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47화
수도의 마스터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제거해 버리지요.”
사로잡은 놈들을 그냥 전부 죽이자는 라울의 의견에, 칼릭스는 팔다리가 단단히 묶인 채 기절해 있는 도적들을 바라보았다.
강도짓을 하다가 잡혔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놈들이긴 하다.
그렇지만 도적들을 전부 베어 죽이는 것은, 칼릭스로선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범죄자들이라 해도 일단은 도시의 경비대에 넘겨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왕국법에 따르는 적합한 절차이기에, 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사로서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차 하나로 이놈들을 전부 연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만.’
죽은 놈들을 빼도 8명이나 되는 숫자이니, 6인승 마차에 도적들까지 태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칼릭스는 녀석들을 죽이지는 않고, 길 한쪽에 버려두고 간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저렇게 꽁꽁 묶어놨으니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 도시에 들어가면 치안대가 출동해 놈들을 데려갈 수 있도록, 바로 신고하는 것으로 처리합시다.”
“칼릭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혹시 모를 후환을 남겨두기보단 손에 피를 묻히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라울이었지만,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자인 칼릭스가 낸 의견이었기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강도현행범이니 치안대가 오기 전까지 건드리지 말라는 문구를 새긴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두고, 사람들은 도적무리를 길 한구석에 버려둔 채 마차에 올랐다.
도적들의 습격으로 시간이 약간 지체되기는 했지만, 칼릭스를 태운 마차는 이후 아무런 문제 없이 목적지인 수도로 향할 수 있었다.
묘한 눈빛으로 계속 자신을 힐끔거리는 라울과 조금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오는 플로라만 제외하면, 딱히 신경 쓸 만한 별다른 일이 더 일어나진 않았다.
“저는 이번에 페트라온의 사교계에 얼굴을 알리고자 수도행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원래는 가문의 마차를 이용했어야 했는데, 하필 이번에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두 분 다 다른 영지를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제 순서가 밀려 버렸지 뭐에요?”
“음.”
“저희 가문이 마차를 세 개씩 운용할 정도로 부유한 편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역마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 덕분에 스릴 넘치는 경험도 해보고, 이렇게 칼릭스 님과 인연이 생겼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후후!”
“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플로라의 이야기를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흘려듣던 칼릭스는,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창밖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도로 주변으로 간소한 차림새만 갖춘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슬슬 도시에 거의 도착해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펜시아의 수도 페트라온의 거대한 성벽의 모습이 나타나며, 칼릭스를 태운 마차가 도시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럼 레이디 플로라, 즐거운 여행 되시길 빌겠소.”
“앗, 칼릭스 님. 실례가 아니라면 머무시는 곳이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참석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애석하지만 군부와 관련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라, 수도에는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오.”
“아…….”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며 자신을 붙잡는 귀족 영애에게, 칼릭스는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플로라를 뒤로하고, 칼릭스는 본연의 목적에 따라 내성에 위치한 왕실 군무부를 찾아 방문했다.
고귀한 왕족들이 기거하는 왕성과도 인접해 있으며 국정을 돌보는 고위 대신들이 곳곳에 돌아다니는 내성 안쪽은, 당연하게도 보안이 삼엄하고 출입에 대한 통제가 굉장히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왕실에서 발급한 명령서나 신분증이 없다면, 귀족이라 해도 확인절차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장소.
그나마 칼릭스는 왕국군 복무기록이 있어 신원확인이 어렵지 않았기에, 방문목적을 전하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검문소를 지나갈 수 있었다.
“칼릭스 마이언 경이십니까?”
검문소를 지나기 무섭게 누군가 칼릭스를 불렀다.
“그렇소만?”
“아, 군사국에서 나왔습니다. 칼릭스 경께서 찾아오시면 바로 자신에게 안내하라는 국장님의 명이 있었는지라.”
이전에 이야기했던 그대로 알론드가 미리 언질을 해둔 모양인지, 왕국군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군사국에서 칼릭스의 방문에 곧바로 사람을 보내왔다.
군무부에는 군법에 관련된 사안들을 담당하는 군법국이나 병참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군수국 등 여러 부처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군 병력의 전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는 군사국은, 군무부 내에서 가장 강한 파워를 지닌 조직이었다.
‘알론드 님이 나에 대해 꽤 자세히 말해두신 모양이군. 하긴 마스터란 사실을 감출 이유가 없긴 하지.’
군무부의 총책임자인 군무대신의 바로 아래라 할 수 있는 군사국장이 이렇게 직접 찾는 걸 보니, 알론드가 자신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전달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행정관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칼릭스는 곧바로 군무부서가 자리한 건물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내 그를 호출한 군사국장과 대면하는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반갑구려. 본인은 부족한 몸이나마 군사국을 책임지고 있는 진페이 데오바란이라 하오.”
“칼릭스 마이언입니다.”
왕실 부서의 국장급 직책은 백작위의 귀족에게나 맡겨지는 자리이다.
그럼에도 그는 귀족작위가 없는 기사직에 불과한 칼릭스에게, 평대가 아닌 하오체의 경어법을 사용했다.
이는 칼릭스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임을 알고, 자신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 신분으로 대하겠다는 태도였다.
기본적으로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는, 마스터에게 최소 백작급에 준하는 대우가 주어진다.
아무리 혈통에 기반을 둔 신분제가 극명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능력을 지닌 자라면 당연히 존중을 받아 마땅한 법이었다.
“알론드 님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젊은 천재시라고. 그것도 실력에선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던데…….”
“크흠. 그분께서 조금 과장을 하신 모양입니다.”
