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56화
양성
‘후우, 예상보다 오러를 너무 많이 소모해 버렸는데.’
문신주술을 활성화한 야만인 전사들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내는지는 이미 숱하게 경험해 왔기에.
비록 직접 만나본 적은 없던 상대였어도 대족장이라 자칭할 정도라면, 마스터급에 준하는 실력자일 것이라 예측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상대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만 않으면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설마 심장을 찔리고도 무슨 언데드 몬스터처럼 멀쩡히 움직일 줄이야.
‘거칠어진 내기의 흐름을 다스리고 있을 여유는 없겠지. 이거 들키지 않고 곱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대족장의 시체를 밟고 검을 뽑아낸 칼릭스는, 썩 좋다고 하긴 어려운 본인의 몸 상태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길에 피로가 많이 쌓이기도 했고 예상보다 힘을 많이 써버린 탓에, 육신이 휴식을 취해 달라며 거센 항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적진 한복판에 앉아서 무방비하게 운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칼릭스는 애써 몸을 추스르며 이 장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막 자리를 뜨려던 칼릭스의 기감에, 이곳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이런.’
벌써부터 시체가 발견되어 소란이 발생해서는 좋을 것이 없기에, 칼릭스는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검을 출수하기 위해 슬쩍 몸을 숨기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그의 검이 다시 휘둘러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dhdh! tjdrhddlsrk!”
나타난 인물이 칼릭스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그 주술사? 으음, 점혈이 벌써 풀렸을 리가 없는데.’
무언가 특별한 수단이 있던 모양인지 예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아온 주술사의 모습에, 칼릭스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상대이니 더 힘을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마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니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갑자기 정신을 잃게 만들어 당황했는데, 설마 혼자서 저 인간을 해치울... 아니? 그대, 얼굴이 어째서?]
감탄한 표정으로 다가오던 주술사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아차 싶었던 칼릭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힘을 아끼지 않고 대족장과 전투를 치르느라, 예의 역용술은 일찌감치 풀려 버린 상황이다.
동족이 아니라는 걸 들켰으니 주술사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칼릭스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녀를 베겠다는 마음으로 검에 힘을 주었다.
[산 아래의 인간이었나. 어쩐지…….]
“날 막을 건가?”
[아니다. 누가 되었든지 복수를 해줬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애초에 우리 부족은 이방인들과 공생을 도모하는 쪽이지, 다른 부족들처럼 무작정 적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건 알고 있다. 바위사슴 부족과의 교류가 끊어진 것에 대해선, 우리 쪽 사람들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더군.”
[그런가…… 다른 부족들도 무의미한 싸움 대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에 대해 떠올린다면, 충분히 상생하면서 공존할 수 있었을 진데.]
한숨을 내쉬고 잠시 대족장의 시체를 바라보던 주술사가, 이내 다시 칼릭스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대족장이라 칭하던 인간이 사라졌다지만, 힘을 모아 풍요의 땅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을 테지. 그래도 코앞까지 닥쳤던 당장의 전쟁은 미뤄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기회에 다른 부족들을 설득해, 우리와 같은 성향을 지닌 세력을 늘려볼 생각이다.]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적대 의지가 없어 보이는 주술사의 모습에,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다시 그녀를 통해, 북부군과 야만인들의 교류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칼릭스 마이언이다. 다시 우리 쪽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된다면 나를 찾도록 해라. 서로에게 온건적인 미래를 위해서, 나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칼릭스 마이언. 기억했다. 그럼 여기는 내가 수습해서 시간을 벌어 볼 테니, 그대는 이곳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도록 해라.]
“고맙다. 그럼 부탁하지.”
칼릭스는 남은 오러를 짜내 은신술을 펼치며, 야만인들의 본진을 서둘러 탈출했다.
구상했던 계획에서 살짝 틀어지긴 했지만 목적만큼은 완벽하게 달성했기에, 지친 와중이지만 주둔지로 복귀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 *
대족장을 제거한 칼릭스의 행동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분쟁이 발생하던 북부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로 통합되었던 각 부족의 대표들은, 사라진 대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슬금슬금 야욕을 드러냈고.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더 갖기 위해 내부에서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니,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진 않았으나 사실상 이미 분열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자연히 야만인들과 북부군이 부딪치는 일 또한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구먼. 보내놓고도 계속 후회가 들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었는데, 기어코 이걸 해내고 말다니. 자네의 저력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르겠네.”
“하핫.”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극찬을 늘어놓는 알론드의 모습에, 칼릭스는 그저 멋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왕실의 관료들이 자네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해 줄지 모르겠군. 헛똑똑이 책상물림들이라 같잖은 소리나 늘어놓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겠지요.”
사실 야만인들의 구심점을 제거해 공세를 수그러들게 만든 것은 충분히 큰 전공이라 할 수 있지만, 보고서로만 사태를 전달받고 있던 왕실에서 그 중요성을 백 퍼센트 온전하게 인정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기미가 보였다 한들 실제로 강도 높은 침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은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하진 못하고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
만약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한 뒤에 칼릭스가 대족장의 멱을 따버렸다면, 아마 전공의 가치를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높게 평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왕국군은 적어도 수백에서 많으면 천 단위 이상의 목숨을 잃었을 테지.’
그런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나서고자 했던 것이기에, 칼릭스는 조금 아쉬울지언정 후회하진 않았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몸값을 더 불리자고 자국민들이 입을 피해를 모른 척하는 것은, 진정 명예로운 기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었기에.
