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46화
마부가 마차에 묶인 말을 줄에서 풀러, 도적이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끌고 갔다.
“그만! 거기 멈춰서 말이 움직이지 않게 꽉 붙잡고 있어라!”
“아, 알겠수다.”
귀족으로 보이는 소녀를 뒤에서 팔뚝으로 감싼 채, 도적은 주변을 경계하며 슬금슬금 말이 있는 쪽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녀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라울을 힐끔 쳐다본 칼릭스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도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엇! 이, 이봐!”
“가까이 오지 마! 이년이 죽는 꼴을 보고 싶나!”
라울과 도적이 둘 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칼릭스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소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댄 도적의 손이 어찌나 힘을 꽉 주고 있는지, 핏줄이 불거진 채 바들바들 떨리는 게 멀리서도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경고를 발하는 도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눈빛에 짙은 살기가 맺히게 될 때쯤, 칼릭스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허리춤에 맨 칼집을 풀러 손에 들었다.
“시, 싯팔! 뭐 하자는 거냐?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욕설을 내뱉던 도적의 입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칼릭스의 검에 시선이 팔리며 순간 머릿속이 멍해진 탓이다.
한눈에 봐도 고가일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최고급품의 검.
장물아비에게 헐값으로 처분해도 한동안은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경계로 가득하던 그의 눈에 스멀거리는 탐욕의 빛이 피어올랐다.
“인질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이 검을 주겠다.”
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은 칼릭스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도적에게 말을 걸었다.
“그, 그걸 준다고?”
“인질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고 풀어준다고 약속한다면.”
“……말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보내겠다. 무, 물론 곧바로 쫓아와서는 안 된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적을 향해 검집 채로 검을 툭 던져주었다.
두어 걸음 앞에 떨어진 검을 힐끔 바라 본 도적이, 칼릭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년아! 뻣뻣하게 있지 말고 다리를 굽혀!”
“흐윽!”
이어서 거리가 좁혀지자 발을 뻗어 검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도적이, 그것을 줍기 위해 소녀를 다그치며 자세를 살짝 낮춘 순간.
칼릭스의 신형이 벼락같은 속도로 도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헉!”
깜짝 놀란 도적이 단검을 쥔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그보다 한발 빠르게 칼릭스의 주먹이 목표를 향해 파고들었다.
퍼억!
“안 돼! 이런 미친 새끼!”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라울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칼릭스가 무자비한 주먹질로 경호대상인 소녀의 복부를 가격하는 광경을 목도했기 때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자로 보였기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가 적을 제압하기 위해 인질 따윈 무시하고 공격하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심정이 들었다.
“이 개자식!”
오러를 한껏 끌어올린 라울이 분노를 터뜨리며 칼릭스의 등을 향해 무기를 내리쳤다.
그러나 몸을 반쯤 돌린 칼릭스가 스윽 하고 손을 뻗자.
튼튼한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적도 단칼에 반 토막으로 가른 전적이 있던 그의 일격이,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칼릭스의 손아귀에 붙잡혀 세워졌다.
“헛!?”
“진정하시오.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무, 뭔 개소리를!”
극도로 당황하여 잠깐 뇌정지가 왔던 라울이, 칼릭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욕을 내뱉었다.
다량의 오러를 운용한 것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는데, 그런 속도로 내지른 주먹에 맞은 자신의 경호대상이 다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울!”
“만약 저분이 죽게 된다면, 당신도 무사…… 어어? 으잉?”
총총걸음으로 달려와 자신을 끌어안는 작은 주인의 모습에, 라울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시야 속으로 인질극을 벌였던 도적이, 저 멀리 거품을 물고 나가 떨어져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반면 멀쩡한 모습으로 달려온 소녀 쪽은, 전혀 부상자라는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분명 무사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전혀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많이 놀라긴 했는데, 몸은 멀쩡해.”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타격이 깊게…… 끄응, 상처가 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꺅! 제정신이야? 이런 곳에서 옷을 벗기기라도 할 셈이냐고!?”
“아…….”
복부에 부상이 생겼는지 보겠다며 옷을 잡아당기려던 라울이, 찰싹하고 후려치는 소녀의 손길에 동작을 멈추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다시 허리에 찬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하며 실소를 흘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호들갑을 떨만한 상황이긴 했지.’
발경(發勁)에 대한 이론은 이곳 대륙의 고급무술들에도, 체계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씩은 접목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인체에 해박한 세세한 지식과 마스터라 해도 쉬이 따라 하기 힘든 정교한 오러 컨트롤 능력이 없다면, 칼릭스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력(勁力)을 발해 적을 타격하는 기술은 상상으로나 가능한 수법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이딘 자작가문의 딸, 플로라 세이딘이 은인께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경호원 라울과 가문의 이름을 밝힌 소녀 플로라가, 잠시 자신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다가 칼릭스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진 사람이라 해도 신분이 천한 이에겐 머리를 숙이지 않지만.
플로라는 칼릭스가 명가 출신의 기사일 것이 분명하다는 언질을 라울에게 듣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낮추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음. 다급한 상황이라 적을 제압하기 위해 다소 무례한 방식을 취했소. 미안하게 되었군.”
“아뇨, 저를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이셨는걸요. 그리고 전혀 아프지도 않았답니다.”
인질로 붙잡혔던 플로라는 솔직히 뭐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기에, 자신과 도적을 동시에 공격한 것처럼 보였던 칼릭스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어느 순간 칼릭스가 불쑥 다가왔다가, 무언가 툭 하고 배를 밀쳤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군. 칼릭스 마이언이오.”
