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30화
“자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라네. 오늘 돌아가면 자택에 있는 연무실에서 한동안 폐관수련을 할 생각일세.”
“오! 무언가 실마리를 잡으신 겁니까?”
“아마도. 확신할 수는 없네만, 자네의 지도 덕분에 어렴풋이 깨달은 바가 있긴 하다네. 이 느낌을 잘 곱씹어 명료하게 체계를 갖출 수 있다면…… 그때는 내 염원이 이뤄질지도 모르지.”
“음. 다음에 뵐 때는 기쁜 소식과 함께라면 좋겠군요.”
모든 외부활동을 접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련에 매진하겠다는 알론드의 말에, 칼릭스는 이를 응원하며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와의 지도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이라기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느라, 여태까지 한 번도 대충 넘긴 적이 없던 생도들의 수업도 처음으로 자율훈련으로 돌렸다.
‘꼭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군. 그래야 내가 회복을 마친 후에,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폐관을 선언하고 떠난 알론드가 목적을 달성하길 기원하며, 칼릭스는 조금 늦었지만 생도들이 자신 없이도 훈련을 잘 하고 있을지 살피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광경이, 바로 현재의 사태였다.
“교, 교관님…….”
“설명해라.”
“그게…….”
제자들의 입에서 대략적인 설명이 더듬거리며 흘러나왔고, 상황을 파악한 칼릭스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급생들을 향해 차가운 눈길을 돌렸다.
알폰소 및 기타 상급생들은 무언가 항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칼릭스의 시선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하얘지며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서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으, 으어어…….’
‘꼼짝도 못하겠어…….’
소림의 사자후는 단순히 커다란 목소리를 내는 하찮은 무공이 아니다.
어떤 심상을 담느냐에 따라 웅혼한 기운이 담긴 음파가 듣는 이의 정신을 맑게 깨워주기도 하고, 역으로 심령을 위축시켜 의지를 잃게 만드는 효력을 보일 수도 한다.
사자후의 요결에 미약하게나마 분노를 담아 내지른 칼릭스의 일갈을 들은 상급생도들은, 이미 기세가 눌린 탓에 속에 든 불만을 내비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돌아가라.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의 담당교관과 논의하겠다.”
그렇기에 칼릭스의 말에 감히 토를 달지도 못하고, 알폰소와 상급생들은 오들오들 떨리는 몸으로 허둥지둥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상급생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칼릭스가, 이내 자신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라.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고 잘못이라 말할 순 없는 것이지.”
크게 혼이 나는 게 아닐까 싶어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던 생도들이, 칼릭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잠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더니 하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군. 다친 생도들은 보급고에서 포션을 가져와 부상을 치료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래. 고생들 했다. 쉬고 내일 보도록 하지.”
“옛!”
패싸움을 벌인 것을 칭찬할 순 없지만, 제자들의 대응이 잘못되었다 여기진 않는다.
칼릭스는 사건의 발단이 된 상급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큰 사고 없이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가르치는 생도들 중에 심한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상황을 정리한 칼릭스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생도들을 뒤로 한 채, 곧바로 상급반 학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 * *
“애들이 원래 싸우며 크고 그러는 거지. 뭘 또 교관끼리 얼굴 붉혀가며 잘잘못을 따지자고 그러나?”
상급교관들 중 한 사람이 뚱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칼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이쿠. 거 잘하면 한 대 치겠네. 이래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이 있는 건가?”
“……내가 담당하는 생도들이 아니기에 그 자리에서 문책을 하진 않았소만. 죄질이 명백하니 합당한 징계가 따라야 할 것이오.”
“이봐, 칼릭스 교관. 따지고 보면 우리 애들의 불만이 잘못된 것도 아니잖나?”
“잘못되지 않았다?”
“고작 하급반 생도들이 1군 학부의 지원품을 보급 받아 사용하는데, 상급반에선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게 말이나 되나?”
“그렇지! 기껏 노력해서 올라온 생도들이 얼마나 박탈감이 크겠어?”
“거 자네도 생각이 짧은 걸세. 그렇게 전례 없던 지원을 받았으면 주변에도 좀 나눠쓰게 해주고 그래야 하지 않나?”
“옳거니!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이!”
문제를 일으킨 생도들을 담당하는 상급교관들이 오히려 뻗대는 태도를 취하며 자신을 책망하기에, 칼릭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상석에 앉아 있는 이 학부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중재를 해줘야할 이 학부장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어제까지라면 칼릭스의 편을 들어줬겠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 학부장. 한동안 내 업무대리를 맡아주게.
-예?
-혹시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 싶으면 왕실에 다른 인선을 요청하시게. 아니면 그냥 자네가 일 학부장 하던지. 아무튼 잘 부탁하네.
갑작스레 기약 없는 장기 부재를 표명하고 훌쩍 떠나버린 일 학부장 알론드.
평소에 그가 학부장으로서의 활동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대로 자리에서 퇴임하고 아카데미를 떠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이런 곳에 계실 분도 아니니, 싫증이 나서 그만두겠다고 해도 붙잡을 순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되면…….’
난데없이 일거리가 크게 늘어나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불만이 없었다.
이대로 알론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일 학부장으로 올라설 수 있을 테고, 이 학부장의 자리까지 자신의 인맥에 속해 있는 이에게 물려줄 수 있을 터이기에.
아무리 귀찮아도 승진의 기회를 마다할 순 없으니, 당장 일이 힘들어지는 것은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알론드 님이 없다면, 굳이 내가 칼릭스 교관에게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않나?’
