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10화 (10/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0화

월말평가

달마다 이루어지는 월말평가는, 반기별로 이루어지는 중간평가나 연말평가 등에 비하면 중요도가 낮은 시험이다.

그래도 생도들에게는 제법 중요한 이벤트로 인식되는 것이, 평가 과정이 오로지 생도들 간의 대련으로 진행되기 때문.

반에서의 서열이 매겨지는 자리이다 보니,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의 생도들에겐 목숨 걸고 임해야 할 행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아~즐린! 컨디션은 좀 어때?”

“아, 응. 나쁘지 않아.”

살갑게 다가오는 룸메이트를 보며, 아즐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조금 서먹한 시기가 있긴 했지만, 매일같이 한방에서 지내는 친구다 보니 지금은 제법 관계가 좋아진 베네트.

괜히 대련을 종용했다가 무참히 패배하게 만든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지, 그녀는 틈만 나면 아즐린을 챙기며 조금 과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너는 어때?”

“으으, 난 완전히 망했어. 아까부터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게…….”

“저런…… 오늘이야?”

“으응, 아냐. 본격적인 건 아마 모레? 그나마 최악은 면했지.”

여성이라면 매달 어쩔 수 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기간이 있다.

다행히 자신은 평가일과 그날의 주기가 겹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아즐린은 평소보다 날이 선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주변의 생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높은 순위를 받고자 칼을 갈고 나왔다는 느낌이 드는 굳은 얼굴이 대부분이다.

“나는 중간만 가면 다행인 것 같은데, 아즐린은 어때?”

“응?”

“목표 등수가 있을 거 아냐. 사실 같은 반 생도들끼리야 단체 훈련이나 친선대련도 자주 하니 대충 서로 실력을 아니까, 대략적인 순위는 예상이 되긴 하는데. 아즐린은 딱히 다른 애들이랑 교류도 안 하는 편이고.”

베네트의 질문에, 아즐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목표라면 당연히.

“1등.”

“에?”

“1등이 하고 싶어.”

현실성 없는 이야기인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라고 해서, 아예 눈을 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 된다고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었다면 진작에 기사의 꿈도 접었을 것이었다.

‘내가 하기에 따라 상위권까지 노려볼만할 거라고 교관님이 말씀하셨어. 그러니…… 죽도록 힘낸다면 1위를 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을 거야.’

스스로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신을 인정해 준 교관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최고의 성적을 냄으로써.

“아하하…… 응, 그래. 서로 힘내자!”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아즐린을 보며 애매하게 웃어 보인 베네트는, 그래도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싶진 않아 적당히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어서.

“다들 눈빛에 힘이 들어가 있군. 전투 중에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그럼 시험을 실시하겠다.”

담임 교관 칼릭스의 말과 함께 월말평가가 시작되었다.

* * *

평가를 위한 대련은 일반적으로 실력을 고려해 비슷한 수준의 생도들끼리 붙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직은 생도들의 순위가 정해지지 않은 최초의 시험평가이기에, 첫 대전은 무작위 추첨을 통해 진행하게 되었다.

‘으와…… 운이 좋았네.’

상대방의 실수로 생각보다 수월하게 1승을 챙긴 베네트는, 자리로 돌아가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반에서 자신의 실력은 중하위권 정도.

대충 15등 안으로 평가순위를 기록할 수 있다면 선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1승이고. 다음에도 운이 따라주면 좋겠는데.’

방금처럼 어떻게 한 번 정도만 더 이기면 목표 순위는 무난할 것 같았다.

대련은 상대를 바꿔가며 여러 차례 진행이 된다.

자신 같은 경우는 어차피 상위권까지 오를 일은 없을 테니, 대략 3번 정도의 대련으로 시험을 마감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최상위권까지 올라가 순위를 다투는 생도들은, 그 두 배쯤 되는 횟수의 대련을 치르게 될 것이고 말이다.

‘앗, 아즐린이네. 화이팅!’

긴장된 팔 근육을 주무르면서 다음 차례의 대련이 누구인가 지켜보던 베네트는, 담임 교관의 호명에 앞으로 나서는 아즐린을 발견하고 속으로 응원을 건넸다.

그러나 응원의 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즐린의 앞으로 올라온 상대가 영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흥. 몸풀기도 안 되겠군.”

“…….”

베런 레오날드.

아즐린과는 악연이 있는 상대다.

‘으아, 하필 첫 상대로 저 녀석이야?’

교관 앞에서 나대다가 호되게 당한 일로 비웃음을 사긴 했지만, 베런은 실력만 놓고 보면 반에서 최소 3위 안에는 들 것이라 평가받는 강한 생도다.

실력도 뛰어난 데다가 아즐린에게는 이미 한번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가히 최악의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베네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즐린을 바라보는 가운데.

검 자루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길게 심호흡한 아즐린은,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눈으로 베런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고 싶지 않아.’

첫 상대로 하필 저 녀석을 만나게 된 것에 동요하긴 했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오히려 베런이 상대라서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달라진 스스로의 실력을 체감하기 위해선,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상대가 없으니.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속 가득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아직은 내가 지는 게 당연하다고 교관님이 말했어. 하지만 앞으로의 성취에 따라 그 당연함이 반대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

한 달, 정확히는 패배 이후로 3주.

아직 그 당연함이라는 것을 뒤바꿀 실력을 갖추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그래도 어쩌면.

‘교관님의 검술은 굉장해. 부족한 건 나 자신뿐.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고작 20여 일의 시간일 뿐이지만, 교관의 가르침을 흡수하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다.

거기에 상대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테니, 지금이라면 지난번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즐린은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준비되었나?”

“넷!”

“흐, 뭐 준비까지야.”

“베런.”

