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57화
“아즐린. 검극이 자꾸 내려간다. 설마 지친 것이냐?”
“앗!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며 손목의 각도를 조정하는 아즐린을 비롯해, 다른 제자들도 스스로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며 칼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아카데미에서도 귀신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교관이었지만, 군영에서의 칼릭스는 그때 이상으로 준엄하게 제자들을 관리했다.
“긴장을 놓지 마라. 지휘관이 전장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휘하의 병사들도 기강이 해이해지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뭐, 기사로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면 딱히 완벽해질 필요는 없겠지. 쉬엄쉬엄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원하는 대로 편하게 풀어줄 테니.”
“아닙니다아악!”
아카데미 제자 삼인방이 익스퍼트급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칼릭스는 그들에게 철저히 기사에 어울리는 태도를 요구하며 쉴 새 없이 굴리고 또 굴려댔다.
‘야만인들이 내려오는 경우가 크게 줄어들어서 다행이군. 시간 여유가 없었다면 이 녀석들에게 신경 쓰기도 어려웠을 텐데.’
전투상황이 드물다 보니 칼릭스가 멀리까지 임무를 나설 일도 거의 없어졌고, 주기적으로 동향을 살피기 위해 순찰을 나서는 것 빼고는 크게 할 일도 없어 제자들을 관리하기도 수월했다.
칼릭스는 아예 순찰 임무를 나갈 때도 제자들을 대동하여, 야전에서 알아야 할 수칙들을 몸에 직접 새겨주기도 했다.
군영에 있을 때는 검법에 중점을 둔 수련을 시키고, 외부로 나갈 때는 신법을 연마함과 동시에 야전활동의 지침들을 머릿속에 꽉꽉 쑤셔 넣어주었다.
“베네트. 사주경계가 어설프다. 눈먼 화살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아뇨!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전원 이전 지점으로 돌아간다.”
“으윽…….”
“아즐린. 대형을 균일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혼자 앞서 나가서 어쩌자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을 놓치고 지나친다면 순찰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신속함과 정확성.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해내지 못하면 자신이나 동료가 죽을 수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집중해서 다시 간다.”
“으으. 네에…….”
한 치의 부족함도 용납하지 않는 빡빡한 교육에, 제자들은 다시라는 단어 자체에 증오심이 생길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밖에 못하나? 다시.”
“다시. 원위치로.”
“그만, 처음부터 다시!”
‘살려줘…….’
‘정신 나갈 것 같아!’
현역 기사들이나 겨우 소화할 법한 스케줄로 머리와 몸을 둘 다 빡세게 굴려대니, 삼인방은 살이 쭉쭉 빠지며 피폐한 몰골이 되어갔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생물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은 칼릭스가 요구하는 강행군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로롱~ 프휴-
휴식을 지시하자 순식간에 눈밭을 파고들어 누울 자리를 만든 제자들이, 곧바로 작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칼릭스는 피식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제 좀 숙련병다운 모습이 되었군. 힘들겠지만 이런 경험들을 해봐야, 기사가 되어서도 느슨해지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법이지.’
그저 기사가 되기만 하는 것뿐이라면 적당한 교육만으로도 충분히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세 사람은 정식으로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칼릭스는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이를 어중간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카데미 교관과 생도의 관계일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정식제자라는 것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스승의 명예와도 직결될 수밖에 없기에, 실력 향상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철저하게 규율을 따르게 하며 꼼꼼한 자기관리의 습관을 몸에 박아 넣어야 했다.
그렇기에 이전처럼 단순히 무공 초식과 구결 몇 개를 전수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칼릭스는 제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개조하다시피 하며 엄격한 훈련 과정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기상.”
쉬기 시작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지만, 제자들은 칼릭스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며 검을 붙잡았다.
잠결에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모양인지 완전히 일어서고 나서야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들 멍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혹독하게 제자들을 몰아붙이고 있긴 하지만, 휴식조차 제대로 못 하게 만들며 그들을 괴롭히자고 깨운 것은 아니었다.
