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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53화 (53/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53화

“저도 따르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외치는 아이반을 보며, 칼릭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직 멀었다.”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만해라. 설마 지금의 네 실력으로, 다른 특임대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크읏…….”

통렬한 지적에 아이반은 이를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칼릭스는 아이반을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부대 내의 자잘한 업무들을 처리하도록 맡기고 전투 임무에서는 배제시켰다.

가문의 오러연공법을 그만두고 빙령심결의 수련을 시작한 아이반에게, 기사급의 전투능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차피 본래의 실력으로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는 특임대의 최정예 기사들과, 동등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긴 하군.’

평생 수련해 온 플레임 오러를 전부 방출해버리고 빙령심결을 통해 새로운 오러를 쌓기 시작한 아이반은, 고작 2달 사이에 본인이 20년가량 쌓았던 경지를 따라잡는 성취를 보였다.

극음지체의 체질과 한음지기를 다루는데 특화된 빙령심결, 거기에 북부의 환경이 더해지며 굉장한 시너지를 보인 덕분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멀었지. 도미닉 공작을 경악하게 만들려면 일 년 정도는 꾸준히 수련에 집중해야 할 테니.’

앞으로도 계속 저 성장세가 유지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칼릭스의 견해로는 아마 일 년 정도는 아이반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며,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전력으로 취급할 수 없는 상태.

“자꾸 이렇게 항명할 텐가? 나름대로 큰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리 반항하려 든다니 실망스럽군.”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스승님께는 평생 감사하며 살아도 은혜를 갚기엔 부족하다는 마음뿐입니다.”

칼릭스의 질책에 아이반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가 가지는 조바심도 이해할 순 있었다.

다른 특임대원들과 그들의 대장인 칼릭스는, 수시로 위험한 구역을 드나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벌이는데.

자신은 반쯤 행정관처럼 지내며 그마저도 업무가 많지 않아 남는 시간 동안 개인의 수련에만 힘쓰고 있으니,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칼릭스가 대규모의 부대 운용이 필요한 작전을 시행한다고 하니, 자신도 따라서 움직이겠다는 말을 꺼내었던 것.

“나중에는 하기 싫어도 고된 임무에 투입되며 실컷 구르게 될 테니, 지금은 다른 생각 말고 일신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것만 생각하도록.”

“으……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반을 돌려보낸 칼릭스는 군영을 떠나기 전에 필요한 물자들을 챙기며, 스스로가 입안한 작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았다.

내용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야만인들이 모여 생활하는 본진이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꾸준한 정찰과 교전의 기록들을 통해 대략적인 거리와 위치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칼릭스는 북부군의 일선부대들을 움직여서, 그런 야만인들을 도발하여 이끌어내는 한편.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적지에 파고들어, 현 사태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자칭 대족장이란 놈을 찾아 제거할 계획이었다.

그의 건의를 들은 알론드는 너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결국 칼릭스가 밀어붙이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북부의 군단들과 연계하는 대규모의 작전을 수립했다.

-아무리 마스터급의 기사라 해도 굉장히 무모한 계획이거늘. 정말 가능하겠나?

-걱정 마십시오. 다른 ‘기사’들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겠지만, 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생각이니까요.

-으음?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론드는 칼릭스의 말에 묻어 있는 묘한 얼룩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결국 알아차릴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이런 지식까지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스스로가 세운 위험한 계획의 밑바탕이 되어주는 능력에 대해 떠올리며, 칼릭스는 입이 써 보이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뒤.

북부의 주둔한 군대가 움직이며, 네 자릿수에 달하는 규모의 병력들이 눈 덮인 산맥을 올랐다.

* * *

“와아아악-!”

“찔러엇!”

“죽여 버려!”

비명과 함성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이 상대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나갔다.

북부군은 국경을 지키며 언제나 산 아래로 내려오는 야만인들을 막는 데에만 주력할 뿐, 이번처럼 역으로 먼저 공세에 나섰던 적은 거의 없었다.

산세가 험해 보급물자를 옮기는 것부터도 곤란했고, 야만인들의 터전에서 전투를 벌여봐야 이득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

전례가 드물었던 침입에 야만인들 당황한 기색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익숙한 지형의 이점을 살리며 거센 반격을 시작했다.

“끄아앗!”

“내, 내 다리…… 누가 좀 도와, 컥!”

“측면이 뚫린다!”

“대형 유지! 유지해! 이 병신 새끼들아! 뒤로 빼지 말라고!”

그렇게 야만인 전사들과 북부군 병사들에 한데 엉켜 한편의 지옥도를 그리고 있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어느 기슭 지형의 한쪽에서, 최정예 부대인 특임대원들이 검을 곡괭이처럼 찍어 넣으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 넓게 퍼진 전장을 우회한 특임대가 신속한 움직임으로 적진 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십여 명의 베테랑 기사들이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날뛰자, 후방을 경계하고 있던 적들의 전력이 삽시간에 무너지며 야만인들 사이에서 혼란이 빚어졌다.

“놈들이 당황했다!”

“이대로 천천히 밀어붙여!”

기세가 올라간 북부군은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세를 취하는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적들이 광폭화에 들어섰다!”

“대전사들이 온다! 조심해!”

순차적으로 문신주술을 활성화하며 북부군과 싸우던 야만인들 사이에서, 다른 놈들보다 포악한 기세를 줄줄 흘리는 야만인 대전사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 나왔다.

부아악! 쾅!

“커헉!”

맹공을 가해오는 대전사와 무기를 맞댄 기사 하나가,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신음을 흘리며 튕겨져 나갔다.