물론 알론드와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이는 그를 아주 홀대할 순 없겠지만, 굳이 다른 교관들의 반발을 억누르면서까지 칼릭스를 도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2군 학부의 수장이라지만, 상급교관들이 떼로 들고일어나면 그로서도 골치가 아파지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고가의 지원품들을 칼릭스의 반에 몰아주며 상급교관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의 편을 들어준다면 여론이 극도로 나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알론드 님의 위세를 등에 업는 상황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겠지만, 어째 보아하니 그분이 다시 돌아오시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일론드와 칼릭스의 관계 및 그가 자리를 비운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학부장은, 결국 칼릭스가 잡고 있는 줄이 그리 튼튼하진 않은 모양이다, 라는 판단을 내렸다.
“크흠. 이 문제에 대해선 내가 왈가왈부하기 조금 그렇군. 당사자들끼리 잘 해결해 보는 게 어떤가?”
“그렇지요! 이런 사소한 문제로 바쁘신 학부장님의 시간을 뺏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닙니까?”
“우리 쪽 생도들의 부상도 적지가 않아요. 일방적인 폭행을 가한 것도 아닌데 한쪽만 징계를 내릴 순 없는 노릇이지요.”
이 학부장이 슬쩍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상급교관들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자기들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학부장이 뒤를 봐주는 게 아니라면, 자신들이 하급교관인 칼릭스 한 사람 따위에게 숙일 이유가 없었다.
기가 산 상급교관들은 칼릭스를 제쳐놓고 자신들끼리 사태를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다.
오히려 이런 사건을 만든 원인이 고가의 보급품에 있으니 이제라도 순리에 맞게 상급반과 물품을 나누고, 폭력사태에 징계를 내려야 한다면 칼릭스의 반 생도들이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가만히 두고 보자니까 주접도 이런 주접이 없기에, 칼릭스는 더 참지 않고 똥파리 같은 무리들을 향해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지원품의 분배는 없습니다. 내 제자들에게 쓰기도 부족한 마당에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뭐? 자네 정말 끝까지 욕심을 부릴 건가? 내가 궁금해서 목록을 확인해봤는데, 그만한 물량을 한 반에서 독차지하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누가 들으면 지원받은 보급물량이 무슨 산처럼 쌓여 있는 줄 알겠군요. 이번에 받은 그 보급품은 이미 절반쯤 훈련 과정에서 사용했고, 나머지도 곧 전부 소진할 계획입니다만.”
“무, 뭐라고?”
“미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아 안 되긴 하지만 사실이다.
1군 학부의 우수생도들도 그렇게까지 보급품을 마구 소비하진 않지만, 칼릭스는 진짜로 물 쓰듯이 생도들에게 포션을 들이부어 가며 훈련을 시켰다.
아카데미에 별 미련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
황당함에 말을 잃은 상급교관들을 둘러보면서, 칼릭스는 팔짱을 낀 채 건방져 보이는 자세로 턱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나 그쪽들이나 어차피 서로 양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불만이 있으면 입으로 떠들지 말고 무인답게 해결합시다.”
“이 자식이…….”
“미친 거 아니야?”
발끈한 상급교관들이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를 한 몸으로 받아내며, 칼릭스는 오연한 눈빛으로 덤덤하게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괜히 말도 안 통하는 작자들과 입 아프게 떠드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도발해서 무력으로 합의를 보는 편이 간단하고 확실했다.
교관들 사이의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오래 보고 지낼 얼굴들도 아닌 것을.
“칼릭스 교관. 자네 그 말,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겠나? 1군 학부의 지원이 자네의 반에만 몰린 것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교관이 한두 사람이 아니네만.”
“불만이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습니다.”
“……후! 좋아. 그럼 원하는 대로 힘의 논리에 따라 해결을 보도록 하지.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르는 걸세.”
“좋습니다. 준비하시죠.”
혼자서 상급교관 여러 명을 상대하게 생겼지만, 칼릭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어차피 수가 많다고 해도 교관들의 체면이 있기에, 다 대 일이 아닌 일대일의 대결을 연달아 진행하는 방식으로 결투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씩을 상대하는 싸움이라면, 자신이 질 가능성은 아득히 0에 수렴한다고 칼릭스는 확신했다.
‘에드거 교관과 겨룰 때도 그랬듯이, 상급교관들은 결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심법을 이용한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당시와 달리, 현재의 칼릭스는 회복 과정이 종반부에 달하여 오러하트의 안정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져 있는 형국.
무리하게 위력적인 무공을 펼치는 것만 아니라면, 슬슬 익스퍼트 수준의 오러를 잠깐씩 운용해도 회복에 지장을 주지 않는 상태였다.
끽해야 익스퍼트급에 머물러 있는 상급교관들을 상대로 마스터 수준의 검초를 사용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칼릭스가 몸을 사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상대가 수십 명쯤 몰려온다면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상급반 교관의 수는 다 합쳐도 열댓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설사 그 인원 전부가 덤벼든다 해도, 칼릭스는 모조리 꺾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은 내 상태를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마냥 숨기고만 있진 못하겠군.’
어차피 이미 마스터 알론드에게 실력을 보이기도 했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뒷배가 되어줄 것이기에 걱정은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겨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면, 다 때려치우고 알론드의 처음 제안대로 그의 저택에 머물러 지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들을 속으로 떠올리며, 칼릭스는 다가올 상급교관들과의 대결에 대비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