“허허, 내가 아는 알론드 님은 허튼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시지. 물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조금 어려운 이야기기는 하오만.”
헛기침을 내뱉으며 민망한 기색을 보이는 칼릭스를 마주 보며, 군사국장 진페이는 묘한 표정과 함께 머릿속으로 그에 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칼릭스 마이언. 왕국군 소속이었지만 오러하트의 부상 문제로 은퇴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거늘……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겠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서른의 나이에 마스터가 되었다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워낙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기에, 칼릭스의 은퇴 이후 행적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를 통해 보고를 받았었다.
그렇지만 알펜시아 국립 아카데미의 하급교관으로 종사했다는 몇 년간의 기록이 전부였기에, 딱히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이력에서 도대체 어떻게 마스터의 실력자가 배출된 것인지, 굉장히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만약 마스터 알론드의 말이 아니었다면, 미친 소리라고 일축하며 쫓아냈을 터.
“아무튼…… 칼릭스 경이 알아야 할 사항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소.”
“경청하겠습니다.”
“칼릭스 경은 이번에 북부군의 특수전사령관으로 취임하신 알론드 님의 휘하로 배속되며, 그분의 직속병력인 특임대의 부대장으로 발령이 될 것이오.”
“특임대장……. 그렇군요.”
북부에 위치한 몇몇 군단들과는 별개의 독립된 작전권을 보장받는 특임부대의 수장.
납득이 가는 인사 조치였기에 칼릭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특임대라면 목숨이 두 개여도 부족한 위험한 작전들을 수행하는 부대. 내가 날뛰기엔 그만큼 적합한 자리도 없겠지.’
기실 국무부의 입장에선 난데없이 튀어나온 마스터인 그에게, 씌워줄 만한 감투가 그리 많지도 않을 것이었다.
본인이 군부의 고위직을 강력하게 원한다면 군단장의 자리까지도 얼마든지 오를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복무연한이나 연공서열 같은 제도를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스터라는 경지가 대단하긴 해도, 아직 그가 왕국을 위해 헌신하며 어떠한 공적들을 세운 것은 아니기 때문.
정상적인 절차대로 군단장급의 인사발령이 나려면 아무리 초고속 승진을 시킨다고 해도 몇 년은 필요할 텐데, 그런 코스는 칼릭스 본인도 그다지 밟고 싶지 않은 과정이었다.
‘차라리 최전방에서 확실하게 전공을 세워, 고위직에 오르기 위한 근거를 충족시키는 편이 훨씬 낫겠지.’
거기다가 칼릭스 역시 남들과 같은 출세에 대한 욕구를 가졌다고는 하나, 단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출세에 대한 욕구 못지않게 스스로의 경지를 더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도 강한 그였기에, 위험도 높은 실전을 원 없이 경험할 수 있는 특임대로의 발령은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론드 님과 더불어 전방에 빠르게 투입되길 원하는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먼저 하긴 했소만, 혹시 왕실에 머물러 있다가 정식으로 작위 수여식을 치를 생각은 없으시오?”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북부군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끄응, 단호하시군.”
사실 마스터씩이나 되는 인물이 왕국에 새로 출현했으면, 원래는 여러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대한 수여식을 거행하며 그의 존재를 공표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칼릭스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라 그런 준비를 갖출 시간 자체가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와 군부로의 복귀를 통보한 알론드가, 자리 하나 준비하라 말하고 북부로 떠나 버린 게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칼릭스에 대해 알아보고 급하게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니, 작위심사니 어쩌니 뭔가를 할 겨를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귀족의 임명이라는 것은 왕실에서 ‘너 오늘부터 귀족’이라 말한다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식으로 왕국의 역사에 기록되기 위해서 뒤따르는 여러 행정작업을 거쳐야 하고, 기존 귀족파벌들의 무수한 정치적인 움직임이 동반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아마 오늘의 만남도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제대로 준비를 갖췄더라면, 군사국장이 아니라 군무대신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칼릭스와 면담을 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또한 국왕과의 알현자리도 거쳐야 했을 테고 말이다.
‘그런 절차들을 다 거치려면 못해도 한 달은 발이 묶여 있어야 할 텐데. 몇 번씩 번거롭게 시간을 버리느니 나중으로 몰아서 처리하는 편이 낫겠지.’
물론 그런 것들이 전부 영예로운 행사이기는 하나, 따지고 보면 작위 수여라는 것은 형식적인 의례일 뿐.
생략한다고 해서 그가 받는 마스터로서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장 아무런 공적도 없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작위라고 해봐야, 후대에게 물려줄 수 없는 단승 백작 정도가 전부일 터.
그럴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전쟁터로 떠나 전공을 세워, 실적을 가지고 제대로 대접을 받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래도 남자가 출세를 논하려면, 당당한 귀족가문으로 일가를 세울 수 있는 세습 작위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작위 수여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유를 두고 진행하도록 하지요.”
“알겠소이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긴 하오만.”
칼릭스에게 그가 받게 될 대우를 비롯해 기타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전달하던 군사국장은, 잠시 말을 흐리다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자대로 배치되기 전에, 칼릭스 경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한 사람이 있소이다.”
“음? 어떤 분이?”
“그게…… 아마 그쪽으로도 연락이 들어갔을 테니,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 의아해하던 칼릭스가, 문득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강렬한 기척에 흠칫하며 기감에 정신을 집중했다.
집채만 한 거대한 짐승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듯한 느낌.
대놓고 이 정도의 기세를 흘리고 있으니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로군.’
마스터의 경지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왕성이 위치한 수도에 그만한 인물이 머물러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이어서 거구의 한 사내가, 칼릭스가 자리한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