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 게임, 실험, 진실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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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은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변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 게임의 ‘관리자’들—고든 프라이스가 ‘신’이라고 굳게 믿었던 존재들의 계획에 균열이 일어났다.
으레 인위적인 ‘실험’이든 신이 내린 ‘시련’이든, 그 과정이 주도하는 이의 의지대로만 흘러가리란 법은 없으니…… 숱한 신화속에서도 신이 영웅에게 내린 시련은 꼭 신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지 않던가?
즉, 변수는 반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방금 그 목소리는…….'
이현욱은 방금, 진실을 알려줄 테니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누군가는 어쩌면, 이현욱과 인류를 도우려는 걸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닐지라도, 적어도 관리자들보단 우호적일 거다.’
이현욱은 실낱같은 희망을 느끼며 그 목소리를 쫓아서 블랙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후우우우——
그는 다시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을 마주했다. 그가 블랙 게이트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블랙 게이트 주변으로 플레이어들과 비공정이 잔뜩 모여 있었는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블랙 게이트를 포위하고 있는 듯했다.
"—어, 스틸레인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현욱이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는 것에 놀라는 한편,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는 구—우—우—하는 기이한 굉음이 울리고 있었고, 이현욱이 올려다본 하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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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본디 하늘에는 엔딩과 관련된 문구가 <전체 공지>로 떠 있었거늘, 지금은 이상한 문자들로 바뀌어 있었는데,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이 오류가 난듯한 장면이었다.
“한 3분 전에 저렇게 변했어요.”
이 목소리는 김세희였다.
그녀는 이현욱에게 다가오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래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논의 중이었고요.”
"그렇군요.”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그때, 하늘의 글자는 곧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바뀌었다.
"어라, 저기 봐! 또 바뀌었어!”
“……근데, 저건 어느 나라 문자야?”
"글쎄요, 진짜 처음 보는 데요.”
그걸 읽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즉, 시스템의 자동 번역 기능이 지원하지 않는 언어와 문자라는 뜻이었다.
이현욱 역시 그걸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 이현욱, 너를 부른 건 나다.
웬 목소리가 온 세상이 퍼졌다.
그 목소리를 따라서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작은 인영이 하나 떠 있었다.
이현욱은 ‘천리안’ 스킬로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여자, 그것도 어린 소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저 여자가 관리자들의 시스템을 먹통으로 만든 뒤에 나를 부른 존재다.’
그런데.......
"어…… 니, 니콜이잖아?”
웬 목소리가 그 소녀를 알아본 듯이 소리치는 게 아닌가?
이현욱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물의 정령왕과 그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단 한 명의 정령에게 향했다.
“……딸아,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물의 정령왕이 자신의 딸, 제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제인은 확실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 제가 아버지께 말했던 적이 있는 그 예언자예요.”
한편, 그 말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고개가 갸웃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예언자 특성을 가진 유일무이한 플레이어는 오래전에 죽었어요!”
그렇게, 다소 공격적으로 말한 건 강서윤이었는데, 그녀는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의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그럴 것이, 예언자라고 불린 S등급의 플레이어는 안도 스즈, 역사상 그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안도 스즈는 가디언의 멤버로서, 강서윤과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현욱은 불현듯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예언자라는 말이 자주 나왔었다.’
이현욱은 몇 달 전 ‘위그드라실 시티’에서 정령왕의 딸을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잭 해링턴과 한나 테이트라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 니콜이라는 이름을 몇 번 언급했었고, 그때마다 니콜이 무언가를 예언했다고 말했었다.’
그 당시 이현욱이 그 아이들의 말을 엿듣기로는, 그 여자애가 정령왕의 딸이 위기에 처할 것이란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구해질 것까지 예언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현욱이 알기로도 ‘예언자 특성’을 가진 플레이어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기에, 그 녀석들의 대화는 그저 시답잖은 장난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생각하고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등장했다면…… 애초에 정체가 플레이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게임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나를 오랫동안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내 그녀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안녕, 여러모로 황당한 상황이지, 안 그래?”
"넌……."
"응, 나도 ‘관리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어.”
그녀는 이현욱이 무슨 질문을 할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끊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까 그 어설픈 연기나 하는 놈들과는 사이가 나쁘니까 너무 경계하지는 않아도 돼. 나도 네가 필요하지만 기만하지 않고, 너를…… 설득해서 데려갈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맥락으로 흘러가는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현욱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이현욱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자,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시스템이 복구되기까지 한 십오 분 정도 남았거든, 그 전까지 스무고개 해줄 용의는 있는데, 어때?"
저 여유 넘치는 표정 속에서 이현욱은 진실 된 호의보다는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감지했다.
즉, 인류를 애처롭게 여겨서 구원해주려는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거다.’
이현욱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곤두세웠다.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추가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기에, 이현욱은 고민할 것 없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누구냐?”
이 게임을 만들어서 다차원의 인류에게 시련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자행하는 존재…… 그들은 적어도 신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부터 알아야만, 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터였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우리는 신 같은 건 아니야. 그런데 신이 되고 싶은…… 그리고 그 단서를 발견한 이들이라고 해야 할까? 음, 대충 이게 맞는 설명 같아.”
그녀는 턱을 긁적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웅——
그러자 하늘에 떠 있는 <전체 공지>가 다시 수정되었다.
