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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55화 (55/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55화

주술사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눠본 칼릭스는 이내 그녀가 통합에 반대했던 부족의 일원이며, 대족장에게 상당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바위사슴 부족의 주술사였다. 그대는 어느 부족의 전사였나?]

“……말해줘도 잘 모를 것이다. 딱히 거론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가. 하긴 말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면, 꽤 오래 폐쇄된 생활을 했던 부족인 모양이지. 외부로 나갈 일이 없으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산 아래의 인간들이 쓴다는 괴상한 언어인가 싶을 정도였다.]

“…….”

있지도 않은 부족을 들먹이는 대신 대답을 회피한 칼릭스는, 문득 그녀가 말한 부족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위사슴? 그러고 보니 알론드 님께 들었던 그 이름이군.’

야만인들과 왕국군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지만, 놀랍게도 그런 상황에서 북부와 대륙의 비적대적인 교류가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대륙인들과 주기적으로 거래를 하는 부족이 존재하긴 했던 것이다.

바위사슴 부족은 바로 그런 소수에 해당하는 부족이었다.

설산의 산짐승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최고급품의 질 좋은 모피와, 다른 데서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약초들.

그런 북부의 특산물은 대륙에서는 큰 가치를 지닌 상품들이기에, 취급하고 싶어 하는 상인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야만인들과의 거래는 상대적으로 헐값이나 다름없는 식료품과의 물물거래로 이루어지기에, 한번 북부의 산을 올랐다 하면 막대한 이문을 남길 수가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밀무역에 해당하는 불법이지만, 북부군에서 암묵적으로 뒤를 봐주고 있다지.’

북부산 최고급품의 모피는 귀족들이, 그리고 희귀한 약초는 마법사들이 환장하는 물품들이다.

사회의 권력층에서 원하는 상품들이니, 북부군에서도 마냥 밀무역에 강경히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북부군 장교들은 윗선의 다양한 연줄들을 통해 간섭을 받다 보니, 차라리 역으로 자신들이 깊게 발을 걸치는 편이 상황을 통제하기 더 쉽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런 밀무역 자체가, 북부군의 기밀로 존재하는 하나의 중요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뒷거래를 통해 금전적인 이득도 챙기고 귀족들에는 적당히 생색을 보이며, 야만인들에게선 산맥 안쪽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야만인들이 통합을 이루고 있다는 상황과 대족장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은 그런 방법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야만인들과의 전투가 잦아지면서, 교류하던 부족들과의 연락도 끊어지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통합세력에 흡수되면서 부족 자체가 와해되었던 모양이군.’

그나마 그녀는 문신주술을 다루는 중요한 고급인력인 주술사였기에, 통합에 반대한 부족 출신임에도 처형당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주술사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고 판단되어,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보를 더 얻어내고자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대족장에 대해 말해봐라.”

[무엇을? 그놈에 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대 역시 알고 있는 것들일 텐데.]

“혹시 몰라서 그러니, 되묻지 말고 일단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봐.”

[흐음. 알았다. 놈은 강력한 전사이며 동시에 위험한 주술사이기도 하지. 알다시피 이미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그에게 도전했다가 처참히 패배했다. 정면승부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야.]

‘주술사라고?’

몰랐던 정보였기에 칼릭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단순히 뛰어난 전사일 뿐이라면 야만인들의 가장 위협적인 능력인 문신주술을 발동하기 전에, 기습으로 쉽게 제거하고 물러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상대가 주술이라는 미지의 힘을 갖고 있다면, 계획이 처음부터 틀어질 수도 있게 되었다.

“네가 아까 전에 나를 발견한 것도 주술의 힘인가?”

[아아, 그 이상한 몸놀림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대자연의 정령들과 소통하는 우리 주술사들의 눈과 귀는, 세상 무엇보다도 예민하다고 자부할 수 있지.]

주술사의 대답에 칼릭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저 말대로라면 살수의 무공으로 한순간에 목표를 암살하고 빠져나온다는 계획은 폐기해야 한다.

‘은신술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니. 모르고 있었다면 낭패를 볼 뻔했군. 어쩌면 놈을 빨리 찾아내지 못했던 게 오히려 행운일지도 모르겠어.’

대족장보다 먼저 눈앞의 주술사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칼릭스의 사정을 모르는 주술사는, 그저 요구받은 대로 자신이 아는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들을 늘어놓았다.

