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2화
쿵쿵!
“거 이 시간에 뭐가 그리 좋다고 시끄럽게 굴고 난리야!”
벽을 두드리며 들려오는 음성에 칼릭스는 웃음을 멈추었다.
이어서 자신이 있는 장소를 자각한다.
교관 전용 숙소.
싸구려 여관방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곳이기에, 방음이 잘되지 않는 장소다.
“가뜩이나 내일부터 애새끼들 보모 노릇으로 바빠질 건데! 조용히 잠 좀 잡시다, 칼릭스 교관!
꿈속의 기억과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던 칼릭스는, 간신히 옆방 동료 교관의 이름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조용히 하겠소, 설리번 교관.”
“커흠! 언제까…… 잘난…….”
알아듣기 힘든 크기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잠시 들려오다가 다시 잠잠해진다.
‘그래…… 올해 들어온 생도들의 교육 일정이 내일부터였지.’
알펜시아 나이트 아카데미.
칼릭스는 그곳의 검술 교관이었다.
왕실이 지원하는 국립 교육소인 알펜시아 아카데미는, 국방력의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는 기사를 양성하는 장소.
그렇기에 아무 도시에나 널린 여느 검술길드들의 분파 따위들과는 다른 양질의 교육 환경을 자랑한다.
다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편성이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혹은 출신을 커버할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극소수의 평민들에게 허락된 1군 생도들의 이야기.
중앙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귀족들이나 기사를 지망하는 하층민들로 이루어진 2군 생도 출신이라면, 같은 아카데미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뒤떨어지는 지원과 교육만을 받게 된다.
2군 출신으로 기사가 되어 왕국군의 고위직까지 출세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보기가 어렵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어먹는 신세이고.’
칼릭스의 직업은 2군 생도를 지도하는 하급교관.
사실상 존경받는 교육자라기보단, 단순히 생도들을 관리하는 교육업무 보조자 정도의 인식을 받는 위치다.
대부분 실력이 떨어지고 나이 들어 은퇴한 기사들이나 들어오는, 칼릭스 같은 젊은 기사에게는 명예롭다고 하기 어려운 일자리이다.
‘몸만 정상이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저급한 직장이지만.’
오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폐급 기사였으니, 어떻게든 밥벌이라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나마 이런 위치에서나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어쨌거나 이 내공심법이란 것으로 오러하트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다 해도, 꽤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텐데. 별 볼 일 없는 교관 따위는 그만두고, 당분간 회복에 전념하는 것이…… 아!’
마음 같아서는 바로 일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모아둔 재산이라곤 없는 빈털터리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몸을 고치겠다고 마법사들의 비약을 구매하거나 신전의 기부금 등으로 가진 재산을 전부 써버렸기에, 당장 어디에 가서 여관방 하나를 잡을 돈조차 부족했다.
적어도 당장은 숙식이 제공되는 교관 자리를 벗어나, 개인 자금으로 회복에 집중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이곳에서 대충 애들 재롱이나 봐주며 몇 달쯤 뭉개고 있다가, 자금이 적당히 모이면 떠나든지 해야겠어.’
잠깐 짜증이 일었지만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단기적인 목표를 정하며 앞날을 계획한다.
몇 년 동안 그저 죽지 못해서 살고 있던 자신이 다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칼릭스는 가슴이 떨리는 생생한 기쁨을 느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 날이 밝아올 때까지. 칼릭스는 설레는 마음에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 *
생도를 제외한 아카데미 관계자들을 위해 따로 운영되고 있는 간부식당.
배급받은 식판을 들고 빈 테이블에 앉은 칼릭스는, 포크로 음식을 휘적거리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도 교육 과정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끝나기 마련. 저녁 동안의 개인 시간에 운기요상에 집중하고 낮에도 여유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럭저럭 효율적으로 내상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군.’
교관직을 수행하느라 뺏기는 시간이 꽤 있긴 하지만, 지금의 환경도 부상을 치료하기에 그리 나쁘진 않다.
사람의 집중력이란 게 무한한 것은 아니기에, 어차피 생활이 넉넉해도 깨어 있는 시간을 전부 심법에 몰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이대로라면 오러하트의 손상을 완벽히 복구하기까지 대충…… 반년? 그 정도쯤은 걸릴지도 모르겠군.’
만약 금전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24시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치료 기간을 거의 절반까지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이었다.
“칼릭스. 어제 잠을 잘 못 잤나? 얼굴이 영 푸석푸석한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옆자리에 다가와 앉는다.
고개를 돌린 칼릭스는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닐슨 교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카데미 2군 상급교관 닐슨.
칼릭스에게는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부상 전의 칼릭스가 왕국기사단 소속으로 무난하게 출세 코스를 밟고 있던 시절.
같은 부대에서 그와 함께 복무했던 닐슨은, 칼릭스가 유일하게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동료였다.
‘기사단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준 선배님이지.’
뛰어난 재능과 발전 속도를 보여 왕실 고위직 관리들이 눈여겨보곤 했던 칼릭스는, 그만큼 다른 기사들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런 칼릭스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선임이었음에도, 닐슨은 쭉 평기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부대 내 자잘한 임무를 도맡아 하던 무력수준이 떨어지는 기사였다.
