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8화 (8/124)

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8화

상급교관 에드거

“아니, 오러브레싱을 배우는 데에 왜 이런 공부를…….”

“내게 가르침을 받기 싫다면 그만둬도 좋다.”

“으윽…….”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아즐린은, 칼릭스의 단호한 대답에 꼬리를 말고 그가 양피지에 적어준 문자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기사의 딸인 그녀는 이미 부친에게 전수받은 오러브레싱을 익히고 있었지만, 새로운 오러브레싱을 알려줄 테니 반드시 익히라는 교관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이미 익힌 오러브레싱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위험하다고 알고 있긴 해도, 이제는 나름대로 교관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에 거부감이 크진 않았다.

다만 이 ‘혈도’라는 신체의 위치들을 괴상한 발음의 단어로 수십 가지나 적어놓고, 전부 외워야 한다고 닦달하는 것에는 조금 불만이 들긴 했다.

‘아버지한테 오러브레싱을 배울 때는 이런 공부를 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자신이 재능 없는 인간이라 여겼던 사실을 부정하며 손을 내밀어준 교관의 뜻에, 앞으로는 의심하지 않고 따르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아즐린은 불만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빼곡하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글자들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장강, 신주, 뇌호…… 어라, 뇌호혈이 어디라고 하셨죠?”

“쯧, 이곳이다.”

뒤통수에 손가락을 짚고 미세한 오러를 흐르게 하자, 아즐린은 알았다는 듯이 손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여기구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단어들이라 자꾸 헷갈리네요.”

“오러를 남들보다 훨씬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으, 네에…….”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피지 위로 시선을 옮기는 아즐린을 보면서, 칼릭스는 쓴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심법의 정확한 가치를 모르니 저런 말이 나오는군. 무림이란 곳의 기억에서는, 금괴를 한 아름 싸 들고 찾아가도 이런 가르침을 얻기 어려운데 말이지.’

그가 아즐린에게 가르치려는 심법은 이미 전수하고 있었던 검선의 검법과 같은 뿌리를 둔 문파의 것으로, 서열이 높은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가려 뽑은 수재들에게만 전수하는 상승의 무공이다.

이곳 세상에 있는 대귀족들의 가문에 비전으로 전해지는 오러브레싱이 어느 수준인지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부족하지는 않을 거라 여겨지는 공부.

그럼에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기회를 잡았는지도 모르고 난해하다며 투덜거리는 제자를 보자니, 절로 혀를 차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워낙 생소한 가르침이다 보니, 힘들어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만.’

자신도 기억의 동화가 없었다면, 혈도니 기혈이니 하는 게 대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도 무공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심법을 대충 가르치고 넘길 수는 없으니, 어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완벽하게 숙지시키기 위해 제자를 들볶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기존의 오러브레싱이 사실상 명상호흡법 수준에 불과한 것이라 다행이군. 괜히 엉뚱한 경로로 오러를 흘려 넣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었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텐데.’

본디 이미 내공을 수련한 사람이 기존과 성질이 다른 종류의 심법을 익히려고 하면, 진기가 충돌을 일으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오러브레싱, 특히 귀족 가문이 아닌 평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오러브레싱은, 칼릭스가 알고 있는 심법과는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들.

체내의 경락과 혈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사실상 백지나 다름없는 몸 상태였기에,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에 딱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삼류심법 수준의 오러브레싱도 여기선 귀한 가르침이라고, 용병이나 병사들이 기를 쓰고 배우려는 기술이라는 게 참 우습지만.’

일반인과 오러 유저의 몸값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긴 했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오러를 다루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했으니까.

무공에 대한 지식이 생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뻘짓도 그런 뻘짓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으읏-!”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자니, 아즐린이 묘한 신음을 흘리며 상념을 방해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하, 하지만 거긴 좀 기분이 이상해요. 뱃속이 간지러우면서 뜨거운 무언가가…….”

“크흠. 알았으니 다시 정신을 집중해라.”

혈도의 위치와 내기의 흐름을 빨리 기억할 수 있도록 간간이 몸에 직접 오러를 흘려 자극을 주다 보니, 가끔 이렇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지도과정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기에, 이런 부작용(?) 정도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 * *

“어이, 칼릭스. 요즘 꽤 재미를 보는 모양이지?”

빈정거리는 기색을 담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막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던 칼릭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에드거 교관.’

2군 상급반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에드거는, 칼릭스와는 악연으로 이어져 있는 사이었다.

적당히 실력만 있으면 임용할 수 있는 하급반 교관과 달리, 상급반 교관직은 대부분 기사 출신의 인물이 채용된다.

에드거 역시 칼릭스와는 소속이 달랐지만 왕국군에 몸담았던 기사로, 그는 하급반의 유일한 기사 출신인 칼릭스를 첫 만남부터 대놓고 깔보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아마도 하급교관의 일을 하고 있는 칼릭스가, 자신과 같은 기사 출신들의 품위를 훼손시킨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짜증 나는 얼굴을 보는군.’

생각해 보면 이전의 자신이 폭주를 일으킬 정도로 무리한 오러 운용을 시도한 원인에는, 매번 자존심을 긁으며 모욕을 주었던 에드거의 존재가 한몫 단단히 한 탓도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때의 일이 전화위복이 되기는 했지만.

