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31화
“얌마! 너 괜찮은 거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그런데 몇 명이나 나선답니까?”
“후우. 아홉 명이란다.”
“아홉이라. 예상보다 훨씬 적군요. 선배님이야 당연히 빠지실 거라 생각했지만, 나머지가 열 몇 명쯤은 될 거라 생각했는데.”
학부에서 발생한 사태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상급교관 닐슨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칼릭스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굳이 다 나설 필요는 없다며 자기 볼일을 보러 간 사람들도 있…… 아니, 그보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이제 부상을 다 회복한 거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 아홉 명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음. 그런가요? 그럼 선배님이 제 편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두 명이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너 임마…….”
당황한 기색으로 멈칫거리는 닐슨을 보며, 칼릭스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자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선배님한테 도움을 요청하라고.”
“야 이! 그건 그냥 사소한 부탁 같은 거나 들어주겠단 소리지! 술 한 잔 사달라거나! 예쁜 아가씨 좀 소개해달라거나! 어?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이 나오냐!?”
짜증을 내며 비듬이 날리도록 머리를 벅벅 긁어댄 닐슨은, 곧이어 한숨을 푹 쉬고 비장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흐으우…… 알았다. 구 대 일은 너무 불명예스러운 결투가 아니냐고 우기면, 나 하나 정도는 반대편에 설 수 있겠지. 젠장. 욕을 배 터지도록 퍼먹게 생겼구만.”
정말로 자신의 편을 들어 결투에 끼어들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닐슨의 모습에, 칼릭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핫! 농담입니다 농담. 선배님까지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 혼자서 충분합니다.”
“허어?”
“그냥 마음 편히 구경이나 하시지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친 닐슨의 눈동자가 의혹을 드러내며 흔들렸으나, 이내 침착하게 가라앉으며 제자리를 잡아갔다.
“……그래.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눈빛이구만.”
“예. 생각 없이 자존심 하나로 저지르는 일이 아닙니다. 안심하고 편히 구경이나 하시면 됩니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믿어야겠지.”
대답과는 달리 여전히 얼굴에는 걱정이 드러나 있었지만, 닐슨은 만용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칼릭스의 말을 더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참…… 손해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니까.’
칼릭스는 멀어지는 닐슨의 등을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이전부터 쭉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가 의리를 지키려고 나설 줄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않고 매번 사람 좋게 나서며 대인관계도 원만하기에, 실력이나 정치적인 요소와는 별개로 학부에서의 평판은 언제나 괜찮게 유지하고 있는 닐슨이다.
그렇다 해도 상급반 전체의 적대감을 산 이 상황에 자신의 편을 들었다간, 직장생활이 크게 일그러질 거란 점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자신을 돕겠다고 나서는 그를 보자니, 마음 한구석으로 고맙고도 미안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고 나면 선배에게 뭐라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으려나.’
사실 칼릭스는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보다 먼저, 닐슨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인물이기도 하고, 무공 몇 수 가르쳐주는 게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다만 당시의 자신은 이제 막 부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고,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생도들과 달리 나름 익스퍼트인 그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를까 싶기도 해 시도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관계가 돈독하다 해도 닐슨의 입장에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오러 운용기술들을 익혀보라 권하는 걸로 보일 테니,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늘 내가 상급교관들을 상대하는 광경을 보고 난다면, 이야기를 나눠 봐도 마냥 허튼소리라 여기진 않겠지.’
곧바로 가르침을 받으려 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공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잠시 떠올리고 있던 칼릭스는, 주변을 에워싸듯 다가오는 사나운 기세를 감지하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슬슬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칼릭스 교관. 준비는 되었나?”
“물론이오.”
“흥! 아주 자신만만하시군. 그럼 슬슬 시작하세.”
“흠. 당신이 내 첫 상대인가?”
“첫 상대는 무슨, 과연 다음이란 게 있을 것 같은가? 빨리 검이나 뽑으시지.”
“오시오. 이대로도 충분하니.”
“뭣!? 하, 이런 건방진 놈. 바닥을 기며 애걸하게 만들어 주마!”
검을 들어 형식적인 예를 취한 상대방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비스듬히 선 칼릭스를 향해 달려들며 위협적인 검초를 펼쳐냈다.
칼을 뽑지도 않고 결투를 시작하겠다는 칼릭스의 말에, 그는 몹시 분노하여 적당히 사정을 봐줄 생각조차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날이 없어 베지는 못할지언정 맞으면 뼈를 부수며 파고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담은 검격이, 칼릭스의 목을 노리고 맹렬하게 다가왔다.
아무런 대응 없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칼릭스가, 어느 순간 기민한 발놀림으로 상대를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아래를 향해 검을 늘어뜨린 채 선 그의 등 뒤로, 후두부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은 상대가 지면 위로 털썩 쓰러졌다.
“……엇?”
“뭐, 뭐야?”
칼릭스가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지켜보던 상급교관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분명 두 사람이 격돌하며 무언가 수를 교환한 것 같기는 한데.
지켜보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칼릭스가 검을 뽑는 순간을 정확히 잡아내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상급교관들이 잠시 멈춰선 가운데, 칼릭스가 느긋한 태도로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은? 아직 준비가 덜 되셨소?”
“……내가 하지.”
두 번째 상대가 굳은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결투가 시작되자 그는 앞의 상대보다 조금 더 신중한 모습으로 칼릭스와의 거리를 좁혔고, 이쯤 되면 자신의 검이 최대의 위력을 낼 수 있다고 여긴 순간에 기합을 지르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하압!”
깡.