그래도 안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헐뜯거나 이용해 먹으려 들던 몇몇 동료들과는 달리, 닐슨은 일관성 있게 사람 좋은 태도로 자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칼릭스 또한 실력과는 별개로, 항상 그를 선배 대접하며 꾸준히 친분을 다지곤 했다.
‘내가 그나마 밥벌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닐슨 선배 덕분이고.’
재능이 부족했던 탓에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일선에서 은퇴한 닐슨은, 기사로서의 커리어는 대단치 않았지만 그래도 2군이나마 이곳 아카데미의 상급교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폐인이 되어 떠돌던 칼릭스를 안타깝게 여겨 하급교관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전부 닐슨의 배려였다.
“건강 좀 잘 챙겨라. 그렇지 않아도 바쁜 시즌인데, 교관 중에 이탈자라도 생기면 골치 아파진다.”
“걱정 마십시오.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잠을 설쳤을 뿐입니다.”
“흐음. 그래? 무슨 고민인지 몰라도 잘 해결하길 바라마. 그나저나 이번 반 편성에 말이지-”
그렇게 식사와 함께 일상적인 잡담을 이어가던 도중.
닐슨의 포크가 은근슬쩍 칼릭스의 식판 근처를 향했다.
나이가 마흔 줄에 들어섰음에도 본성이 낙천적이고 장난스러운 성격을 지닌 닐슨이었기에, 나름 친분이 깊은 칼릭스의 앞에선 이런 유치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마침 메뉴에 그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이 있어,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포크를 내리꽂는 순간.
챙.
벼락같이 움직인 칼릭스의 포크가 닐슨의 포크와 부딪치며 금속음을 냈다.
“잉?”
실실 웃으며 반찬을 뺏어 먹으려던 닐슨의 안색이 급변했다.
칼릭스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제대로 쫓지 못했기 때문.
“이, 이런! 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단련된 기사의 신체라곤 하지만, 오러를 활용해 강화한 육체 능력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속도였다.
오러하트가 망가진 상태로 함부로 오러를 운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가.
장난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칼릭스의 오러하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닐슨으로선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칼릭스 역시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출수를…….’
무림이란 곳에서 살아간 수십에 달하는 무림인들의 기억.
그것은 평소에는 칼릭스 본인의 행동에 강제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로 깊게 동화되어 있진 않았으나, 위협을 인식하자 무의식에서 뛰쳐나와 강하게 발현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사실 위협이라기엔 고작 포크일 뿐이고 목표가 칼릭스의 몸도 아니었지만, 날붙이가 자신 쪽을 향해 찔러오는 형국이었으니 오해가 생길 만도 하다.
그의 기억 속 무림인들이란 불시의 암수에 목숨을 잃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그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들이었기에.
“진정하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야 이! 너 방금 오러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까 말을 못 했는데, 잠을 설친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제 오러하트가 조금씩 자연적으로 치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뭐? 무슨,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절 보세요. 멀쩡하지 않습니까?”
“엇? 으음……!”
몸 안의 오러가 폭주하게 되면 기세라든가 겉모습 자체가 눈에 띄게 변하기 마련이다.
감각이 둔한 일반인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같은 기사였던 닐슨이 눈앞에서 문제가 생기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 진짜 괜찮은 거냐? 대체 어떻게…… 그게 치료가 가능한 부상이었다고?”
“예. 이전의 제 노력들이 아주 부질없던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제까지의 칼릭스라면 큰 위험이 동반될 수도 있었겠지만, 운기요상을 통해 내부가 안정되어진 그에게 이런 소량의 오러 운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다만 오러하트의 부상을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능하면 타인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사태로 누군가에게 들키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내공심법을 통한 운기요상…… 이건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지식이다. 일단은 자연치료가 되고 있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내게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이가 반드시 생겨날 거야.’
그나마 들킨 상대가 닐슨이라서 다행이었다.
폐인이 되었던 자신에게 유일하게 도움을 준 상대인 닐슨이라면, 다른 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거라 믿었기에.
“이 이야기는 일단 함구해 주십시오.”
“그, 그래. 알았다…… 허헛.”
잠시 헛웃음을 흘리던 닐슨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칼릭스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잘됐구나. 네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정말…… 잘된 일이야.”
“……선배님.”
그의 진심 어린 축하에 칼릭스는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칼릭스는 닐슨에게 입단속을 해주기를 재차 부탁했다.
“그래.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혹여나 실수로라도 후배님의 상황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나도 주의하도록 하마.”
“예. 부탁드립니다.”
닐슨이 행동은 가벼워 보이긴 해도 스스로 뱉은 말까지 가벼이 여기는 인물은 아니다.
분명 자세히 묻고 싶은 것들이 많은 상황일 테지만 본인의 말대로 더 이상 칼릭스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닐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에 열중했다.
‘동화된 기억으로 인해 무공이 함부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군.’
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칼릭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잠시 소란스러웠던 아침식사를 마친 뒤.
칼릭스는 교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느긋하지만 힘찬 걸음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귀찮긴 해도 월급 받는 값은 해야지.’
오늘부터 그가 담당하는 반으로 배정된, 아카데미의 신입생들을 맞이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