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29화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은 능력 없는 생도들에게는 결코 자비롭지가 않다.
하급반에서 1년의 기초과정을 채우고 상급반으로의 승반 심사를 보는데, 여기서 떨어진다면 자비 없이 그대로 퇴학.
이후 상급반에서도 역시 2년의 심화 과정을 마치고 졸업심사를 받으며, 평가 수준에 미달되면 유급 같은 제도가 없기에 곧장 학부를 떠나야 한다.
그나마 졸업심사까지 와서 떨어지면 군사직종의 취직에 조금이나마 가산점이 되어주는, ‘아카데미 교육 과정 이수확인증’이라도 발급해 준다는 게 3년의 교육을 마친 생도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다들 어떻게든 무사히 졸업을 하고자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런데 저따위로 빈둥거리는 녀석들이 우리보다 더 좋은 지원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
알폰소는 이번 중간평가에서 최우수반에 선정된 상급반의 대표였으며, 반에서 2위의 등수를 지닌 뛰어난 생도이기도 했다.
비록 생각이 단순하고 흥분을 잘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검술 실력 자체는 상급반 전체를 통틀어도 10명 안에 들어가는 수준급의 강자였다.
그런 그가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던 하급반에 찾아온 것은, 믿기 어려운 괴상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
-야야, 이번에 하급반의 최우수반에서 포션이랑 마법물품들을 지원받는다고 하던데?
-어쩌라고? 돈 많고 잘~나신 귀족 나리들이 계신 곳인데, 하급반이어도 당연히 우리랑은 지원이 비교가 안 되겠지.
-1군 하급반이 아니라 우리 2군 학부 하급반을 말하는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상급반인 우리도 그런 물품들은 구경도 못 해보는데.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루머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조금 흐르며 그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에, 알폰소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하급반 녀석들이 상급반인 우리들보다 훨씬 좋은 지원을 받는다니.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잖아!’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알폰소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생도 몇 명을 데리고 직접 소문의 하급반을 찾아왔다.
그런데 마침 완전히 기합이 빠진 모습으로 훈련 같지도 않은 운동을 쉬엄쉬엄하고 있는 하급생들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알폰소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따위로 놀고 있는 녀석들이 최우수반이라고?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무슨 일인데 남의 반에 와서 난리를 피우쇼?”
험악한 기류가 오가는 가운데.
훈련용 철검을 어깨에 올린 베런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반 순위는 2위였지만 1위인 아즐린이 다른 생도들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는 성향이었기에, 사실상 칼릭스 반에선 베런이 생도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뭐? 피우쇼오~? 이 새끼가 상급생한테 말하는 꼬라지 좀 봐라?”
“참나. 졸업하고 같은 직장에서 만나기라도 해야 기수를 따지지. 뭔 생도들끼리 벌써부터 상하를 따지나?”
“뭐라고?”
“상급반이라고 다 졸업해서 잘나가는 것도 아니더만. 난 졸업하면 기사가 될 거라고 자신하는데. 그때는 선배가 내 밑의 부관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거 아뇨?”
“이, 이런 건방진 새끼가!”
베런의 도발적인 언사에, 알폰소의 머릿속에 있던 원래도 얄팍한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쁘드득.
소리가 나게 이빨을 간 알폰소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결투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고가의 지원품을 독식하고 이따위로 예의도 없는지, 어디 실력 좀 보자!”
난데없이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을 감안하면, 베런의 응대가 마냥 무례하다고 따질 순 없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본인이 중심이 되는 사고로 모든 상황들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헹! 하급생에게 처맞고 질질 짜지나 마쇼.”
베런 역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어깨를 튕기며 검을 앞으로 쭉 뻗어 전투를 위한 자세를 잡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휘둘러진 검격이, 중간 지점에서 충돌하며 큰 소음을 만들어냈다.
까앙-!
“윽…….”
몸 안으로 스며드는 충격을 흘리기 위해 한걸음 뒤로 물러난 베런이, 눈살을 찌푸리며 저릿해지는 손바닥에 살짝 힘을 풀었다.
반면 맞은편의 알폰소는 검을 휘두른 자세에서 전혀 밀려나지 않은 모양새.
그것만 봐도 어느 쪽이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칼릭스의 지도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긴 했다지만, 베런은 입소한지 이제 5개월에 접어든 하급생도.
그와 다르게 알폰소는 올해 졸업시험이 예정되어 있는 3년 차의 상급생도였으니,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상급반을 통틀어서도 최상위권에 속해 있으며 정석적인 파워검술을 다루는 알폰소는, 명백히 베런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실력자.
그렇기에 싸움의 결과를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빡!
“끅!”
철검으로 옆구리를 세게 얻어맞은 베런이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나름 십여 합을 견디며 최선을 다해 동수를 유지했지만, 전투가 길어지다 보면 결국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아가리에 비해 칼솜씨는 많이 부족한데?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면 이 정도로 봐주지.”
“아직, 안 끝났다!”
통증을 참으며 눈을 부릅뜬 베런이, 재차 앞으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그 역시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지를 잃고 꼬리를 말 생각은 없었다.
캉, 까강!
몇 차례의 검격이 다시 오간 후.
퍽!
“으윽!”
어깨를 가격당한 베런이 움찔하며 멈춰 서는 사이.
알폰소의 발길질이 그의 오금을 걷어찼고, 다리가 접힌 베런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주제를 알아라, 건방진 자식!”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베런의 머리 위로, 알폰소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쓰러진 상대에게 항복을 받아내지도 않고 그대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결투의 매너에 어긋나는 비신사적인 행위.
