플리트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가인 하룬빌의 가주이자, 40대 초반의 나이에 알펜시아 최강의 기사라는 명예를 손에 넣은 인물.
일반적인 기사들에게 40줄의 나이란, 전성기가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며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하지만 마스터급의 오러 사용자에겐 이야기가 다르다.
대부분의 마스터들은 보통 40대의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를 이루게 된다.
수재니 천재니 소리를 듣는 기사들이라 해도 그렇게 전성기의 끝자락에서야,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담금질한 재능이 조화를 이루며 벽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
어차피 50대에 접어들면 급격한 육신의 노화 때문에 더 이상 실력증진이 불가능에 가까워지기에, 딱 40대의 나이가 마스터의 경지에 대한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스터가 되면 오러의 힘으로 육신의 노화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기에, 그들에게 40대는 더 이상 쇠퇴기가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물론 황혼기라 할 수 있는 5, 60대를 지나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경우의 예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데이먼 후작은 그 일반적인 예를 다른 방향으로 벗어난 인물이지.’
데이먼 하룬빌은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었다.
알펜시아 왕국은 물론이며 다른 수많은 국가들을 포함해서도 보기 드문 재능이었고, 대륙 최강의 무력을 자랑한다는 제국의 역사에서조차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의 현재 나이 47세.
검의 길을 걷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비범한 인재들만이, 간신히 마스터가 되니 마니하고 있을 시기에.
데이먼 하룬빌은 이미 한 국가를 대표하는 기사로 명성을 날리며, 왕국제일검이란 자리에 우뚝 올라서 있었다.
뭐 그건 자신의 등장으로 알펜시아 왕국 최연소 마스터라는 그의 기록은 깨지게 되었지만, 기사로서 동경해 마지않던 인물과의 만남에 칼릭스는 살짝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데이먼이 가진 최강이라는 호칭에는, 같은 마스터인 알론드나 도미닉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을 선사해 주는 효력이 있었다.
“그런가.”
그만한 위치에 있다 보면 공경을 받는 것은 일상이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데이먼 후작은, 이윽고 머리를 든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칭찬은 고맙지만 그런 것 치고는 조금 아쉽군. 이미 이플리트 가문과 가깝게 지내는 모양이던데. 이전, 그리고 얼마 전에도 도미닉 공작과 만났다지.”
“아, 그건…….”
원수지간까지는 아니지만 왕국 최고의 무가라는 명성을 놓고, 꽤나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가문의 사정을 모르는 이는 없다.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보이는 데이먼 후작의 태도에, 칼릭스는 잠시 고민하느라 말을 흐리다가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검을 수련하는 십대 소년의 시절부터 최연소 마스터인 데이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선망을 품어왔지만, 어디까지나 존경심은 존경심에 그칠 뿐 그게 굴복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그가 경쟁 가문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질책을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실 오해를 살만큼 가깝기만 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딱히 아주 가까운 건 아닙니다만. 그저 군부 쪽에 수속을 밟는 도중에 공작 각하께서 찾아오셨고, 어쩌다 보니 그분이 키우길 포기한 자제 하나를 제가 거두어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요.”
“호오?”
어떠한 감정도 없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하는 칼릭스의 모습에, 데이먼 후작의 딱딱한 얼굴에 살짝 흥미롭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대부분 기가 죽어 쩔쩔매는 태도를 보이는데, 눈앞의 젊은 백작에게선 전혀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스터는 마스터라는 건가. 과연 검을 들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사실 데이먼 후작은 칼릭스의 존재에 대해 이전부터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그가 아르거스의 무기점에서 남긴 흔적이, 하룬빌가의 본성에까지 전해지며 보고가 올라갔었기 때문.
-충격적인 검술이군요. 이런 검술을 사용하는 가문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거늘.
-아무래도 타국의 기사일 가능성이 크겠군. 한번 자세히 파헤쳐 보도록.
-알겠습니다.
하룬빌가의 사람들은 그들의 역량을 동원해 칼릭스의 행적을 좇았고, 결국 그가 수도에 들러 군부에 지원을 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며 칼릭스의 신상명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탐문은 딱 그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 마이언? 군부 쪽에서 새로운 마스터의 출현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을 듣긴 했는데, 하필 우리의 눈에 띈 이가 그와 동일인물이라니 기묘한 우연이군요.
-조금 수상한 이력이긴 한데…… 도미닉 공작이 직접 나섰고 따로 뒷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마스터란 정보는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런가. 으음, 하지만 곤란하게 되었군.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미리 만나보기라도 했을 텐데. 이미 북부군에 들어가 활동 중이라는 듯하니, 사사로이 연락을 취하기도 어려워졌군그래.
현 가주인 데이먼 후작을 비롯해 여러 혈족들과 휘하의 몇몇 수준 높은 기사들까지, 칼릭스가 남겼다는 놀라울 정도로 파괴적인 검술의 흔적에 큰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최전방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마스터급의 기사를 불러낼 수도 없거니와, 거기까지 우르르 몰려가 다짜고짜 검술을 보여 달라 청하기도 참 애매한 모양새였다.
‘어차피 때가 되면 작위를 받기 위해 다시 수도로 올 테니, 그때 만남을 청해 자리를 가져볼까 했거늘.’