“듣자 하니 요즘 재능도 없는 여생도를 기사로 만들어준다고 구슬려서, 저녁마다 불러내 낯부끄러운 짓거리를 한다고 하던데? 이거 교관 자리가 그런 지저분한 짓이나 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닌데 말이야.”

그냥 고개만 한번 끄덕여 인사하며 말을 섞지 않고 지나가려던 칼릭스는, 뒤따르는 에드거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그와 아즐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교관직을 수행하며 불명예스러운 일을 행한 적은 없습니다.”

“하! 시치미 떼기는. 네 녀석이 교관들의 구역으로 여자애를 불러들이면,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오해가 있었나 보군. 그저 따로 검술 지도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해라, 듣자 하니 불러들이는 생도도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까 싶은 비리비리한 년이라던데. 우수생도 아닌 그런 가망 없는 년을 데리고 따로 특별 수업을 한다고? 그냥 왜소한 체형이 취향이라고 말하지그래? 그 정도는 말하기 부끄러운 성벽도 아니잖나. 클클!”

그와 아즐린을 싸잡아 모욕하는 발언에, 칼릭스는 안색을 굳히고 에드거의 눈을 노려보았다.

칼날이 몸에 닿는 감촉과도 같은 차가운 시선에 잠시 움찔한 에드거는, 이내 인상을 구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이 건을 교관회의에서 거론하면 어찌 될 것 같나? 처신을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칼릭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급교관과 상급교관은 교내에서의 발언력에 제법 차이가 있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정치질이 벌어지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에드거는 2군 학부 내의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중 하나다.

그건 이곳 아카데미의 2군 최고 관리자인 학부장과 에드거가, 제법 가까운 인척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에드거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찍힌 탓에.

이런 구설수에 휘말리게 된다면, 다른 교관들 중에서 칼릭스를 옹호해줄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봐도 좋았다.

아마도 원래부터 친분이 있던 닐슨 정도가, 편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일 터.

“내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없소만, 그쪽과 이런 이야기는 의미가 없을 것 같군. 원하는 게 뭐요?”

짜증스럽게 내뱉어진 칼릭스의 말에, 에드거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니 꼭 내가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이상하군. 뭐 아무튼…… 요즘 컨디션이 많이 좋아진 듯한데, 오랜만에 검술 대련이나 한번 하지? 오늘은 바쁜 일도 없잖나?”

은근한 태도로 전해오는 에드거의 말에, 칼릭스는 피식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였나.’

그가 시비를 걸어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오늘의 목적은 바로 저 대련이었던 모양이다.

오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칼릭스와 검을 섞으며, 그를 짓눌러 치욕을 주고 자신은 우월감을 느끼겠다는 심보가 뻔히 보인다.

수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에 교관들끼리의 대련은 상부에서도 주의를 주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내 자네의 몸 상태를 모르는 건 아니니, 오러 소드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하지.”

선심 쓰듯 꺼내는 말도 상당히 밉살스럽다.

오러 소드는 익스퍼트의 증명과 마찬가지다.

몸 안의 오러를 이용해 신체 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이들을 오러 유저라 부른다.

그런 오러 운용에 숙달되어 체외로까지 오러를 방출할 수 있는 자들.

스스로의 무기에 오러를 담을 수 있는 이들만이, 익스퍼트라 불리며 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원래의 내 몸 상태라면, 오러 소드를 발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겠지.’

오러하트가 망가졌던 그에겐, 오러 소드는커녕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조차도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아야 한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저런 소리나 해대니.

‘오러 소드만 쓰지 않을 뿐, 본인은 마음 놓고 오러를 활용하겠군. 나는 순수한 육체의 힘과 검술 테크닉으로만 싸워야 하고.’

누가 봐도 칼릭스가 훨씬 불리한 조건이다.

물론 이전까지의 상태라면 그랬을 거란 소리다.

불안정한 폭발물과 같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자신은 전혀 새로운 인물이라 봐도 무방했다.

‘마침 오늘은 정규 수업도 없는 날이니, 시간을 내지 못할 것도 없다만.’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2군이라 해도 기사를 목표로 하는 아카데미인 만큼, 모든 수업이 검술에 대한 것으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제식훈련, 전술 운영, 병참 업무, 부대 관리, 몬스터에 관한 지식, 기타 여러 교양과목 등.

기타 분야를 다 합쳐도 검술훈련 시간 하나에 미치지 못하긴 하지만, 담임 교관 외에 관련 담당자를 할당해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칼릭스의 반이 그런 과목을 수강하는 날.

덕분에 교관인 칼릭스의 일정도 비어 있기에, 저쪽의 말대로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피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어떤가? 오늘 적당히 몸을 풀고 나면, 아까 말했던 자질구레한 일 따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결정을 재촉하는 에드거의 말에, 칼릭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소. 어울려드리도록 하지.”

“흐흐! 의외로 화끈하게 나오는군. 그럼 자리를 옮겨볼까?”

마음에 들지 않는 칼릭스를 실컷 두들겨 패줄 생각에, 에드거는 한껏 신이 나서 경쾌한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칼릭스 역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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