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4화
알론드 프리즈먼은 자신의 처지가 꽤나 딱하다고 느꼈다.
검술에 모든 것을 바친 끝에, 남들은 꿈에서라도 이루길 염원한다는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
나라에 헌신하고자 왕국군에 들어가 군단장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국익을 위협하는 수많은 적들을 패퇴시켰다.
딱 거기까지는 좋았다.
‘남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인생이었다. 하지만…….’
결국 최고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다 허무한 기분이었다.
흔히들 마스터를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한 존재라고 한다.
바꿔 말하자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소리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만으로도 충분히 초인이라 불리며, 검을 든 자들의 경외를 받을 자격이 있긴 하지만.
이 드넓은 세상에는 마스터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올라선 절대자들이, 극소수이긴 해도 엄연히 존재했다.
하늘 위의 하늘.
인간의 형상을 한 초월적인 무언가.
세간에서는 이를 그랜드 마스터라고 칭한다.
‘내 손으로는 결국 잡지 못한, 환상과도 같은 경지…….’
한 사람만 탄생해도 소속 국가의 위상이 달라지게 만드는 존재.
변방의 소국에서는 당연히 찾아보기도 어렵고, 저 거대한 제국에서나 수십 년에 한 명쯤 나온다는 위대한 무인.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마스터가 된 지도 어느덧 20년이 넘었지만, 알론드는 그 하늘 위의 경지에 대해서 작은 실마리조차도 잡을 수가 없었다.
‘평생 재능이 부족하다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늘. 결국 나도 그들에 비하면 범인에 불과한 존재였던 게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약해져 가는 육신은, 발전은커녕 퇴보를 멈추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살아온 인생 전부에 회의감이 든 알론드는 군부에서의 은퇴를 결심했고, 치열하게 검에 몰두했던 이전과 달리 느긋한 생활을 보내고자 아카데미의 관리직으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그간 모은 재물만으로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뒷방 늙은이처럼 틀어박혀 지내고 싶지는 않아 선택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최근에 들어서 알론드는, 스스로의 선택에 살짝 후회가 남는 기분이 들었다.
‘검을 놓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거 원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군.’
나라를 위해 여러 위험지역을 전전하며 무수한 전공을 세우곤 했던 알론드다.
그런 자신이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생도들이 모인 아카데미에서 뒷짐 지고 무게나 잡고 있자니,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은퇴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전쟁터나 떠돌 걸 그랬나 싶었다.
특히나 오늘은 괜히 평소보다 더 마음이 심란해져,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발길이 가는 대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음? 여긴…… 나도 모르는 사이에 2군 구역으로 들어온 모양이로구먼. 취임한 이후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곳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상시엔 거들떠도 보지 않던 2군 학부로 넘어와 버린지라, 알론드는 눈살을 찌푸린 채 주변을 돌아보며 마음이 흐트러진 스스로를 속으로 자책했다.
‘교직원들의 배식소인가. 그나저나…… 역시 2군은 듣던 대로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군. 에잉, 쯔쯧!’
마스터의 경지쯤 되면 외견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거의 정확히 유추할 수가 있다.
눈에 보이는 교관들이 풍기는 기세가 영 비실해 보여, 알론드는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아직 한창 때의 젊은 놈들이 군기가 빠져가지고…… 죄다 하나같이 내 검을 일합조차 받아내지 못할 것처럼 비리비리하구먼.’
1군의 상급교관들 중에는 그와 검을 맞대고 대여섯 합까지는 버틸 수 있는 실력자들이 몇 명 정도 존재했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를 대표하는 기술이자 강철을 짚단처럼 베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렇다 해도 마스터와 겨뤄 잠시나마 버틴다는 것도 보통의 실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에 비해 2군의 교관들은 검을 한 번씩만 부딪혀도 죄다 나가떨어질 듯 허약해 보이니, 비록 학부가 달라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의 최고 관리자로서 한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로는 대강 들어서 알기에 그동안 관심을 끄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더 처참한 수준이지 않은가.
‘기사양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2군 학부를 폐지하고 1군에 예산을 집중하는 편이 낫겠구먼. 이참에 대대적으로 개혁안을 한번 내봐?’
2군 학부장이 알았다면 사색이 되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만한 상상을 속으로 떠올리며, 알론드는 힐끔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교관들을 쭈욱 돌아보았다.
