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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54화 (54/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54화

낮에 있었던 전투의 흔적을 더듬어 움직이던 칼릭스는, 야만인 전사들이 모여 생활하는 장소들을 몇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야만인들의 취락처럼 보이는데 어디에도 여성이나 아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대족장이란 놈이 다른 부족들을 흡수하고, 이곳들은 전사들만 남겨 경계초소 같은 개념으로 운용하고 있는 모양이군.’

야만인들의 동태를 살피던 칼릭스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전사들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될 리는 없으니, 다른 장소에 이보다 더 큰 터전이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낮의 전투에서도 야만인들의 전력은 만만치가 않았는데, 다른 곳에 있을 본진까지 합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세력일지 예측이 되질 않았다.

‘이쪽이 본진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생각보다 더 야만인들의 규모가 거대했나 본데.’

초대형의 야만인 무리가 왕국을 침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소름이 돋는다.

물론 북부군이 스스로의 진영에서 방비를 단단히 한 채 수성에 돌입한다면, 앞서의 격돌과 달리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를 이끌어나갈 수 있겠지만.

목숨을 불태워가며 죽음을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녀석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북부의 국경지대에 구멍이 뚫리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계획을 짠 것이 전공에 대한 욕심 때문은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생각보다 더 중대하고 필요한 일이었어.’

야만인들의 부족이 하나로 뭉쳤다고 해서, 반드시 왕국을 침공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억측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척박한 북부의 환경에서 대규모의 세력을 한 자리에 유지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저들이 가지게 될 목표가 침략과 약탈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았다.

칼릭스는 굳은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놈들의 구심점을 제거하고 야만인들의 군집을 와해시켜야 했다.

야만인들의 진짜 본진을 찾아다니기 위해 홀로 북부의 험난한 산악지형을 돌아다니며, 칼릭스는 꼬박 사흘가량을 소비해야 했다.

‘드디어 찾았다. 이쪽이 야만인들의 본대인가.’

생각해보면 전사들의 초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본대 역시 아주 먼 곳에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수시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환경에 길이라 부를 만한 것도 마땅히 없으며, 야만인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발견되는 흔적도 여기저기 난잡하게 퍼져 있었기에.

그가 혼자서 주변을 수색하는 데에는 그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러 능력을 갖춘 칼릭스였기에 끝까지 야만인들의 종적을 추적할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방향을 잃고 조난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멀지는 않았는데,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너무 길게 돌아와 버렸군.’

외부의 혹한 속에서 며칠을 버티며 흔적을 살피기 위해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그로서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눈을 녹여 식수를 대체하고 미리 챙겨온 건량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삼 일을 움직였던 칼릭스는, 초췌해진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움막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야만인들의 부락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은신술을 펼쳐 주변의 사물과 동화된 칼릭스는, 그림자속에 몸을 숨기며 천천히 야만인 부락을 탐색했다.

혹시 몰라 변장은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의심을 살 수 있으니, 가능하면 모습이 발견되지 않게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부락 내에 구조물이라고는 볼품없는 움막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통나무를 쌓아 올린 커다란 건물들도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대족장이란 놈이 허름한 곳에서 지내진 않을 테니, 통나무건물 위주로 살펴봐야겠어.’

칼릭스는 건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목표물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야만인들의 기지 내부를 탐색했다.

한참 동안 기감에 집중하여 수많은 야만인들을 살피던 칼릭스는, 이내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다.

목표물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몇 명 있긴 한데…….’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는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할 정도니, 대족장이란 놈은 평범한 전사가 아닐 것이긴 하다.

다만 여러 부족이 한데 모인 만큼, 족장급의 강력한 전사들도 한두 명이 아니란 점이 문제였다.

언어라도 알면 야만인들의 대화를 엿들어, 대족장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식의 방법을 쓸 텐데.

