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43화
후욱-
강하게 날숨을 불어낸 칼릭스가 고개를 움직여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바라보았다.
몰살당한 웨어울프들 사이에 널브러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넝마 짝이 된 알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전멸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파를 제거했으니 목적은 달성했군.’
상당히 수를 줄이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웨어울프들이 있긴 하다.
칼릭스가 아니라 마법사들을 노리며 주위를 맴돌던 녀석들이 대략 서른 마리가량.
하지만 놈들은 시체들 사이로 오연하게 서 있는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가랑이 사이로 꼬리를 말며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끄응, 깨갱.
칼릭스가 의도한 대로 두려움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기에, 남은 웨어울프들은 결국 투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대량의 오러를 쏟아부은 탓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칼릭스가, 달아나는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싸워야 한다면 싸우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최적의 상태가 아닌 몸으로는 실수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기에.
잔당들을 이대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그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바람직한 결과였다.
“칼릭스 님!”
“대, 대단하십니다!”
직접적인 전투를 칼릭스에게 맡기고 몸을 보호하는 데 전념했던 마법사들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달려와 칼릭스를 향해 찬양의 말을 늘어놓았다.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하룬빌 가문의 데이먼 경도 이런 위용을 보이진 못할 겁니다!”
“엄청난 검술…… 어…… 몽둥이술……? 크흠, 아무튼 대단한 무술이었습니다!”
“……그만. 떠드는 건 그만하고 정리나 합시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그럼 저희가 뒷정리를 할 테니, 칼릭스 님은 편히 쉬고 계십시오!”
“아, 몸부터 씻으셔야 하겠군요. 제가 돕겠습니다!”
마법사 두 사람이 디그 마법으로 땅을 파서 웨어울프들의 시체를 차곡차곡 쌓는 동안.
남은 마법사 한 명이 몸종처럼 달라붙어, 칼릭스를 향해 갖가지 편의마법들을 사용했다.
클리닝 마법으로 몸에 묻은 피와 오물들을 닦아내고, 워시와 드라이 마법으로 의복까지 깨끗하게 빨고 말려낸다.
지저분했던 상태에서 금방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변한 칼릭스가,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깨끗하게 만들어준 것 고맙지만, 이것들을 치우려면 어차피 다시 몸이 더러워질 것 같은데 굳이…….”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혀 도와주실 필요가 없으니, 들어가서 잠깐이라도 더 주무시지요.”
“맞습니다! 힘들게 저희를 지켜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저희끼리 해야 할 일입니다!”
“흠…… 그럼 부탁하겠소.”
피곤하기도 했고 마법사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칼릭스는 뒷정리에는 그들에게 맡기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원래 쓰던 천막은 망가졌지만 마법사들이 그들의 천막을 사용하라고 양보해 주었기에, 다시 수면을 취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날이 밝은 뒤, 칼릭스와 마법사들은 기존의 예정대로 숲 안쪽의 구역들에 대한 탐색을 실시했다.
“오! 불그람 자생지가 여기에도 있었군.”
“안전만 확보된다면 이 근방까지 채집 구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겠군요.”
숲 안쪽에는 몇 가지 위험요소들이 있긴 했지만, 칼릭스 일행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자잘한 소형 몬스터들은 마법사들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수준들이었고, 간혹 튀어나오는 웨어울프들이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칼릭스를 보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기에 딱히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새벽에 도망쳤던 잔당들인 모양이군.’
어쨌거나 조사는 순조로웠고 마법사들은 하루 종일 숲을 돌아다니며, 채집 구역 확장을 위한 몇 가지 마법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밤새 뒷정리를 한 이후로 거의 쉬지 않고 돌아다닌 마법사들의 얼굴엔 상당한 피로감이 흐르긴 했지만, 다들 즐거워하는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연신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이만하면 꽤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어.”
“물론이지. 거기에 웨어울프 사체들은 또 어떻고? 그만한 양의 부산물이면 몇 달 치 실적은 공짜로 채운 거나 마찬가지지!”
“가기 전에 마법진을 다시 한번 점검하자고. 벌레가 꼬이지는 않게 해뒀지만, 괜히 짐승들이 파헤쳐서 보관해둔 사체들이 훼손되면 안 되니까.”
“흐흐, 웨어울프들이 그리 몰려왔을 땐 정말 눈앞이 깜깜했었는데. 칼릭스 님 덕분에 위기가 오히려 행운으로 변했으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칼릭스의 활약으로 많은 이득을 챙기게 된 마법사들은 그를 아주 극진히 모셨고.