명색이 교관이라는 자들 중에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킬만한 인물이 단 한 명조차도 없다면, 정말로 2군 학부의 폐지를 왕실에 정식으로 건의해 버릴까 생각하면서.
‘이놈은 한 칼, 저놈도 한 칼. 저쪽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칼질 한 번은 버티겠구먼. 그래 봐야 성에 안 차긴 마찬가지지만. 그 옆에 있는 놈은…….’
심술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장내를 둘러보던 알론드의 시선이, 어느덧 한 사람의 앞에서 멈춰 섰다.
움찔하며 눈을 피하는 주변의 교관들과는 다르게, 어찌 보면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당돌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교관.
‘저놈은, 저놈은…… 그러니까…… 뭐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주변의 다른 교관들과 마찬가지로, 기준에 맞지 않는 수준에 불과한 녀석이라 여겨지는데.
어째서 숱한 위기 속에서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한 적이 없었던 이 전투 감각은, 저놈을 벨 수가 없다고 외치고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사태에 당혹스러워하던 그는, 곧이어 손바닥에서 축축한 감각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저 젊은 녀석을 경계하고 있단 말인가?’
전쟁터에서나 간혹 경험하곤 했던 긴장감이 손바닥에 땀을 흐르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굉장히 생소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대체 무슨…… 저 젊은이가 나와 같은 마스터의 경지일리도 없을 진데.’
많이 쳐줘도 30초반이나 됐을 법한 인상.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대륙의 역사상 30대의 나이에 마스터가 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인물이 그런 존재였다면 이미 자신보다 더 유명세를 떨쳤을 것이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 해도, 일합으로는 승부를 내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이리도 강하게 드는 걸까.
‘서, 설마 내가 결국 말로만 듣던 노환이 오고만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니고서야, 어찌 마스터의 감각에 이리 혼선이 생긴단 말인가.
마스터가 되며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지니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월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반인들보다는 월등히 건강하다고 하지만, 마스터 중에 치매에 걸려 못 볼 꼴을 보이다가 추하게 가버린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결을 하고 말지!’
그렇게 몇 초 단위로 안색이 수차례 변하는 모습을 보이던 알론드는, 이내 젊은 교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꼿꼿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마음이지만, 일단은 상대와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거기 자네.”
“옛. 안녕하십니까, 일 학부장님.”
“그래. 자네는 누군가?”
“하급교관 칼릭스 마이언입니다.”
“……뭣이? 하급교관?”
그럴 리가 없는데 라는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알론드를 보며, 칼릭스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머릿속으로 재빨리 생각했다.
‘닐슨 선배의 말 때문에 혹시나 했지만, 내 직위도 모르는 걸 보니 나를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럼에도 내게 다가온 이유는…… 혹시 내가 지닌 무공 때문에 무언가를 특이점을 눈치챘기 때문인 건가?’
어쩌면 마스터와 대결을 상상하며, 무의식적으로 어떠한 기운을 흘린 걸지도 모르겠다.
정답을 유추한 칼릭스는 알론드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긴장으로 굳어져가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마스터쯤 되는 인물이라면 내게서 뭔가를 감지했어도 이상할 건 없겠지. 이거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는걸.’
칼릭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당황 속에서 말문이 막혀 있던 알론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칼릭스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퍼부었다.
출신과 이력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고, 그 과정에서 칼릭스가 오러하트의 부상으로 은퇴한 기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러하트가 손상되었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사 출신이면서 2군 하급교관을…… 아, 미안했군.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네.”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짧게 대답하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칼릭스를 보며, 알론드는 마음속의 혼란이 한층 더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보아하니 오러하트가 망가졌다는 건 거짓이 아니로군.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내부에 이질적인 흐름이 느껴져. 그렇지만 그럼 아까 그 느낌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지금은 아까와 같은 묘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역시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러의 운용조차 조심해야할 부상자에게 마스터가 경계심을 느끼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않나.
“그…… 렇군. 그래, 만나서 반가웠네. 그럼.”
“예? 아, 살펴가-”
당장 신관과 마법사들을 만나 자신의 상태를 다각도에서 점검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알론드는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알론드가 장내에서 사라지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제각각 떠들기 시작하며 식당 안에 시끌벅적한 소란이 일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칼릭스 교관이 일 학부장님과 인맥이 있었던 건가?”