그렇기에 하룬빌가에선 칼릭스와의 대면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바대로 그의 작위 수여식에 대한 이야기가 귀족가문들에 전해졌기에, 이렇게 가주인 데이먼이 직접 그 자리에 참석하며 칼릭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북부에서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지.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한참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긴 하겠군.’
별말 없이 칼릭스와 시선을 주고받던 데이먼 후작은, 이내 바로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서 나이프 두 개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파티의 분위기도 돋울 겸 가벼운 여흥 하나 즐겨보겠나?”
당장 칼릭스의 검술을 확인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데이먼 후작은 그에 앞서 간단한 맛보기를 먼저 즐겨보고자 했다.
그는 호탕하게 한판 붙어보자고 칼릭스에게 곧바로 요청해오던 도미닉 공작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인물이었다.
“간격에 제한을 두고 큰 부상이 나오지 않을 만한 선에서 짧게 부딪쳐 보지.”
“……좋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칼릭스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긴 해도 왕국제일검과 어울릴 기회를 굳이 차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두 사람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한 뼘 남짓한 식기를 무기 삼아 서로를 겨누었다.
연회장에 무기를 차고 올 이유가 없기에 검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말 그대로 여흥일 뿐이니 짧은 나이프로도 가볍게 즐기기는 충분했다.
다른 귀족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의 놀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칼릭스와 데이먼 후작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으로 된 무른 식기를 들었다 해도, 마스터들의 대결이니 박진감 넘치는 싸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관중들의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의 팔은 느릿한 동작을 보일 뿐, 이렇다 할 격돌의 전조를 드러내지 않고 지루한 움직임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검사가 아닌 평범한 귀족들의 눈에 그리 보였다는 것일 뿐.
실제로 두 사람은 수십 수백 번에 걸쳐 투로를 수정하며, 상대의 방어를 뚫고 급소를 찌르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을 벌여가고 있었다.
‘허…… 이자가 고작 31살의 검사라고? 마스터가 되었다 해도 아직 완성을 논하기엔 한참 부족한 나이여야 하는데, 어찌 이런…….’
칼릭스와 나이프를 마주하고 있던 데이먼 후작은, 자신의 광대뼈 옆으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방울을 느끼고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조각난 방패 파편으로 유추한 검술로 칼릭스의 실력에 제법 기대를 가졌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심력을 기울어야 할 상대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출수하지 못하고 긴 탐색만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가 상대의 빈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랜드 마스터라는 완성된 초인의 경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데이먼으로선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빈틈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될 일이다.’
그래도 왕국제일이란 칭호가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기에, 오랜 대치 끝에 데이먼 후작은 칼릭스보다 먼저 그의 검세를 파고들며 최초의 공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런 데이먼 후작이 스타트를 끊은 첫 일격은, 그대로 수십 번의 합을 만들어내며 마지막 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차자쟈쟈쟝!
“으헛! 무, 뭐야?”
“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몇 분 동안 충돌 하나 없이 손목과 팔꿈치, 어깨를 조금씩 움찔거리며 자세를 바꿔가기만 하던 두 사람의 모습에 흥미를 잃어가던 관중들은, 일순간 수십 번의 부딪힘과 함께 발생한 소음과 흩어지는 불똥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눈에 힘을 줬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목 앞에 나이프를 들이댄 채 멈춰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그 찰나의 접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나름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몇몇 수준 높은 기사들만이, 조금 전 벌어진 맹렬한 공방의 편린을 간신히 눈에 담고 입을 헤 벌렸을 뿐이었다.
툭.
데이먼 후작의 턱 아래 대어진 나이프가 반으로 부러지며, 바닥의 카펫 위에 떨어져 작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그대도. 기대 이상의 엄청난 실력자였군.”
팔을 거둔 두 사람이 서로를 칭찬하며 승부의 막이 내려갔다.
구경하던 귀족들은 뭐 하나 제대로 본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멋진 검술이었다고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역시 하룬빌 가문. 데이먼 후작께서 이기신 게 맞지요?”
“어……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칼릭스 백작의 나이프가 부러졌으니까…….”
“저 정도면 거의 무승부 아닙니까? 어쨌든 바로 목 앞까지 무기가 다가갔는데.”
“원래 마스터들의 싸움은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도 갈린다고 들었으니, 후작 각하의 승리가 맞을 겁니다.”
“오호! 그렇군요.”
“역시 괜히 최강의 기사인 게 아니겠지요. 아, 물론 칼릭스 백작도 대단하긴 합니다만.”
뒤에서 들려오는 귀족들의 목소리에, 데이먼 후작은 냉소를 머금은 얼굴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나이프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이프의 몸체 위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빼곡하게 생겨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힘을 줘도 잘게 부스러질만한 상태.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가.’
잠시 나이프를 노려보던 데이먼 후작의 시선이,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칼릭스의 등에 머물렀다.
당장에라도 그를 붙잡고 빠져나가, 진검을 들고 다시 승부를 보자는 말을 내뱉고 싶었다.
라이벌 가문인 이플리트가의 도미닉 공작마저 제치고 왕국제일의 자리에 올라선 지도 어느덧 몇 년째.
칼릭스라는 새로운 자극제의 출현에, 데이먼 후작은 꽤 오랜만에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