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36화
정리
“훈련에 앞서 고지할 사항이 있다. 본 교관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근시일 내로 교직을 그만둘 예정이다.”
“헉!”
“그런!?”
갑작스러운 통보에 깜짝 놀란 칼릭스의 반 생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특히나 그에게 가장 많은 지도를 받고 있었던 아즐린과 베네트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들은 건가 싶은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내 수업에 따라온다고 고생들이 많았다. 이후에는 아마 두세 명씩 인원을 나누어 다른 반으로 편입되게 될 텐데, 다른 방식의 교육을 받게 되어도 내게 배운 것들을 잊지 말고 꾸준히 수련하길 바란다.”
칼릭스의 지도가 여타 교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생도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최근까지 쭉 반 순위 2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며 칼릭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따르던 베런이, 앞으로 나서면서 그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갑자기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너희들도 대강 알고는 있겠지만, 나는 부상 때문에 현역에서 물러나야 했던 왕국군 기사 출신이다.”
“네.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부상을 회복했고 다시 일선으로 복귀할 예정이라, 더는 교관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아…….”
1군도 아니고 2군, 게다가 상급도 아닌 하급교관에 불과한 자리다.
그깟 교관보다 훨씬 대우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길에 다시 오르겠다는데, 제자 된 입장에서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나.
“추, 축하드립니다. 교관님.”
“음. 고맙다.”
“제가 나중에 반드시 기사가 되어서…… 교관님께 검술을 사사받은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다고 널리 퍼트리고 다니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잘 부탁하마.”
아쉬움이 많았지만 생도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칼릭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고, 그렇게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수업이 진행되었다.
정규 일과가 끝난 후.
일반 생도들은 칼릭스에게 예를 표한 뒤 눈치를 보다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가 특별히 가르쳤던 소수의 인원들은 자리에 남아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교관님! 저를 기사로 만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떠나 버리시면…….”
“내가 했던 말은 틀림없이 지켜질 것이다, 아즐린. 지금의 성장세라면 넌 졸업하기 전에 충분히 익스퍼트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아니지, 오히려 예상보다 성장이 더 빠른 것을 감안하면, 2년 차에 조기졸업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구나.”
3년의 기간을 전부 채워도 익스퍼트의 문턱을 구경하지 못하는 이가 태반이지만, 아주 드물게 재학 도중 익스퍼트급에 도달하는 생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기사급의 실력을 갖춘 생도를 아카데미에서 더 붙잡아 둘 이유가 없기에.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동안의 이력과 관계없이 자격을 인정해 주고, 학부장이 직접 추천서를 쥐여주며 조기졸업을 시켜주는 것이 이곳의 관례이다.
칼릭스가 전수해 준 무공과 그에 어울리는 재능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노력이 더해진 덕분에, 아즐린은 2군 학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10년에 걸쳐 한 명쯤 나올까 말까 한 조기졸업을 언급하기에 충분한 수준.
“하지만…… 저는 교관님이 봐주지 않으시면…….”
“그만! 언제까지 징징거릴 셈이냐. 어차피 지금이 아니어도 내년이 되면 상급반으로 반을 옮기게 되었을 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처럼 내가 계속 너희들을 담당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아즐린을 보며, 칼릭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왜 그리 자신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이미 너에게 기사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굳이 내가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배운 대로만 꾸준히 단련한다면, 아즐린 너는 충분히 제 한몫을 하는 우수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네에.”
“너도 마찬가지다 베네트.”
칼릭스는 아즐린처럼 대놓고 떼를 쓰진 않았지만, 표정이 안 좋기로는 매한가지인 베네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즐린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너 역시 기사가 되기엔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 나중에 졸업을 하고 나면 네가 익힌 검술의 특수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보직을 찾아보거라. 그럼 동급의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더 많은 기회를 손에 넣을 수가 있을 테니.”
“예, 교관님. 진로에 대해선 이제는 딱히 걱정하진 않지만…….”
“음? 잘 안 들린다. 똑바로 말하도록.”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숙인 베네트가 언뜻 실연의 아픔이니 첫사랑은 역시 이뤄지지 못한다느니 하며 작게 중얼거린 듯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칼릭스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수롭잖게 흘려 넘겼다.
“그래.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혼란스러운 건 알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되었으니…… 내가 없어도 게으름피우지 않고 성실히 훈련에 임하리라 믿겠다. 너희들이 무사히 졸업하여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길 기원하마.”
침울해하는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칼릭스는 상급 학부로 찾아가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교분이 있는 닐슨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가는구만. 그래, 뭐. 너 같은 뛰어난 인재가 이런 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어디로 갈 생각이냐?”
“여기저기 알아봐야 하겠지만, 아마 북부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지 싶습니다. 알론드 님께서 그쪽으로 기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며, 자리를 알아봐 주시겠다고 하기도 했고…….”
“이 자식. 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더니만 언제 또 그리 친분을 만들었대? 하긴, 그 실력이면 마스터의 눈에 드는 것도 당연한가.”
“하핫……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혹시 선배님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칼릭스가 넌지시 함께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자, 닐슨은 쓴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얌마, 내가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노린다고 찬바람 맞아가며 그 고생을 또 하겠냐. 뭐 대단한 전공을 세울만한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제 곁에 계시면 그래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릴 수는 있을 겁니다만.”