“뭔가 대화를 나누고 곧바로 돌아가는 걸 보면…… 어떤 관계가 있긴 한 모양인데?”
“하긴 이런 누추한 곳에 아무 이유 없이 올 분이 아닌데. 이거 칼릭스 교관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동안 별거 아닌 줄로만 알았던 인물이, 사실은 강력한 권력자와 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광경처럼 보이기는 했다.
“야, 뭐야 너. 설마 1군 학부장님하고 친분이 있었냐?”
멍한 얼굴로 물어오는 닐슨을 보며, 칼릭스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는 겁니까? 옆에서 대화하는 걸 다 들었으면서.”
“아, 참. 그렇지? 처음 보는 사이인 것처럼 이야기했었지. 그럼 대체 뭔데? 저분이 왜 여기 와서 너에 대해 묻고 간 거야?”
“저도 모릅니다. 윗분들의 변덕 같은 건가 보죠.”
“끄응……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분명히 뭔가 있는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닐슨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칼릭스는 알론드가 빠져나간 식당의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무공의 존재가 들킨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군. 처음부터 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괜히 기분이 들뜨는 바람에...’
왠지 조만간 다시 그와 얽히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칼릭스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같은 시간 다른 장소.
칼릭스와 똑같이 한숨을 내쉬는 생도가 있었다.
“내가 뭘 배우고 있는 거지…… 난 당연히 아즐린처럼 특별한 검술을 배울 거라 생각했는데…….”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베네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본인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분명 자신이 배워야 하는 것은 검술일 텐데, 어째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더 줄어든 듯한 기분이다.
‘무슨 이상한 뜬구름 잡는 문구들이나 외우라고 시키고.’
특별한 오러브레싱을 알려주겠다고 해서 기대하며 수업에 집중했는데.
도대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긴 문장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교관의 모습에, 베네트는 자신이 뭔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오러를 더욱 세밀하게 운용하기 위해서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상한 단어들을 공부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듣자 하니 아즐린도 겪었던 과정이라니 말이다.
한데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오러브레싱을 할 때마다, 뜻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기묘한 문구들을 마음속에 계속 되새겨야 한다는 말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항마…… 뭐였지? 아, 항마진언. 근데 그게 대체 뭔데?’
일단 뜻은 천천히 이해하더라도 다 외워두라고 하니까 하고 있기는 한데.
어릴 적 아버지의 뒤를 따라 행정관이 되기 위해 기초 공부를 했던 때처럼, 머리에 쥐가 나는 기분이 끊이질 않는다.
결국 그때도 포기하고 직업군인의 길로 목표를 바꿨었는데, 이러다가 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괜히 검술 실력이 녹슬기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도 글자가 한가득 담긴 양피지를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있는데, 양이 얼마나 되는 건지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라서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제 곧 두 번째 월말평가인데…… 이렇게 잉크 냄새만 맡고 있어서야 순위가 오를 수나 있을지 걱정이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신이 무례한 방식으로 끼어들어 교관에게 가르침을 요청해놓고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했다간, 뒷감당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했다.
“으흑…… 글자 싫어. 너무 싫다.”
그렇게 징징거리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에.
베네트는 길가에 자라난 가로수 옆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최근 들어서 어째 더 많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네.’
한때는 요정이나 정령 같은 신비한 생물이 아닐까 생각했던 존재.
교관의 말에 따르면 저것은 일종의 영체, 그러니까 흔히들 유령이나 귀신이라 부르는 것들에 가까운 존재라고 했다.
원래는 그리 자주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고, 아카데미에 입소한 후로는 거의 발견한 적이 없었는데.
어째 아즐린을 따라 특별 수업에 참가하게 된 뒤로부터, 이상하게 눈에 띄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교관님이 내가 영능이라는 걸 가지고 있고, 검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게 점점 예민해지게 될 거라고 말씀하긴 했는데. 설마 그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건가?’
베네트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유령 같은 꺼림칙한 것들을 더 많이 마주치게 된다니.
억지로 공부를 하는 것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어째 점점 거북한 일만 계속 늘어나는 듯하다.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네트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 꾸무럭거리는 영체를 못 본척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