이대로라면 목표물 한 사람이 아니라, 좀 강해 보인다 싶은 야만인들은 죄다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곤란하게 되었군. 여기저기 퍼져 있는 녀석들을 제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시간이 길어지게 될 텐데. 중간에 암습이 발각되어 야만인들이 날뛰게 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몸을 빼기가 쉽지 않을 테고.’

살수의 무공을 활용해 목표물 하나만 빠르게 처리하고, 야만인들의 본진을 이탈하려던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옅은 한숨을 내쉰 칼릭스는 부락을 마저 둘러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계획을 그냥 포기하고 물러날 순 없으니, 목표물로 추정될만한 인원이라도 정확히 추려놔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해서 정탐을 이어가던 칼릭스는, 경계가 없다시피 한 여타의 장소들과는 달리 보초가 붙어 있는 어떤 건물을 발견하고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단순한 숙소는 아닌 것 같은데. 창고인가? 으음, 아니군. 여긴…….’

경비들의 눈을 피해 파고들기 무섭게, 불쾌한 냄새가 훅하고 풍겨 나왔다.

안을 살펴본 칼릭스는 생기 없는 눈으로 멍하니 늘어져 있는 다량의 인원을 발견하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큭, 역겨운 놈들.’

그곳은 기본적으로는 감옥이라 칭할 수 있는 형태의 건물이었지만, 창고라고 불러도 딱히 틀리진 않은 장소였었다.

야만인들은 지성인의 윤리관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짐승 같은 행태의 풍속을 가지고 세대를 이어간다.

발정기의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이치들은, 욕구가 생기면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 겁간을 벌이곤 했다.

게다가 아비와 아들, 어미와 딸을 가리지 않고 서로 붙어먹으니, 야만인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문명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미개한 습성이 있지만, 특히나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바로 동족조차도 잡아먹는 일부 부족들의 식인풍습이었다.

야만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식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존재들이 섞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탄을 받아 마땅했다.

칼릭스가 들어선 그곳은 거대한 수용소이자 창관이었으며 식량창고를 겸하기까지 하는 장소였었다.

도살과 해체의 흔적이 남아 피비린내를 풀풀 풍기는 공간을 찾아낸 칼릭스는,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우! 못 볼 꼴을 봐버렸군. 통합을 거부하고 저항한 부족민들을 저렇게 처분하는 건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걸물이 나타났다고 해도, 부족통합이 아무런 잡음 없이 이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야만인들이라 해도 무분별하게 아무나 잡아 식인을 한다면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으니, 아마도 저기 갇혀 성노 겸 식량으로 취급되는 이들은 타 부족들의 전쟁포로일 것이라 예상이 되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칼릭스는 끔찍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고, 다시 대족장을 찾아내기 위한 탐색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다니던 칼릭스가, 어느덧 야만인들의 부락을 거의 다 둘러보았을 무렵.

‘여긴 뭔가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군.’

다른 곳과는 묘하게 공기부터가 다른 건물이 있어, 칼릭스는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향초 같은 걸 태우기라도 하는 것인지, 내부에서 흐릿한 연기와 함께 기이한 냄새가 풍겨왔다.

‘뭐 하는 장소인지 감이 안 잡히는데.’

“rjrl, snrnwl?”

‘엇?’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칼릭스는 흠칫 놀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분명 기감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누가 이리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인지하지 못했다니.

긴장감에 목과 어깨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뒤를 돌아본 칼릭스의 시야로, 헐벗은 복장에 기괴한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야만인 여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분명 은신술을 펼쳐 움직이고 있기에, 어지간히 예민한 감각이 아니고서는 그가 바로 옆을 지나가도 알아챌 수 없을 터인데.

눈앞의 여자는 전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칼릭스가 숨어 있는 방향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칼릭스의 모습에, 야만인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한번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만 이번에는 입을 통해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혹시 귀를 다쳐 듣지 못하는가? 아, 말을 못 하는 경우일 수도 있겠군. 어쨌든 이곳은 주술사의 거처이니 전사들이 발을 들여선 안 된다. 썩 물러나라.]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막 몸을 움직이려던 칼릭스는,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명확하게 이해가 되고 있었다.