“그래도 자네의 전공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도록 내 최대한 힘써보도록 하겠네. 게다가 아직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있긴 하네만, 잘하면 북부의 안정화 정도가 아니라 더 큰 과실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말이지.”
“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만약 야만인들의 규모가 이전보다 크게 줄어들게 된다면, 북부 쪽으로 왕국의 영토를 더 확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래 봐야 얻을 수 있는 큰 메리트는 없겠지만, 국토를 늘린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제법 의미가 있는 일이니 말일세.”
“흐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요.”
알론드의 이야기를 들은 칼릭스가 턱을 매만지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무리하게 하나로 뭉쳤던 세력이 목적을 잃고 괜히 서로를 견제하기만 하다가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필시 이전보다 더 약화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왕국군의 활동 범위도 넓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기회를 봐서 적극적으로 전초기지를 늘려가는 식으로 움직이다 보면, 국경을 더 위쪽으로 옮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자신의 활약으로 전쟁을 억제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제출하기가 어렵지만, 국토 확장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라면 윗선에서도 공적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세습작위에 더해, 그럴싸한 알짜 영지까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다만 아직은 거기까지 논하기엔 이른 시기이기에, 칼릭스는 그에 대한 안건은 희망사항 정도로만 남겨두고 알론드와의 대화를 끝마쳤다.
“저, 칼릭스 님. 위병소 앞에 칼릭스 님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론드와 헤어져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려던 칼릭스는, 뜬금없는 말을 전하는 병사를 마주하고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칼릭스 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에 어리둥절해진 칼릭스는 의문을 머금고 위병소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군영지의 출입을 관리하는 위병초소 앞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교관님!”
“……너희들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아즐린과 베네트, 그리고 베런까지.
반가운 마음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저를 종자로 받아주십시오!”
북부의 매서운 한풍 탓에 자꾸 흘러내리는 콧물을 장갑으로 문질러 훔친 베런이, 칼릭스의 앞에 냉큼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아카데미는 그만뒀습니다! 제 미래를 영광된 길로 이끌어주실 분은 오직 칼릭스 교관님 한 분뿐이라는 생각에, 염치없지만 이리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제발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잠시 이야기를 들어본 칼릭스는, 이내 세 사람이 찾아온 이유를 파악하고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생도들을 너무 잘 가르쳐도 문제였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기껏 닐슨 선배와 학부장에게 당부를 해가며, 자신이 관심을 준 아이들이 수련에 정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거늘.
이렇게 아카데미를 빠져나오면서까지 자신을 따라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이런 미련한 짓을…… 내가 가르쳐 준 것들만 잘 소화해도 충분히 기사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사정이 있든지 간에 아카데미를 그만둔 생도는 다시는 복학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교관이었기에 당연히 그런 규정을 알고 있던 칼릭스는, 막무가내로 사고를 쳐버린 세 사람을 보며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종자라? 잘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구나.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거두지 않겠다면 어쩔 셈이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안전한 장소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확실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려고 하다니. 도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의문이군.”
반가움과 초조함이 뒤섞인 기색으로 칼릭스의 눈치를 살피던 아즐린과 베네트가, 화가 난 듯한 그의 모습에 안색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마냥 할 말이 없진 않았는지, 이내 두 사람은 떨리는 눈빛으로 칼릭스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마음을 피력했다.
“죄, 죄송합니다. 교관님. 하지만…….”
“베런의 말처럼 저희는 스승님의 문하에 정식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없어도 상관없어요.”
“맞아요!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이대로 병사에 지원해 복무하면서라도, 스승님과 가까운 곳에 머물며 가르침 받을 기회를 노려보겠습니다.”
“이 녀석들이…….”
제법 진심 어린 태도였기에, 칼릭스는 굳은 표정을 풀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내 영지가 생기고 나면 그때부터 남모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무림의 문파 같은 세력을 구현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일찍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게 생겼군그래.’
자신에게 더 배우고 싶다며 제 딴에는 큰 각오를 하고 찾아온 아이들을, 여기서 매정하게 뿌리칠 생각이 들진 않았다.
마침 당분간은 야만인들의 동향을 살피기만 할 것이기에, 특무대의 활동 역시 계획된 것이 없기도 했다.
‘부대편제에 조금 어긋나긴 하지만 대충 당번병 정도로 편입시켜두고, 북부군에 머무는 동안은 내 밑에 두고 있어야겠어.’
작전 수행에 함께 나서진 않지만 부관으로 임명해 부대 내의 잡무를 도맡게 한 아이반도 있으니, 자리를 비울 일이 있으면 같은 처지의 제자들끼리 서로 뭉쳐 있게 해두면 될 것으로 보였다.
아이반이야 이플리트 공작가의 일원이니 나중에 군부를 떠나게 되면 보내줘야 하겠지만, 이 녀석들은 자신의 영지가 생겼을 때 함께 데려갈 수 있으니 지금부터 품고 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일어나라, 베런. 그리고 너희들도. 뜻이 그렇다면 받아주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됐다! 흐흐!”
“하지만 아카데미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이상. 이전처럼 훈련과 휴식을 반복하며 편하게 성장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전장에서 기사를 수행하는 종자들은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 언제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자리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을 따를 수만 있다면, 그런 위험쯤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대답만큼은 잘하는 아이들을 보며, 칼릭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그들을 군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