두 개의 검이 교차하며 그리 크지 않은 금속음이 울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반발력으로 칼릭스의 검에 실린 힘을 가늠한 상대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검이 가로막는 방해물을 밀쳐내고 적의 몸에 적중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칼릭스의 몸에 닿지 못했다.
분명 별거 아닌 미약한 힘으로 맞섰다는 것을 감지했었는데.
어째선지 그는 알 수 없는 흐름에 이끌려 자세가 무너졌고, 바위도 쪼갤 것 같았던 검격은 목표를 잃고 칼릭스의 옆으로 흘러 지나갔다.
급하게 몸을 돌리려던 상대는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차가운 금속의 온도를 느끼고,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졌소.”
“뭐 하는 거야! 지금 장난하나!”
“저 인간, 뭐라도 받아먹은 거 아냐?”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역정을 내며 패배한 교관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딱히 칼릭스가 대단한 검초를 펼친 것도 아닌데, 상대가 혼자 휘청거리다가 급소를 내어준 것처럼 보였으니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의 대결이 이어지면서.
험한 욕설을 내뱉던 상급교관들은 황당함에 물든 얼굴로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맹렬한 공격, 그리고 갑자기 비틀거리며 맥을 못 추다가 허무하게 당하는 패배.
첫 번째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승부가 갈리며, 순식간에 다섯 명의 패배가 발생했다.
결투에 참가하겠단 의사를 표명한 인원들 중 벌써 절반 이상이 칼릭스에게 당한 것이다.
“이런 미친…… 대체 뭐하자는 거야!”
“설마 이거 뭐, 다들 짜고 날 놀래려고 이런 판을 만든 건 아니겠지?”
수준 높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한두 번 검을 휘두르다가 휘청거리며 칼릭스의 검에 급소를 내어주니.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재미없는 장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쉽군.’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칼릭스는 그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얼굴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가볍게 훅 하고 불어냈다.
나풀거리며 흩어지다가 가라앉는 흙먼지를 따라 시선을 내린 칼릭스가, 자신의 주변으로 땅바닥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익스퍼트급에서도 보기 드물고, 보통은 마스터에 근접한 상위의 실력자여야 나타나는 현상.
일정 수준 이상의 오러를 운용해 검술을 펼치다 보면, 사용자를 중심으로 기류가 발생하며 오러의 성질에 따라 지면에 미세한 흔적이 남겨지게 된다.
파도처럼 구불거리는 먼지층이 겹겹이 생겨난다거나, 쇠스랑으로 긁은 것처럼 직선적인 자국들이 일정하게 파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경험이 많은 기사들 중에는 전투현장에서 그런 문양들을 살피고, ‘어디어디 가문의 오러연공법을 익힌 자가 여기서 싸운 모양이군.’ 같은 추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누구를 데려놓는다 해도, 이곳에 남겨진 흔적으로 자신이 펼친 무공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그저 기이할 정도로 정교한 대칭이 반복되는 흔적에, 이런 건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기나 하겠지.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할 태극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늬들을 잠시 바라보던 칼릭스는, 이내 다가오는 여섯 번째 상대를 마주하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검을 맞대며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결과는 이전의 상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정석적인 검술들이 무조건 내 무공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순 없지만, 상대가 어떤 식으로 부딪혀올지 뻔히 알고 있다면 대응이 쉬울 수밖에 없지.’
우악스럽게 짓누르려 하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기로는, 태극의 묘리가 담긴 무공만큼 적당한 것을 찾기도 어렵다.
보통은 날붙이보다는 권법이나 장법에 담아 펼치는 쪽으로 더 유명한 것이기는 하나, 요체를 제대로 파악하고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법.
크게 힘들이지 않고 무난하게 승수를 올린 칼릭스는, 어느새 마지막 순번인 아홉 번째 상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쭉 뻗었다.
까닥까닥.
아랫사람을 부리듯 손가락을 까닥이자, 낯익은 얼굴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일그러진다.
“이런 빌어먹을…….”
상급교관 에드거는 요 몇 달 사이에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칼릭스를 보며, 억눌린 음성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잠시 뒤, 마지막 결투가 시작되었다.
실력이 나쁘진 않지만 그래 봐야 다른 상급교관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던 에드거가, 칼릭스의 검에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며 꼴사나운 춤을 선보였다.
앞서의 상대들과 다르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에드거였기에, 칼릭스는 그를 쉬이 풀어주지 않고 시간을 들여가며 에드거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짜악.
“크윽!?”
빈틈을 만들어 낼 때마다, 급소를 노리는 대신 검면으로 뺨을 후려쳤다.
이만큼이나 격차가 벌어진 상대를 괴롭히는 건 품위 없는 행동이긴 했지만, 상대가 에드거이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 그만! 내가 졌네.”
치욕감에 몸을 떨며 이를 악물고 달려들던 에드거는 일곱 번쯤 그렇게 타격을 당하고 양 볼이 퉁퉁 부어오르자,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패배를 선언하며 칼릭스의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가능하면 조금 더 길게 가지고 놀고 싶었지만, 항복한 상대를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칼릭스는 검을 집어넣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지나치며, 오연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승부가 났으니 앞으로 이런 일로 저를 더 귀찮게 하진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기세가 팍 시들어버린 상급교관들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맡은 생도들은 잘 좀 단속하길 바랍니다. 또다시 제 아이들이 다치는 일이 발생하면, 그땐 이번처럼 순순히 돌려보내진 않을 테니.”
말을 마친 칼릭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상급반 학부를 떠나갔다.
대결은 끝났지만 칼릭스가 떠난 뒤로도, 상급교관들은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힘없이 내뱉어진 누군가의 한마디만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