임무를 끝마치고 도시로 돌아온 뒤에는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 칼릭스에게 은화가 가득 찬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헤헤. 칼릭스 님. 변변치 않지만 받아주십시오.”
“이게 무엇이오?”
“저희가 칼릭스 님 덕분에 목숨도 건지고 맡은 임무 이상의 공로를 세우게 되었으니……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성의를 담았습니다.”
“나 역시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소.”
“그래도 저희를 지켜주시느라 검까지 잃으셨는데…….”
“정말 약소한 금액이니 그냥 마음이다 생각하고 받아주시지요.”
“으음…….”
이번 의뢰는 빚을 갚기 위해 처리했던 일이니 따로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검을 새로 사려면 돈이 필요하긴 했다.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고맙게 받겠소.”
결국 칼릭스는 못 이기는 척 마법사들이 찔러주는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의뢰를 끝마치고 트리우드 학파와 결별한 칼릭스는, 돈주머니의 금액을 정확히 세어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소하다고 하기엔 제법 상당한 금액이었기 때문.
‘역시 마법사들이 돈을 잘 벌긴 하나 보군. 이 돈이면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검 한 자루를 사기엔 충분하겠는데.’
도시 내의 무기점에서 적당한 검을 사서 사용할 생각이었던 칼릭스는, 예정을 바꿔 무기 구입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역마차에 올랐다.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에도 적당히 견딜 수 있는 소위 명품으로 취급되는 검은,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구할 수 있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다.
‘이 도시에서 그만한 물건을 구하긴 어려울 테고, 마침 북부 쪽으로 향하는 길에 아르거스가 위치해 있기도 하니…….’
아르거스는 칼릭스의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대도시다.
질 좋은 철광석은 물론이며 여러 희귀금속들이 채굴되는 광산들, 그리고 그걸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 있어 무구 제작의 메카로 불리는 도시이기도 했다.
당장 무기가 없다고 해도 어지간한 일로는 그가 위험에 처할 리 없을 테니, 칼릭스는 일단 돈을 아꼈다가 아르거스에서 마음에 드는 검을 찾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차 바깥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며.
칼릭스는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이 자리해 있는 도시를 떠나갔다.
* * *
“하아, 교관님이 다시 보고 싶다.”
“……응. 나도 그래.”
베네트의 푸념을 들은 아즐린이, 휘두르던 검을 잠시 내리고 그녀의 혼잣말에 동조했다.
칼릭스의 반 생도들은 그가 떠난 뒤로, 뿔뿔이 나뉘어 각기 다른 반으로 편입이 되었다.
아즐린과 베네트 역시 반이 나뉘었지만 그녀들은 정규수업이 끝나면 이전처럼 한 자리에 모여, 칼릭스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 배웠던 무공들을 수련하는 시간을 유지했다.
반이 바뀌어도 학부에서 기숙사의 방까지 변경시키진 않았기에, 룸메이트인 두 사람은 여전히 꼭 붙어 다니며 스승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우리 반 담임은 최악이야. 매번 근성이란 단어만 입에 달고 다니는데,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너도 그래? 내 쪽도 마찬가지야. 대련 중에 잘못 넘어져 무릎이 완전히 돌아간 애가 있었는데. 다쳤다고 멈춰서는 강해질 수 없다면서, 근성이 있으면 아픔도 견디며 싸울 수 있다고 다그치더라.”
“미친 거 아니야? 그런 부상을 빨리 치료 안 하고 뒀다가 제때를 넘기면, 영구적인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렇다고 칼릭스 교관님처럼 자기가 포션을 구해다 줄 것도 아니면서.”
칼릭스에 비하면 능력에서 크게 비교가 되는 하급교관들에 대해 잠시 성토하던 두 사람은,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조금 전의 푸념을 다시 반복했다.
“교관님이 그리워…….”
“응…….”
“어이, 너희들.”
기운 빠진 얼굴로 서 있던 두 사람이, 그들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베런? 하아, 지긋지긋하다. 또 아즐린이랑 한판 붙자고 찾아온 거니?”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니 참아줄래? 어차피 매번 이기기만 해서 이제 연습도 안 되는 것 같고.”
“으윽…… 킁! 오늘은 그런 용건이 아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을 뿐.”
팩트를 담은 언어적 폭력에 당해 움찔했던 베런이, 콧방귀를 뀌고는 자신의 할 말을 늘어놓았다.
“나 아카데미를 그만둘까 한다.”
“으잉? 갑자기 무슨…….”
“어째서?”
평소에는 베런이 뭘 어쩌든지 알 바 아니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가 뱉은 말이 워낙 심상치 않았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계속 배운다고 해봐야, 칼릭스 교관님이 가르쳐 주신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교육을 받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에 상급반에 들어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
“……그래서?”