야만인들을 가뿐히 베어 넘기며 후방을 도는 식으로 혼란을 유도하고 있던 특임대원들도, 수명을 불태우며 달려드는 대전사들을 상대로는 고전을 면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둘씩 붙어!”

“몬스터들이나 낼 법한 괴력이야! 같은 인간을 상대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며 사상자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다만 북부 군단의 총력전에 가까울 정도의 규모로 펼쳐진 전장에 비해서, 의외로 죽은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개전 초기에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대부분의 부대가 수비적은 태세를 유지하며 전력의 보존에 주력했기 때문.

시야가 넓은 일부 장교들이 전투의 양상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어쨌거나 상급지휘관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기에 자리를 지키며 부하들을 독려하는 쪽에 집중했다.

이윽고 시간을 체크하며 전장을 지켜보던 일부 장교들이, 지휘부의 고위층만 알고 있는 작전에 따라 각 부대에 후퇴를 지시했다.

“퇴각! 이대로 물러난다!”

“제3보병대! 기사들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엄호하라!”

철판을 겹겹이 쌓은 것처럼 방어를 단단히 굳히고 있던 북부군의 진형에 변동이 생기며, 병사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무장을 갖춘 몇몇 병사들만이 적진 깊숙이 침투한 기사들과 아군 부대들의 퇴각을 보조하기 위해 남아, 급격히 위태로워진 자리를 이를 악물고 버티며 사수했다.

“서둘러! 길이 막힌다!”

“빨리 뛰어! 지금 못 뚫으면 다 몰살당하는 거야!

적진을 교란하며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니던 특임대원들이, 마지막으로 본인들의 생존을 위해서 남은 힘을 쥐어짜며 아군이 있는 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최정예의 실력을 지닌 그들이라 해도, 물밀 듯이 몰려드는 성난 야만인 전사들 사이를 빠져나가기란 쉽지가 않았다.

“우워어억!”

“징그러운 새끼들! 좀 떨어져!”

“망할, 아무래도 틀린 것 같군. 저승에서 보세, 친구들.”

“……나의 조국과 가문에 영광 있으라.”

야만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문자 그대로 뭣 빠지게 움직이던 특임대가,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 속에서 탈출을 포기하고 결사의 투쟁을 벌이려던 순간이었다.

허공에 그물이 펼쳐지는 듯한 궤적이 그려짐과 동시에, 야만인 전사들의 몸뚱이가 갈가리 찢겨지며 사방에 핏물로 이루어진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살아서 복귀하는 것까지가 그대들에게 내려진 임무였을 터. 특임대는 속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라.”

“사, 사령관님…….”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알론드가, 검을 늘어뜨린 채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보기에는 왜소한 체구의 노인에 불과한 알론드였지만, 그가 휘두르는 검의 위력은 야만인들이 느끼기에는 거의 자연재해에 필적할 정도.

마스터의 벽을 넘어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등반하고 있는 원숙한 노검호가 풍기는 기백은, 두려움을 모르는 야만인들조차 움찔하며 달려들길 주저하게 만들었다.

알론드의 도움을 받은 특임대는 가까스로 야만인들의 공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설산을 향해 진격해온 북부군은 별 소득 없이 물러나 군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크오오!”

“우워어억!”

침입자들을 격퇴한 야만인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아군의 후미를 보호하며 후퇴하던 알론드가,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들리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쯧!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모르겠구먼. 이러고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면, 자네나 나나 적지 않은 책임을 물게 될 게야.”

그렇게 한낮의 격렬했던 전투가 끝나고, 북부의 산맥에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부스럭. 푸드득!

나뭇가지 위에 앉아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올빼미 한 마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무언가의 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벗어났다.

곧이어 사람의 형상 하나가, 나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후우, 이런 암살자 흉내는 달갑지 않지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칼릭스가, 고양이의 눈처럼 빛나는 안광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외형이, 기존과 매우 다르게 변해 있었다.

통짜 털가죽을 이어붙인 옷을 걸치고, 땋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목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

영락없는 야만인들의 생김새 그 자체였다.

야만인들의 부족에 숨어들기 위해 신경 써서 변장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죽은 시체의 옷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쓰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소품을 사용해 꾸민다고 해도, 북부인과 대륙인은 얼굴의 골격 자체가 전혀 다르기에 완벽한 변장은 불가능해야 정상이다.

한데 지금의 칼릭스는 기존의 얼굴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고, 누가 봐도 북부의 야만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로 뒤바뀌어 있었다.

축골공(縮骨功)과 역용술(易容術)의 무공으로 신체의 뼈와 근육의 위치를 조절해, 북부인의 외형을 감쪽같이 흉내 내었기 때문.

칼릭스가 가진 무림의 기억은 대부분 역사 깊은 정종의 무학을 수련한 인물들의 경험으로 이루어졌지만, 괴이하고 음독한 사도방파의 무공을 익힌 무인도 드물게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외모를 바꾸는 기술도, 사신이라 불리며 무림에 수차례 혈사를 일으켰던 어느 악명 높은 살수의 무공 중 하나였다.

‘명예를 모르는 암살자 따위의 기술을 따라 한다는 점은 상당히 수치스럽군. 하지만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이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니.’

관절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바뀐 형태에 맞춰 몸을 움직여보던 칼릭스는, 이내 적응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야만인들의 흔적을 쫓아 산맥 안으로 깊게 파고들어, 예의 그 대족장이라는 녀석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놈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기에 그들의 사회에 완전히 스며들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근처를 돌아다니다 발견당해도 의심을 사지는 않으리라.

한 명의 야만인이 된 칼릭스가 살수의 무공인 잠행술을 펼쳐 그림자 사이를 옮겨 다니며, 외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북부의 산맥 안쪽으로 은밀하게 파고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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