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26화 (26/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26화

사제지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풍기는 알론드를 마주하며, 칼릭스는 긴장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난번에 직접적으로 몸 상태를 살피고 나서 크게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갔기에, 더 이상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것인지 쉬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평생을 안고 살아온 미련이 만들어낸 망상일지도 모르겠네만.”

“…….?”

“그래도 내가 느낀 것이 과연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해야만 하겠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

칼릭스의 대답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알론드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벼락같은 속도로 뽑혀져 나왔다.

이어서 칼릭스의 눈앞에서 분열하듯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검의 그림자가, 공간을 매섭게 가르며 그를 향해 쇄도했다.

까앙-!

길게 늘어지는 금속의 충돌음을 들으며, 알론드는 입가에 큰 미소를 그렸다.

그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선 칼릭스의 검을 보며 끓어오르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인이 인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움직임.

마스터의 영역 안에서 그 흐름을 쫓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같은 마스터뿐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니 숨길 수도 없군.’

자신을 보며 웃음을 짓는 알론드와 눈빛을 교환하며, 칼릭스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표정을 보아하니 막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가 진심으로 자신을 베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로서는 반사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었다.

‘저 사람 앞에서 딱히 수상해 보이는 행동을 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일이 또 이렇게 될 줄이야.’

방금 전의 일격은 알론드의 말대로 일종의 확인 절차였지만, 칼릭스가 마스터 수준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가해진 공격으로 보였었다.

‘실제로 반응해서 막아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날 본인과 동등한 수준이라 생각하면 곤란한데.’

현장실습 때 무리하느라 악화된 몸 상태를 이제 막 간신히 되돌린 참이다.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을 검초를 펼쳤다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몸이 망가질 수도 있기에.

강렬한 기파를 발산하며 자신을 압박해오는 알론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칼릭스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검을 맞대고 있던 알론드가 고개를 살짝 틀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그의 얼굴이 있던 자리로, 뭉툭한 칼끝이 허공을 한 차례 찌르고 빠져나갔다.

“으, 아으…….”

검을 든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즐린이 칼릭스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명확한 단어가 되지 못한 말을 몇 마디 웅얼거린 그녀는, 이윽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단련된 기사들조차 마스터가 발하는 기세 앞에선 몸이 굳어져 움직이기 어려운 법.

알론드와 칼릭스의 격돌로 발생하는 사나운 기파의 흐름을, 일개 생도인 그녀가 비집고 들어왔으니 실신하는 것이 당연했다.

“허어! 설마 아카데미 내에서 내게 덤벼드는 생도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늘. 스승을 돕겠다고 나선 모양인데, 투지가 대단한 아이구먼.”

“……그보다는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군요.”

흥이 식은 듯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리는 알론드를 뒤로하고, 칼릭스는 쓰러진 아즐린의 몸을 잡아 바르게 뉘어 주었다.

혹시나 내상을 입은 건 아닌가 싶어 상태를 체크해 보니, 단순히 기절했을 뿐이라 걱정하진 않아도 될 듯싶었다.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내가 공격당하는 걸 보자 마스터 알론드에게 검을 들이댄 건가. 정말이지…… 여러모로 톡톡 튀는 행동을 해대는 녀석이군.’

칭찬할 만한 행동이라고 말하긴 어려웠고, 어쩌면 무공을 가르치는 자신에게 잘 보이고자 계산적으로 나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속마음이 어쨌건 자신의 편을 들고자 나섰다는 점은, 조금 기특하게 여겨지긴 한다.

덕분에 알론드의 흥분이 가라앉았으니 어찌 보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일단, 이야기를 좀 나누지요.”

“흐음. 그러세. 자네에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열기가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론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칼릭스는 검을 집어넣고 그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 몸을 살펴보고 난 뒤로, 경지의 상승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찾으셨다는 겁니까?”

“찾았다기보다는 형체 없는 무언가를 더듬는 느낌이네만. 그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이전까지와 달리,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긴 했다네.”

“그래서 제게 다짜고짜 칼질을 하셨다는 거군요.”

“감추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어쩌면 자네가 나와 같은 마스터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옳았구먼.”

‘흘흘’ 하며 웃음을 흘린 알론드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고작 서른의 나이에 마스터, 그것도 보아하니 갓 초입에 든 깊이도 아닌 듯한데. 대체 자네의 정체가 뭔가? 게다가 그 몸 상태는 또 어찌 된 영문이고.”

“으음.”

평범한 퇴물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켰지만,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칼릭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적당히 사실과 거짓을 섞어 알론드에게 꾸며낸 이야기를 전했다.

“새로운 오러 운용법과 검술들을 개발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살펴보셔서 아시겠지만 제 몸의 부상은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일 학부장님과 동등하게 검을 맞댈 수 있는 건, 많아 봐야 한두 합 정도가 고작일 뿐이지요.”

“확실히…… 정상은 아닌 상태였지. 허, 참. 무인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 새로운 기술들을 창안해 내다니. 나도 검에 제법 미쳐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군.”

낯부끄럽긴 하지만 무공에 대한 연원을 밝힐 수는 없으니,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들을 스스로가 직접 깨닫고 만들어낸 것으로 여기도록 말해야 했다.