“내 인생을 그분에게 걸어볼 생각이다. 너희도 소문은 들어서 알겠지? 얼마 전 그만두신 1군 학부장 알론드 님과 교관님이, 꽤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소문.”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기에 아즐린과 베네트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을 써서 바깥소식을 좀 알아봤는데, 바로 며칠 전에 알론드 님께서 북부의 전선으로 합류하기 위해 떠나셨다고 하더라.”
“그래서 뭐?”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칼릭스 교관님은 분명 우리에게 현역으로 복귀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잖냐.”
“……교관님도 전 일 학부장님과 함께 북부로 가셨을 거란 말이야?”
“그래. 알아보니 교관님께서 일을 그만두신 뒤로, 며칠 동안 알론드 님의 자택에서 머물러 지내셨다더라. 두 분이 원래부터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상당한 친분을 가진 관계일 것이라 여겨지는 두 사람.
다른 여러 가지 여건들을 따져 봐도, 베런의 추측은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던 베네트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네 자퇴하고 무슨 상관인데? 너도 뭐 북부전선으로 가서 입대를 하겠다고?”
“그래. 칼릭스 교관님을 찾아가 종자(Squire)로 받아달라고 할 거다. 야전에서 그분을 따라다니면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지.”
“뭐?”
“종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베네트와 아즐린은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종자는 일종의 도제 시스템으로, 현역 기사의 수발을 들며 온갖 잡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시종 겸 제자를 뜻하는 호칭이다.
그렇게 밀착된 생활을 하면서 해당 기사에게 교육을 받아, 본인 역시 기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과정을 밟는 것이다.
보통은 혈연이나 지연 등의 인맥을 통해 아주 어릴 때부터 시동(Page)으로 들어가 귀족사회의 예법을 배우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종자가 되어 무술을 전수받으면서 자잘한 잡무들도 떠맡게 된다.
그러다가 후견인에게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 추천을 통해 견습기사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고, 공적을 쌓아 자격이 있는 귀족들의 눈에 띄게 되면 정식으로 기사서임을 받게 되는 것.
“종자라니…… 기껏 들어온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그러나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시스템이기는 하지만,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로 종자라는 선택지는 인기가 크게 시들어버린 노선이기도 했다.
어린 종자들이 위험한 현장에 자주 몸을 들이대는 기사의 뒤를 따르다 보면, 필연적으로 사고를 당해 죽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
아무리 백 번의 연습보다 한 번의 실전에서 배우는 것이 더 클 수도 있다지만, 허망하게 죽고 나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실제로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뒤로 왕국에서 배출하는 기사의 수가 대폭 늘어나며, 새로운 시스템이 기사를 양성하는 데에 더 안정적인 효과를 지녔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했다.
“하지만 교관님께서 널 종자로 받아주시리란 보장이 없잖아?”
“그래. 한 번 아카데미를 떠나면 일이 잘못되어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텐데.”
아카데미에서는 사유가 무엇이든 스스로 떠난 생도의 복학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기사의 종자로 들어가기 위해 안전한 교육장소를 포기한다는 건 그야말로 뒤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거지. 일반 병사로 복무해서라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을 노려보는 수밖에.”
“미쳤어…… 너무 무모한 계획이잖아.”
“헹! 그래도 교관님께 특별히 가르침을 받았던 너희 두 사람이라, 이야기라도 해줄까 싶어서 말해본 건데. 칼릭스 교관님의 종자가 될 수만 있다면, 오히려 1군 학부보다도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건 나뿐이었나?”
“……으읏.”
“그야 교관님이라면…….”
두 사람은 베런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없어진 칼릭스의 반 일, 이, 삼 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었던 그들은, 칼릭스에 대한 신뢰도가 유달리 높은 생도들이다.
특히나 입학 당시엔 평범함에도 못 미쳤던 아즐린과 베네트는 자신들의 실력을 이렇게 끌어올려 준 칼릭스에 대해, 거의 신앙이나 마찬가지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때? 흥미가 있다면 따라오든가. 어차피 가는 길이니 특별히 둘 정도는 데려가 줄 수 있다.”
“……너, 사실 혼자서는 확신이 없어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우리가 가면 교관님도 더 고민해 보실 것 같으니, 그 참에 자기도 한 발 걸쳐보겠다는 거지?”
“시, 시끄러워!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건데?”
소리를 빽 지르는 베런에게서 눈을 돌리며, 베네트와 아즐린은 침묵을 유지한 채 서로와 시선을 교환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미친 소리에 가깝지만, 너무나도 마음이 끌리는 제안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