“적이 온다. 대응할 준비를 해라.”
칼릭스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야만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족장의 암살 이후로 북부군이 머무는 산맥 초입 인근에 야만인들이 내려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지만, 그렇다고 적과 조우할 확률이 완전히 제로가 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순찰을 다니다 보면 아직도 간혹 야만인들과 마주치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쓰읍-”
“에이 씨…….”
귀중한 휴식시간을 방해받은 제자들이, 흉흉한 살기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야만인 무리를 노려보며 방진을 갖췄다.
처음 야만인들과 마주했을 때는 그들이 뿜어내는 날것 그대로의 투기에 질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손발이 꼬이는 모습을 보였었지만.
칼릭스의 밑에서 워낙 험하게 구르다 보니, 이제는 제자들도 전투에 돌입하면 몇 년 복무한 고참병들처럼 거친 기질을 갖게 되었다.
쉴 틈도 없어 꼬질꼬질해진 외견에 두 눈 가득 투지를 품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니, 어느 쪽이 야만인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우워어억!”
“이야아악!”
야만인들의 고함에 맞서 악을 지르며 뛰쳐 나간 삼인방이, 칼릭스에게 배운 각각의 검술을 펼치며 적들과 무기를 맞부딪쳤다.
그런 제자들의 뒤편에서 칼릭스는 언제든 개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채, 조용히 전투가 진행되는 양상을 지켜보았다.
‘역시 무공 수준은 셋 중에서 아즐린이 단연 발군이로군. 베네트야 원래 대인전에 특화된 무공을 익힌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거고. 베런은…… 재능 자체가 비범하진 않으니 그냥 무난한 정도일 수밖에 없나. 무공의 숙련도 역시 아직은 떨어지고.’
세 사람을 정식제자로 받아들이고, 베런은 현재 이들 중에서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성별에 따른 차별대우 같은 건 아니다.
단지 아카데미 시절부터 무공을 전수했던 아즐린과 베네트와는 달리, 베런은 가전검술을 조금 손봐주었을 뿐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기에.
이제야 본격적으로 무공을 접하느라, 배워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침 성향이 비슷한 무공이 있었으니 다행이군. 검법이 아니라는 게 기묘하긴 하다만.’
베런이 기존에 익힌 가문의 오러연공법 및 검술과 충돌하지 않도록, 칼릭스는 그에게 최대한 비슷한 성향의 무공을 골라 가르쳤다.
무림에서 하북팽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어느 세가의 무공이었다.
팽씨 가문은 검법이 아닌 도법을 주력으로 삼는 무가였지만, 베런의 성향에는 검을 쓰는 다른 어떤 무공들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어울린다 해도 새로운 오러운용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지금의 베런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히요옷! 키핫!”
‘……저 경망스러운 기합도 좀 고쳐놓고 싶은데, 도무지 어떻게 안 되는군.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놔야 하나.’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야만인들과 맞서는 베런을 지켜보던 칼릭스는, 어느 순간 속절없이 밀려나는 제자들의 모습에 방관을 멈추고 전투에 개입했다.
저쪽은 대전사가 속하지 않은 야만인 무리였지만.
일반 전사들이라 해도 문신주술을 활성화하고 나면, 아직 익스퍼트급이 아닌 제자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쉬익- 서걱.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움직임으로 전투에 끼어든 칼릭스가, 순식간에 야만인 전사들의 목을 날려 버렸다.
“우와…….”
“역시 엄청나…….”
뒤로 물러나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제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껏 감탄에 빠져들었다.
“뭘 넋 놓고 보고 있나?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긴장을 풀고 있다니!”
“아, 죄송합니다.”
“남은 녀석은 너희끼리 해결해 봐라.”
“예?”
칼릭스의 말에 제자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자니,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야만인 하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부 목이 날아간 줄로만 알았는데, 딱 한 녀석은 적당히 상처를 입혀놓고 살려둔 모양이었다.