[놈은 산 아래 풍요의 대지가 있다며, 그곳을 쟁취해야 한다는 말로 전사들을 끌어모으고 있지.]

이미 예상했던 대로 야만인들의 침공에 대한 말이 나와, 칼릭스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다수의 전사들은 큰 전쟁이 일어날 거란 사실에 흥분하고 있지만, 솔직히 내겐 정신 나간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가혹하기만 한 곳이라지만, 우리의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옳은 결정일 리가-]

“네 생각이 궁금한 게 아니다. 대족장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더 없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야기가 딴 길로 새려고 했기에, 칼릭스는 주술사의 말을 끊고 다른 정보를 재촉했다.

[자꾸 뭘 더 말하라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 그대는 정말로 다른 부족의 생존자가 맞는 것인가? 어째 저 미친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인데…….]

대화가 길어지다 보니 수상한 티가 났는지, 주술사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칼릭스는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잠깐 고민해본 칼릭스는 이윽고 주술사의 혈도를 짚어, 점혈법으로 그녀를 기절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크게 가치 있는 정보가 더 나올 것 같지는 않고. 이쯤에서 다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여야겠군.’

대족장을 제거하는 데에 협력하겠다고 했지만 처음 본 야만인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술사에게 등 뒤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신뢰가 부족하다고 해서 원래도 북부군과 교류하던 부족의 사람이며, 이런저런 정보를 준 그녀를 제거하는 것도 내키진 않았기에.

칼릭스는 주술사에게 한두 시간 뒤에는 깨어날 수 있을 정도의 금제만 가하고, 자리를 뜨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대족장의 위치에 대해서도 미리 이야기를 들어두었기에, 칼릭스는 주술사의 거처를 빠져나와 신속하게 목표가 있는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 * *

은신술을 비롯한 살수의 무공으로 상대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취소한 칼릭스는, 대족장의 거처에 들어섬과 동시에 기척을 드러내며 놈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넌 뭐냐? 감히 부른 적도 없는데 내 거처에 발을 들이다니.”

‘이놈이 확실하군.’

알아듣지 못할 말로 떠들어대는 야만인 전사를 바라보며, 칼릭스는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야만인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기세가 풍기고 있으며, 조금 전 만났던 주술사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눈앞의 야만인은 그가 찾아다니던 목표인 대족장이 분명했다.

‘기습은 포기했지만 가능하면 첫 수로 승부를 봐야 한다.’

야만인들의 본진을 찾기 위해 기력을 소모하느라 컨디션이 만전이라 할 수 없던 칼릭스는, 전력을 다해 최대한 빠르게 적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

대량의 내기가 전신의 기혈로 뻗어 나간다.

압축된 오러가 칼날에 맺히며, 검신이 지닌 특유의 색깔이 한층 더 강하게 빛났다.

이어서 섬광이 번뜩이며 묵빛의 벼락이 대족장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컥!”

‘되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심장을 관통당한 대족장이 눈을 부릅뜨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에, 칼릭스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탈출 경로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덥석.

즉사했으리라 생각했던 대족장의 손이 칼릭스의 손목을 움켜쥐며, 그의 몸에 그려진 문신주술이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엇!?”

“크와아악!”

이빨로 물어뜯을 생각인지 입을 벌리며 달라붙는 대족장의 모습에, 대경실색한 칼릭스는 붙잡힌 손을 비틀어 빼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르륵! 이깟 상처로, 나를 죽일 수는 없다.”

피부 위로 핏줄이 과하게 불거지며, 대족장의 외형이 기괴하게 변해갔다.

손톱과 송곳니가 길쭉하게 자라나며, 눈동자가 마치 파충류의 동공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다.

‘하! 짐승 같은 놈들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짐승이 아니라 아예 몬스터나 다름없군. 저것도 주술의 능력인 건가?’

칼릭스는 낭패한 표정으로 상대의 가슴에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반격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검을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꿰뚫리고도 죽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인간이라니, 너무나도 상정 외의 사태였기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씹어 삼켜주마!”

마치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처럼, 대족장이 양손을 쫙 벌리며 칼릭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기도 한 모양새였지만 속도만큼은 엄청나게 빨랐다.

손가락보다 길게 자라난 날카로운 손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할퀴어오는 모습에, 칼릭스는 신법을 전개하며 상대를 피해 몸을 움직였다.