‘……텔레파시 마법 같은 건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대상에게 전달하는 마법.

본인이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칼릭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지식수준에서 큰 차이가 난다면 일부 전문적인 용어들까지 알아듣긴 어렵겠지만, 기초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었다.

‘자신을 주술사라고 했다. 주술사들은 은신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졌나? 하긴 마법사들도 본인이 구축한 영역에 타인이 들어서면 알아차릴 수 있다는 듯하니, 비슷한 수단을 갖췄을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야만인 여자는 그저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 칼릭스를 향해 딱히 공격적인 낌새를 보이진 않았다.

상대가 어떤 능력을 가졌을지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칼릭스는, 이내 순식간에 그녀의 뒤로 돌아가 팔을 붙잡아 꺾으며 목 앞에 칼을 들이댔다.

원한다면 지금의 동작으로 충분히 베어 넘길 수 있었겠지만, 어쩌면 대족장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은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에 그쳤다.

[이, 이게 antms 짓인가! 감히 wn술사를 위협gkek니!]

깜짝 놀란 주술사가 쏟아내는 말에, 칼릭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당황한 탓에 생각이 또렷한 형태를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인지, 일부 단어들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칼릭스는 손에 힘을 주며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족장은 어디에 있지?”

[뭐라고? 어느 부족의 말인지도 모르rpTrns. 당장 손을 떼기나 해라!]

주술사의 반응을 본 칼릭스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생각해 보니 저쪽은 텔레파시로 의념을 전달해 통역이 없이도 뜻을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니 대화가 될 리가 없었다.

“쯧. 쉽게 갈 수 있나 했더니. 그렇게는 안 되는 건가.”

[하아, 역시 전혀 못 알아듣겠군. 이봐! 나와 눈을 맞춰라.]

주술사를 처리하고 시체를 어딘가에 숨겨둔 뒤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칼릭스는, 그녀가 전해오는 말에 멈칫하며 발산하려던 오러를 거두었다.

대화가 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

잠시 고민하던 칼릭스가 주술사의 팔을 풀어주었다.

메이지(Mage)들 사이에서는 마스터와도 비견되는 대접을 받는 위자드(Wizard)의 칭호를 지닌 인물이라 해도, 이런 지근거리에서는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위협적인 술수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눈앞의 야만인 여성이 설마 그런 경지 이상의 능력을 가진 주술사는 아닐 터.

‘주술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만, 야만인들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면 진즉에 왕국으로 쳐들어오고도 남았겠지.’

혹시나 허튼짓을 하려 든다면 곧장 베어버리면 그만이라 여기며, 칼릭스는 검을 든 손에 힘을 준 채 야만인 여성과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무언가가 이마를 살짝 건드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제 말을 해봐라.]

“대족장은 어디에 있지?”

[뭐야? 넌 대체 어디 부족의 전사이기에, 주술사의 거처에 와서 그 인간을 찾…….]

황당하다는 듯한 기색으로 의념을 전해오던 주술사가, 생각을 멈추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서, 설마? 그대는 통합에 반대했던 부족의 생존자인가? 대족장을, 그 미친 새끼에게 복수할 todrkr을 품고 합류한 거야? 아니지. 놈의 위치를 모르는 rjf 보니, 이제 막 dlrht에 숨어든 모diddl군!]

정말로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신기해하던 칼릭스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주술사의 생각에 머릿속이 살짝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겠지만 주술사가 흥분한 탓에, 뒤로 갈수록 언어의 의미도 점점 알아듣지 못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잠깐. 천천히 말해라.”

[내가 돕겠다! 그놈을 죽일 생각이지? 내가 기회를 만들어 주마!]

강한 열망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주술사의 모습.

그녀의 말을 이해한 칼릭스는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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