“크으, 우워억!”
팔과 다리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던 야만인이, 이내 성난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도록 부상을 입혀놨으니, 셋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처리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해결하지 못한다면 훈련이 부족했다는 뜻일 테니, 순찰 임무의 복귀 시간이 꽤나 뒤로 미뤄지게 되겠지.”
“으아악!”
“죽어어엇!”
그렇지 않아도 훈련이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태연한 얼굴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소리를 해대는 칼릭스의 모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제자 삼인방은 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야만인 전사에게 달라붙었다.
* * *
야만인들의 동향을 살피는 동안 제자들을 단련시키는 나날이 반복되며, 어느덧 칼릭스가 북부군에 들어온 지도 반년이 지나게 되었다.
북부의 상황은 이제 완벽히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대족장을 선출하지 못한 야만인들은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이다가 규모 자체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통합부족은 결국 뿔뿔이 찢겨 예전만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북부군의 정찰대가, 소수의 우호부족과 거래를 하던 기존의 장소에 남겨진 새로운 표식을 발견했다.
칼릭스와 인연이 생겼던 예의 그 주술사가, 바위사슴 부족의 세력을 복원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몇 차례의 절차 끝에 함정 같은 게 아님을 확인한 북부군은 그들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칼릭스 마이언.]
“나도 반갑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었는데 말이지.”
[그랬나? 그건 조금 섭섭한 이야기로군.]
교류현장에 참석한 칼릭스는 바위사슴 부족의 주술사와 재회하며, 꽤 많은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들 우호부족이 북부군과 완전히 결탁하기로 하면서, 산맥 안쪽의 야만인 부족들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모든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 넘겨주었기 때문.
저들의 그런 태도에는 동족에게 한번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탓도 있지만, 통합부족의 진영 한복판에 들어와 대족장을 암살한 칼릭스의 존재를 알고 있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산맥 안쪽의 세력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우호세력에서 마련해준 거점과 은신처들을 토대로, 칼릭스는 특임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펼치며 적대적인 야만인 부족들을 하나씩 섬멸해 나갔다.
그렇게 인근 부족들이 사라지니 우호세력의 산맥 내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고, 북부군에 대한 지원도 늘어가는 선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칼릭스가 알론드와 나누었던 대화처럼.
산 아래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부군은 어느 순간부터 산맥 안쪽에 전초기지를 세워가며, 북부의 점유율을 크게 늘려나갈 수 있었다.
“고작 반년 사이에 많은 변화를 이루었구먼. 이게 다 자네의 공로일세. 칼릭스 경.”
“어찌 저 하나만의 공이겠습니까. 물론 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껄껄! 딱딱하기만 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리 너스레를 떨기도 하는구먼. 아무튼 자네, 이제 슬슬 군부를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네그려.”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린 알론드가, 칼릭스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왕실에서 내려온 공문일세. 자네의 공적을 치하하고 작위를 수여하고자 하니, 근시일 내로 수도를 방문하라는 호출이지. 아마 국회의 대신들이 꽤 애가 탔을 게야.”
“음. 그렇습니까?”
“어디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마스터가 작위에 대한 협의도 하지 않고 군부에 몸을 담았는데. 이 짧은 기간에 왕국의 방위에 큰 기여를 하고 국토를 확장할 기회를 만들었으니 말이야. 보상에 대해 논의하느라 머리털 꽤나 뽑아먹었을 걸세.”
장난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제스처를 취하는 알론드의 모습에, 칼릭스는 피식 웃으며 왕실의 직인이 찍힌 공문서를 받아들었다.
‘드디어 세상에 내 존재가 알려질 때가 왔군.’
정식으로 작위를 받고 마스터의 경지를 공표하게 되면, 대륙 전체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왕국 전역에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기사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칼릭스는, 드디어 첫 발걸음을 떼었다는 생각이 들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회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