“……예이. 준비됐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베런과 달아오른 기색이 가득한 아즐린을 번갈아 보던 칼릭스가 이내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시작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베런이 힘차게 땅을 박차며 아즐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별것도 아닌 상대이니, 길게 끌 것 없이 단숨에 격파해 버릴 요량이었다.

전신의 몸무게를 제대로 실은 검에 돌진력까지 더해진 강격이 아즐린을 향해 휘둘러졌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어쩌면 이 일합만으로 승부가 갈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카앙!

베런과 아즐린의 검이 충돌하며 강렬한 금속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팔이 크게 뒤로 꺾인 아즐린이 맥없이 물러나며 휘청거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놓칠 듯한 모습에, 베런은 역시 별거 없다고 생각하며 더 깊숙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속타로 완전히 끝장을 낼 생각이었으나.

“엇!?”

어느 순간 갑자기 아즐린의 신형이 베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가를 위해 냉철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칼릭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암향표?’

중원무림을 대표하는 거대문파들 중, ‘화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의 신법으로 분류되는 무공.

그가 아즐린에게 전수하고 있는 검선의 무공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법의 핵심요결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아직 실전에서 써먹지는 못할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그 하루 사이에 부족한 숙련도를 조금이나마 메울 진보를 이룬 모양이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다니까. 기이할 정도로 화산이란 문파의 무공과 상성이 좋기도 하고.’

무림에서도 유명한 상승의 신법인 암향표 특유의 은밀함과 신속함을 보이진 못했지만, 그래도 암향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틀은 갖춘 움직임.

신법을 통해 베런의 공격에서 벗어나 측면을 파고든 아즐린이, 그대로 눈에 보이는 빈틈을 향해 빠르게 검을 찔러 넣었다.

따끔.

거의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몸을 비튼 베런은, 뺨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움찔하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런 씨!”

가까스로 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을 찔려 어이없이 패배할 뻔했다.

저번에도 기묘한 동작으로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가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하는 움직임이라니.

‘진짜로 교관에게 뭔가 대단한 걸 배우고 있는 건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상대에게 패배를 당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 축 처져 있던 긴장감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히요오옵!”

달라붙은 아즐린을 뿌리치기 위해, 베런은 특유의 듣기 좋진 않은 기합과 함께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미약한 오러가 어깨를 타고 팔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이어서 오러로 강화된 근력으로 더욱 강맹해진 검격이 아즐린을 향해 가해진다.

이대로 후속타를 이어가려던 아즐린은,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재빨리 공세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오, 제법.”

상황을 지켜보던 칼릭스가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전투에서의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생도들은 한번 잡았던 기회를 포기하지 못하고 억지로 매달리다가, 그대로 망해 버리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

그런 점에서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연속공격을 포기한 아즐린의 태도는 훌륭했다.

단순히 겁을 집어먹고 몸을 뺀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여전히 불이 붙어 있는 눈빛을 보아하니 계산을 갖추고 취한 행동임이 확실해 보였다.

‘베런 생도. 좀 웃기는 놈이지만 실력은 생도 사이에선 수준급인데, 아즐린이 과연 녀석을 꺾을 수 있을까?’

신법을 통해 우위를 점하긴 했지만 쉬이 승산을 따지기 어려운 이유는, 베런이 2군 하급반에서는 보기 드문 오러 유저이기 때문이다.

오러 유저의 신체 강화가 더해진 일격은, 단 한 번의 기회로 전투를 매듭지을 수 있는 필살의 한방이 될 수 있다.

기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속에 미량의 오러를 품고 있긴 하다.

그걸 스스로의 의지로 활용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일반인과 오러 유저가 갈릴 뿐.

‘이것도 무림과 우리 대륙의 큰 차이이긴 하지. 내공심법은 1성의 기본성취만 이뤄도, 외기를 몸에 받아들여 축적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데…….’

오러브레싱은 인체에 대한 정밀한 지식이 없이 막연히 호흡과 오러의 흐름을 일치시켜 몸에 퍼트리자는 관념이 거의 전부이다 보니, 오러에 대한 감응력이 예민한 소수를 제외하면 오러 활용을 깨우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다 보니 바깥에서 일찌감치 오러브레싱을 배워왔다고 하는 생도들 중에서도, 오러를 활용한 신체 강화를 할 줄 아는 이는 반의반도 채 되질 않는다.

아즐린 역시 기사를 아비로 두어 어릴 때부터 오러브레싱을 익혀왔지만, 칼릭스를 만나기 전까진 제대로 오러를 다루지도 못하는 생도였으니.

물론 지금은 자신에게 교육을 받으며, 아즐린 또한 오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검술과 달리 무공은 그 분야가 워낙 세분화되어 있기에, 효과가 단순한 신체 강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오러를 활용하고 있을 뿐.

어설프게나마 저렇게 신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끼야압!”

베런의 기묘한 기합성이 고막을 찔러,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칼릭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위력적인 베런의 공격이 수차례 이어지며 아즐린이 계속 압박당하고 있는 형세.

주변인들이 보기엔 수세에 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칼릭스가 이미 눈치챘듯이, 아즐린은 맥없이 물러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아즐린의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의 관절들이 급격히 움직이며, 이에 따라 검 끝이 격렬하게 흔들려 눈으로 보고도 따라잡기 힘든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핫!”

지켜보던 칼릭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저걸 노리고 끌어들인 건가? 아직 초식의 형도 완전히 숙달하지 못했으면서……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판단이긴 하군.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이초식 매화접무.

춤추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어지럽게 팔랑거리던 검이, 베런의 검격을 흘려보내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자루 검으로 중원에 위명을 떨친 검선의 사문.

바로 그 화산파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검법이, 차원을 건너 사람들의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