“마이언? 아…… 죄송해요. 제가 아직 견문이 짧아 어느 가문인지 바로 떠올리지 못하겠네요.”
“딱히 이름이 알려진 가문은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소. 그보다 이놈들을 처리하고 어서 출발하도록 하지.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 이런 곳에서 발이 묶여 있어선 곤란할 테니.”
상대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칼릭스는 그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쓰러진 도적들의 옷을 벗기고 그걸 밧줄 삼아 팔다리를 구속하는 칼릭스를 보며, 플로라가 자신의 경호원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되게 무뚝뚝한 분이네. 마이언이란 성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한 눈치인 걸 보면, 몰락한 귀족가의 사람인 걸까?”
“글쎄요. 사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출신이 어디든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아까 전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칼릭스의 모습을 떠올린 라울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도적들을 포박하는 칼릭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강철도 잘라내는 오러가 담긴 검을 맨손으로 잡다니, 기사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린애가 휘두른 힘없는 검이라면 나도 손으로 낚아챌 수 있겠지. 그럼 저자와 나의 실력이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 라울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느라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라울 본인은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선 검사다.
아무리 그 안에서 또 급이 나뉜다고 해도, 같은 익스퍼트끼리 과연 그렇게까지 수준의 격차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싶다.
‘설마…… 마스…… 에이, 아니겠지.’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지만, 라울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을 떨쳐내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저 젊은 기사가, 아무리 그래도 공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경지에 도달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아- 아빠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헷…… 뭐 아프지는 않았지만.”
“……예? 뭐라고 했습니까?”
옆에서 무언가 이상한 말이 들려와, 라울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작은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냐, 그냥…… 내 몸을 저리 거칠게 다룬 남자는 처음이라…….”
자신의 복부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플로라를 보며, 라울은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녀의 얼굴이 옅은 홍조로 물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과연 자신의 착각일까?
‘허, 거참 지랄이 났네.’
보수가 상당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기계약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었던 라울은, 귀족의 호위 따위는 그냥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진심으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철없는 귀족 자제를 계속 따라다니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딸랑.
“어서 옵…… 어이쿠! 하룬빌가에서 오셨습니까?”
“그래. 물건은 어디 있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칼릭스가 검을 구입했던 아르거스의 한 무구점.
그곳을 방문한 화려한 문양이 음각된 갑주로 몸을 뒤덮은 기사의 말에, 무구점 주인은 다급히 몸을 움직여 카운터 위로 네 자루의 검을 올려놓았다.
검을 하나하나 뽑아 천천히 살펴본 하룬빌의 기사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괜찮군.”
“흐흐, 그야 물론입죠.”
“그런데…… 명장께서 혹시 어디 편찮으신가?”
“예? 그럴 리가요. 아버지께선 여전히 건재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목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주인에게, 기사가 차가운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최근에 이곳 공방으로 흑철이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그건 명장께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건가?”
“아…… 그, 그게…….”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지적하는 기사의 물음에, 주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젠장. 역시 모를 리가 없나.’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아다만타이트나 오리하르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일반 강철보다 오러에 잘 견디는 성질을 지닌 흑철 역시 나름대로 레어메탈에 속하는 고급의 자원이다.
비록 합금으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소량에 불과했다지만, 그런 흑철의 거래 내역에 대해 하룬빌가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리가 없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문제가 커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무구점 주인은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그, 그렇습니다.”
“이봐, 주인장. 물론 자네 공방과 우리 가문이 명확하게 어떤 계약을 체결한 것은 아니니, 상품의 취급과 판매를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만…….”
“예, 옙.”
“그래도 여태까지의 관례라는 게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서운하지 않겠나?”
싸늘한 기색을 풍기며 말하는 기사의 모습에, 주인은 거북이가 된 것처럼 머리를 파묻듯이 몸을 오그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돈 욕심을 내고자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기사가 무력시위까지 해가며 검을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지라.”
“무력시위? 협박을 당했다는 말인가?”
“협박…… 까지는 아니긴 한데…… 저, 저쪽의 방패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는, 자신 쪽이 더 뛰어나다는 듯이 말을 해서…….”
“뭐? 하…… 자세히 설명해 보게.”
눈매를 좁히며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기사의 모습에, 주인은 딸꾹질을 하며 카운터 밑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여, 여기, 끅! 이 자루에…….”
허겁지겁 내미는 자루를 받아든 기사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잡동사니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철쪼가리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꺽! 아, 아닙니, 흐끅!”
짜증을 담은 눈빛으로 주인을 노려보던 기사가, 자루를 뒤집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 부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고철들.
어떻게 봐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었다.
‘그냥 부서진 방패 조각으로 보이…… 흐음…….?’
거기까지 생각한 기사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멈칫거렸다.
무구점 주인이 딸꾹질을 참고자 입을 틀어막고 바라보는 가운데.
몸을 숙인 기사가 조각난 방패의 파편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 절단면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퍼즐을 맞추듯이 조각들을 하나하나 움직여, 방패를 본래의 형태에 맞게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각들을 원형에 맞춰 늘어놓은 기사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본인이 만들어낸 복원품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저…… 기, 기사님?”
한참 동안 방패 조각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기사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피던 주인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주인을 무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탓에 외부의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검술이…… 대체 누구냐? 우리 하룬빌 외에 이렇게나 강렬한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자가…….’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정체불명의 검흔에 몰두하고 있던 기사의 얼굴 위로,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뭉쳐 턱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