게다가 생도 간의 대련에서 팔이나 다리 혹은 몸통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상대의 머리를 노리는 것은, 치명적인 부상을 초래할 수 있기에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바르지 못한 행동이었다.
머리에 잔뜩 열이 오른 알폰소가 앞뒤 생각하지 않고 휘두른 검에, 자칫하면 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
챙!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위험할 뻔했던 그의 일격은, 옆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의 검에 의해 방향이 꺾이며 목표에 닿지 못했다.
“적당히 하시죠.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이라도 머리를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까?”
정교한 찌르기로 알폰소가 휘두른 검의 옆면을 찔러 궤도를 틀어낸 아즐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악연으로 시작했던 베런과의 사이는 지금도 영 좋지 못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급생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마냥 두고 볼 건 아니기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넌 또 뭐야? 어디 계집 따위가 나서서…….”
하급반에서도 드문 여성 생도는 상급반에 올라가면 더욱 수가 줄어든다.
알폰소는 여자가 검을 다루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검술을 배움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벗어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 또한 아니었다.
특히나 한껏 열이 오른 상태이다 보니 여성 생도가 자신의 검을 막아섰다는 사실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비하의 발언을 아즐린을 향해 서슴없이 내뱉었다.
“생도라는 년이 무슨 이쑤시개 같은 몸을 하고선…… 보아하니 어차피 승반 심사도 통과하지 못할 수준일 텐데, 그냥 여기 이 자식이랑 둘이 손잡고 나가서 소꿉놀이나 하지그래?”
차갑게 식어 있던 아즐린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능하면 칼부림을 벌인 두 사람을 말리고 사태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저런 소리를 듣고 부드럽게 중재에 나설 만큼 그녀가 무른 성격은 또 아니다.
“하, 당신. 그 계집한테 지고 나면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네.”
“으으…… 비켜라 아즐린. 난 아직 싸울 수 있어!”
“억지 부리지 말고 뒤로 빠져. 보아하니 이 인간이 저쪽 무리의 대표인가 본데. 대장전이라면 내가 나서야 맞지.”
“크윽, 젠장…….”
“대장전? 그 말은 요 삐쩍 마른 계집애가 이 반의 수석이라는 소리냐? 하아! 진짜 가지가지 하는 것들이군.”
기가 찬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린 알폰소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 검을 들어 아즐린을 겨눴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지 혼쭐을 내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이번 일로 자신에게 어떤 징계가 내려진다 해도, 졸업예정자들보다 하급반 따위가 훨씬 풍족한 지원을 받는 불합리한 상황에는 반기를 들어야 옳다고 여겼다.
스스로를 불의에 저항하는 관철자라 생각하며 심취한 알폰소와, 한껏 독기를 머금은 아즐린이 서로를 향해 검격을 날리며 격돌했다.
“흐읍!”
“히야앗!”
깡! 까드득. 카캉!
서로를 노리고 펼쳐지는 검초가 쉴 새 없이 부딪치며, 번쩍이는 검광과 귀가 따가운 소음이 쏟아져 나왔다.
반복된 마찰로 달궈진 검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며 전투가 길어지자,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상급반 생도들의 표정에 점점 불안감이 떠올랐다.
당연히 알폰소가 쉽게 상대를 제압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는 영 좋지가 않았기 때문.
하급생 중에서는 발군의 수준이 된 아즐린은 상급생이라 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고, 알폰소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검술이었기에 상대하기가 제법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상급생 최우수반에서 수위를 다투는 알폰소를, 아직은 아즐린이 꺾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의 장면만 얼핏 보자면 백중세였으나, 이대로 싸움이 지속된다면 결국은 승기가 점점 알폰소 쪽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 자명했다.
다만 그런 전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결과를 예측하려면, 적어도 교관급은 되는 실력자여야 가능한 일이었고.
‘야, 이거 이러다 알폰소가 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개망신당하는 거지.’
알폰소를 뒤따라온 다른 상급생들은 혹시나 그가 패배하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하며, 무언가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것들이 선배 알기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자신들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상급생들은 주변의 다른 하급생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마구 검을 휘두르며 은근슬쩍 아즐린과 알폰소의 근처로 다가가, 대결에 끼어들어 아즐린의 움직임을 방해하려 들었다.
“아이 씨! 뭔데! 상급생이면 다냐!?”
“꿀맛 같은 휴일을 방해하고 지랄이야!”
칼릭스의 반 생도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훈련을 받다가 간신히 한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려던 생도들은, 뜬금없이 나타나 기강이 해이하니 마니 트집을 잡는 상급생들의 태도에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말았다.
차분한 이성은 증발하고 폭력적인 성향만이 장내를 지배했다.
규율이 사라지며 상황은 점차 마구잡이식의 패싸움으로 번져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만-!”
“헉!”
“으윽!?”
거대한 일갈이 생도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단순히 큰 음성일 뿐이었다면 모두가 정신을 차리진 못했겠지만, 목소리와 함께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기이한 자극이 생도들을 찌르고 지나갔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날뛰던 생도들은 움찔하며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모든 것이 정지한 공간 속으로 발걸음 소리가 파고들었다.
소림의 신묘한 음공(音功)인 사자후의 요결을 음성에 곁들여 생도들을 제압한 칼릭스가, 눈썹을 한껏 치켜뜬 채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굳어져 있는 생도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