설명을 들은 알론드는 칼릭스를 본인의 목숨도 도외시할 정도로 검술에 미쳐 있는 인물이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진짜 재능을 가진 희대의 천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긴 그 정도로 돌아버려야 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자네가 말하는 새로운 기술이란 건, 자네의 부상을 치료하는 방법도 포함된 것이겠구먼?”

지난번 마주했을 때보다 내부의 오러 흐름이 안정적으로 변한 칼릭스를 보며, 알론드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상태가 여전히 엉망으로 보이긴 하지만, 회복세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예.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답하는 칼릭스의 태도에, 알론드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손상된 오러하트의 치료법이라니, 확실히 오러 유저들의 눈이 뒤집힐만한 가치의 보물이긴 하네만.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로 향하는 단서를 얻는 것뿐이네.”

은근한 기대를 담은 눈으로 칼릭스를 쳐다보며, 알론드는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문질러 닦았다.

‘저런 천재가 몸이 망가질 정도의 노력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기술들. 어쩌면 그것들이 내 염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알론드는 간절한 열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개발했다는 검술. 내게 가르쳐 줄 수 있겠나? 대가는 무엇이라도 지불하겠네.”

“음. 죄송하지만 당장은 무리입니다.”

“아, 그렇군. 미안하네. 자네의 몸이 회복되는 게 우선이지. 그럼 말을 조금 바꾸겠네. 아까 전 내 검을 받아내면서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었나?”

알론드의 질문에 칼릭스는 조금 전의 격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검이 나뉘어 다각도에서 찔러오는 듯한 그 공격, 천하삼십육검의 오의인 천하무궁과 미묘하게 닮아 있었던 것도 같다.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 무언가를 느꼈다고 하더니, 결과물을 유추해 그렇게 비슷하게 흉내 낸 건가. 그건 꽤 대단한데.’

물론 빈틈없이 빼곡하게 펼쳐지듯 공간을 장악하는 천하무궁에 비하면, 검격이 퍼지는 범위도 좁고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어설픈 형태이긴 했다.

그래도 고작 무리하게 사용한 무공의 반발로 기혈에 생겨난 흔적 하나를 가지고, 본적도 없는 초식을 그만큼이나마 재현했다는 것에 칼릭스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려 숙고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며칠이 훌쩍 지나가 버렸더군.”

“그로 인해 어떤 깨달음이 있으셨습니까?”

“어쩌면 내가 평생을 쌓아온 검술의 형식에, 무언가 부족한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더군. 혹시 자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검술을 개발하려 한 것은 아닌가?”

“맞습니다. 단지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에 존재하는 수많은 현상과 이치들을 검술에 담을 수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호오. 생각보다 더 거창한 대답이 돌아오는군. 역시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만물의 이치라…….”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알론드는, 이내 칼릭스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경지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여기고, 무인으로서의 성장을 반쯤 포기며 지내왔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고민 또한 떠올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아쉬움만 남긴 채 죽음을 맞이했겠지.”

“아니…… 일 학부장님. 이러지 마십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뭐라도 좋으니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없겠는가? 늙어 굳어버린 이 머리로는 홀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 같네.”

중소국가인 알펜시아 왕국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탄생한 기록은,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당대의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이도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넘어서진 못한 상태이니, 칼릭스는 현재 국내 최강자 중의 한 사람에게 제자로 삼아달란 요청을 들은 셈이었다.

‘이것 참…….’

거절하기도 곤란한 부탁이었다.

혹시나 알론드가 앙심을 품고 무력시위를 벌인다면, 칼릭스로서는 그를 막을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한 수를 교환하고, 그 일합으로 죽거나 죽이거나 승부를 봐야 하겠지.’

패배하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승리해도 답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왕국의 주요 인사 중 하나인 그를 죽이고 나면 어디 가서 발이나 붙일 수 있겠나.

전력을 다하고 나면 며칠은 오러를 쓰지 못하고 얌전히 정양해야 되는 상태가 되니, 어딘가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반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무림의 지식을 갖춘 칼릭스라 해도 그를 뚝딱 그랜드 마스터로 만들어줄 순 없지만, 본인이 지닌 상승의 무공들에 담긴 무리들을 풀어 조언을 해준다면 적잖이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경지의 상승을 이룰 수 있을지는, 본인의 운과 노력에 달렸기에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은혜는 베푼다면, 최소한 마스터 한 사람을 조력자로 얻게 되긴 하겠군.’

마스터라는 인적자원이 갖는 가치는 상당하다.

특히나 상당한 연륜과 인맥을 갖춘 알론드라면, 자신이 최근 계획하고 있는 ‘부상을 전부 회복하고 난 뒤의 행보’에 대해서도 분명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잠시 고민을 해본 칼릭스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론드에게 대답을 전했다.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그리 말씀하시니 일단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고맙네! 만약 내가 숙원을 이룰 수 있게만 된다면, 남은 삶 동안 자네를 위해서 모든 일이든지 해주겠네! 흐하핫!”

체면도 잊고 펄쩍 뛰어오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알론드를 보면서, 칼릭스 또한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설마 마스터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에게 특별 지도를 받는 비공식적인 생도가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센 68세의 제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