“아 됐다니까. 난 여기서 한 십몇 년쯤 더 해 먹다가, 퇴직금 두둑하게 받아서 편하게 노후를 보낼 거야. 네 덕분에 요즘 배 나온 것도 없어지고 복근이 다시 잡히고 있으니, 더 나이를 먹어도 기량이 떨어졌다고 쫓겨날 일은 없을 것 같다. 흐흐!”
“그렇습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쯤 데려가 부관으로 옆에 둘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닐슨이 다시 야전 생활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 것 같아, 칼릭스는 굳이 더 그에게 일선으로의 복귀를 권유하진 않았다.
“그럼 나중에 저희 애들이 상급반으로 올라갈 때, 선배님이 걔들을 좀 맡아서 관리해 주십시오. 다른 인간들은 영 미덥지가 않아서.”
“아, 베네트하고 그…… 아젤린? 그렇게 두 녀석들 말하는 거지?”
“아즐린입니다. 거기에 베런이라는 생도까지 추가하시면 되고요.”
“베런? 걔가 너희 반 2순위인가 그랬지 않았냐?”
“맞습니다. 앞의 두 녀석이야 제가 전수한 게 있으니 알아서 잘 크겠지만, 베런은 선배님이 가까이 두고 키워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을 맡아달라는 칼릭스의 말에, 닐슨은 손가락으로 턱 아래를 살살 긁으며 대답했다.
“야야, 너희 반 최상위권 세 명을 내가 무슨 수로 다 데리고 오겠냐? 실력 좋은 생도라면 상급교관들도 다들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으잉?”
닐슨의 그런 걱정은 칼릭스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2군 학부장을 찾아가 검에 힘 한번 주면 되는 일이었기에.
“허억!? 오, 오러 블레이드! 어떻게…….”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그동안 사정이 조금 있었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으허…… 그, 그렇군요. 어쩐지 알론드 님께서 이상하게 신경을 쓰시는 것 같더라니…….”
“음. 저와 알론드 님은 이제 사승관계이기도 합니다.”
“아! 그런 겁니까…….”
오러 블레이드를 직접 목격하고 잔뜩 주눅이 들었던 이 학부장이, 칼릭스의 말에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가르침을 준 쪽이 반대이긴 하지만, 칼릭스는 자신이 알론드의 제자라고 여기는 그의 오해를 굳이 바로잡진 않았다.
“떠나기 전에 부탁하나만 드립시다.”
“마, 말씀하시죠.”
알펜시아 같은 중소국가에서 마스터급의 기사라는 존재는, 원한다면 어렵지 않게 고위귀족의 작위에 오를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아무런 전공이 없어도 언제든지 단승 백작위 정도는 쉽게 받아낼 수 있는 마스터급의 실력자임을, 칼릭스가 눈앞에서 스스로 증명했기에.
이 학부장은 더 이상 그에게 하대를 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닐슨과 이야기했던 제자들의 상급반 생활에 대한 건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학부장에게 밀어붙일 수가 있었다.
“닐슨 교관의 반으로 말입니까. 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뭐 이 정도쯤이야…….”
학부장실에서 나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칼릭스는 아카데미에서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전부 끝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알론드 쪽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뿐.
얼마 뒤에 그런 칼릭스에게로 알론드가의 집사가 찾아와, 부탁해두었던 일이 막힘없이 진행되었다는 연락을 전해주었다.
“트리우드 학파라고 해서, 본국에 위치한 마도협회 내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규모를 지닌 단체가 있습니다.”
“들어본 이름이긴 하군요.”
“그곳의 현 수장이신 분과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아, 그런데 혹시 지난번 습격자의 일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 조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습격자의 정체에 대해서 명확한 단서가 나오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자신이 휘말렸던 사건이기에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긴 했지만.
굳이 뒷일까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여겨, 칼릭스는 집사의 대답을 들으며 그날의 습격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 일보다는 자신이 과연 영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보는 것이,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딱히 일 처리를 뒤로 미룰 이유가 없던 칼릭스는 곧장 집사와 함께 마차에 올랐고, 그대로 알론드가 연결해주기로 했던 협회 쪽의 인물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 * *
“사이몬이라 합니다. 알고 오셨겠지만, 부족하게나마 트리우드 학파를 이끌고 있지요.”
“칼릭스 마이언입니다.”
“알론드 공의 소개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용건이신지 바로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사이몬이라 이름 밝힌 마법사는 질질 끄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지, 칼릭스에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향을 드러냈다.
칼릭스 역시 쓸데없이 돌려 말할 이유가 없기에, 그에게 자신의 요청을 꾸밈없이 전달했다.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마나가 깃든 재료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로 마법사분들이 연구를 위해 다루시는 그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호오! 기사분으로 보이시는데 그런 마법재료를 찾으신다니, 드문 경우이긴 하군요. 그런데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저희가 취급하는 마법재료라는 게 고작 몇십 종에 그치진 않습니다만.”
“가짓수가 많으면 더 좋습니다. 구하실 수 있는 대로 전부 다, 제가 직접 눈으로 상태를 살필 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허어…….”
칼릭스의 이야기를 들은 사이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스터의 소개로 온 자이니 당연히 능력 있는 기사이긴 하겠지만, 마법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를 것이 분명할 텐데.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요구를 하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