‘야만인들의 왕이 되겠다고 설치고 다닐만한 놈이긴 하군.’

문신주술뿐 아니라 육체를 변이시키는 알 수 없는 힘까지 사용해 싸우는 대족장의 신체능력은, 왕국의 다른 마스터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던 칼릭스조차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근력과 민첩성만 놓고 보면 오히려 대족장 쪽이 칼릭스보다 앞서 있을 정도.

신묘한 이치들을 담은 무공의 효력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리다가 패배했을지도 몰랐다.

‘맨손격투는 주력이 아니다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나.’

몸을 피하며 기회를 보던 칼릭스가, 일순 자세를 바꾸며 대족장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무기를 잃은 상태이며 적은 마스터와 대등한 전투능력을 보이고 있었지만, 무림의 여러 고명한 절기들을 다루는 칼릭스가 검이 없다고 해서 싸우지 못할 리는 없었다.

슈슛. 퍽.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는 투로로 몸을 들이민 칼릭스가, 철판도 찢어발길 것 같은 손톱을 피해 상대의 옆구리를 가격하며 측면으로 빠져나왔다.

“크륵! 간지럽구나!”

“그러시겠지.”

재빠른 동작으로 적을 때리긴 했지만, 상대는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칼릭스도 한 수에 그를 제압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무심하게 대꾸하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퍽! 쉬잇, 퍼버벅. 빡!

상처 입고 날뛰는 난폭한 맹수와도 같은 상대의 주위를 기민하게 맴돌면서, 칼릭스는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꿔가며 변화막측한 모습으로 대족장의 몸뚱이 곳곳을 타격했다.

소림오형권.

뱀의 움직임 같은 유연함을 지닌 사형권과, 학의 날갯짓처럼 우아하면서도 강직함을 감춘 학형권.

거기에 먹이를 노리는 표범의 은밀하고 날렵한 동작의 표형권과, 사냥감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내는 호랑이의 강맹함을 담은 호형권까지.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승려들의 문파인 소림의 무공이며, 특히나 적수공권의 무공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권법이었다.

“크아악! 이놈!”

겉으로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권으로 보이는 듯하면서도, 빠름과 느림을 오가는 다채로운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는 소림오형권.

매섭게 몰아치는 칼릭스의 권격에, 대족장은 점차 기존의 여유를 잃어가며 분노를 터뜨렸다.

분명 자신이 더 빠르게 힘 있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상대에게 공격이 닿지 않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도 당연하다.

거칠게 양팔을 휘두르는 대족장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칼릭스가 조금씩 상대에게 입히는 피해를 누적해가던 때였다.

툭.

칼릭스의 등이 어느 순간 벽면에 닿으며, 신속하게 움직이던 발놀림이 일순간 멈춰 섰다.

“쥐새끼 같은 놈! 걸렸구나!”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긴 했지만, 그 와중에 교묘하게 칼릭스를 구석에 몰아넣은 대족장이, 입이 찢어질 듯 크게 웃으며 그를 향해 번뜩이는 손톱을 내리쳤다.

나이프 다섯 개로 베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대족장의 공격이, 칼릭스의 머리를 가르며 몸통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크하하, 하?”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던 대족장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분명히 공격을 성공시켰음에도 어째선지 손끝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빠른 속도에 잔상이 남아 착각했을 뿐.

이미 칼릭스의 신형은 그 자리를 벗어나, 대족장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소림오형권의 마지막 형이자 진정한 극의에 도달한 이가 소림 역사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용형권의 절기가, 칼릭스의 몸을 통해서 펼쳐진 것이었다.

아마 무림인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이형환위라고 외치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구름 위를 노니는 환상의 동물인 용.

그런 용을 형상화한 용형권의 신출귀몰함은, 자연과 소통하여 은신술도 간파해내는 주술사의 감각조차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서 용의 진노가 대족장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오러가 깃든 칼릭스의 단단한 팔꿈치가, 상대의 골통을 썩은 과육처럼 터뜨리며 파고들었다.

털썩.

이내 머리가 사라져버린 몸뚱이가, 통제를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칼릭스는 혹시나 싶어 경계를 풀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주술사라 해도 부서진 머리를 재생할 능력까진 없는 모양인지.

곧 놈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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