- 주의! 시스템의 ‘플레이어 잠재력 억제’가 2단계로 하향조정됩니다!
* 일부 플레이어는 억제된 마나 체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일부 플레이어는 한계치 이상의 마나 체화로 인하여 신경계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큭!”
그러자 이현욱은 자신의 감각이 훨씬 방대하게 뻗어 나가는 느끼는 한편, 그의 시선에는, 온 세상에서 푸른빛의 반짝이는 무언가에 걸렸다. 그것들은 플레이어, 몬스터, 아이템 그리고 모든 곳에 있었다.
이현욱은 그것들을 살피며 짧게 읊조렸다.
"마나—”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바로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 이후에 나타난 모든 신비의 작동원리인 ‘마나’였다.
"응,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조금 다르지만, 너희 세상에는 그런 익숙한 이름으로 쓰이도록, 우리가 설정한 거야.”
“……나는 우리 세상에 관한 게 아니라, 너희 세상은 어디고 너희는 누구인지, 그게 알고 싶다. 그게 내 질문이다.”
“그래그래, 너무 조급해하지 마. 다 말해줄 테니까, 음……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차원의 다른 우주에서 왔다고 하면 될까?”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세상이 밤으로 바뀌었고, 또 한 번 튕기자 은하수가 잔뜩 깔렸다.
그건 일종의 신기루 마법일 것이었다.
그녀는 그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는 양손을 펼쳤다.
"이 세상은 워낙 넓고, 우리는 꽤 멀리에서 왔어. 뭐, 한 마디로 외계인이지, 너희 말로 한다면 말이야.”
즉 외계 종족이 인류를 대상으로 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지나가 듯이 말했으나, 이현욱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본능적인 적개심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겪은 재앙들이, 외계인의 실험이었다는 건가?’
이현욱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마나, 그것은 차원의 틈새에 포진된 ‘초물질’이야. 이건 너희 인류가 알고 있는 물리학 같은 기초적인 우주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꽤 상위 차원의 지식이란다.”
"그리고 그게 뭐냐면, 이미 너희도 충분히 경험했다시피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의지를 통해서 물질 조작이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인데…… 지성체의 신경계와 물질계를 얽히게 해서……."
그녀는 말하던 도중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웅— 웅—
이 일대에 널브러져 있었던 이현욱의 금속 무기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산화하며 뜨거운 불꽃으로 변했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급랭하며 빙결했다.
“……이렇게 시차 없이, 한계 없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거야! 뭐, 너희도 다들 경험해봤잖아?”
이현욱으로서는 명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마나라는 것이…….
“……신을 탄생시킬 수 있는 재료라는 뜻이군?”
이현욱의 정의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우리는 사정이 있어서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해.”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그걸 대체 왜 우리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거냐?”
그녀는 대답 대신에 양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왼손, 오른손에 각각 쥐가 한 마리씩 생성되었다.
찍— 찍—
“그게 말이지, 이 마나를 다루는 방법이 아직 온전하게 연구되지 않아서, 곧장 우리에게 적용하기는 위험한 상황이야. 뭐, 너희도 신약을 개발할 때 인간한테 바로 실험하지는 않잖아? 약 하나가 개발되는데 얼마나 많은 동물이 죽는지 알고 있어? 즉, 안전 확인을 위한 임상 시험이 필요한데, 이게 보통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보니까 상상 이상으로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
"그래서, 우리가 임상 시험 대상이 된 거군. 그 데이터를 쌓기 위한 한낱 소모품으로……."
"그래, 우리의 연구자들이 차원을 떠돌다가 어느 작은 항성계의 고등한 신경계를 가진 종족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너희인 거야. 뭐, 이점은 나도 여러모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즉, 외계 종족의 열망을 위해서 한낱 실험 재료로 소모되는 것…… 실험실의 쥐와 다름없는 것…….
그게 이 게임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 이야기를 함께 들은 이들, 어쩌면 전 인류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듣고 있는 게 진짜야?”
"미친, 이건 꿈일 거야……."
그때, 그녀의 손 위에 있던 쥐가 팍— 소리와 함께 터지고 우그러지더니 그냥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반대로, 나머지 한 마리는 점점 털이 자라나며 거대해지더니 쥐가 아니라 작의 용의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그 용을 이현욱을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자, 이게 이현욱 너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실험에서 가장 성공한 실험체라는 뜻이었다.
"넌, 신으로 가는 프로토타입이고 우리 종족에게는 아주 귀중한 실험 결과물인 거야. 네 신경계는 지금 마나와 완전히 융합되었고…… 사실상 신의 모습에 근접한 상태라면 조금은 기쁘려나? 하하— 어쨌든, 널 억제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훨씬 더 강력한 기적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이현욱은, 조금 전에 마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감각이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나를 묶고 있던 무언가가, 풀어졌다.’
그건 지금껏 겪었던 숱한 성장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력했으니…… 이제는 금속뿐만이 아니라, 흙.붉.물 등 일대의 모든 물질이 세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곧, 그것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관리자들은 너를 더욱 연구해서, 이 실험을 완수하려는 건데…… 나를 비롯한 몇몇은 그들과 생각이 조금 달라서, 이렇게 너와 손을 잡으러 온 거고.”
즉, 관리자 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서로 이현욱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 중이라는 뜻이었다.
“음, 이제 한 십분 남았는데, 또 질문 있어?”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러면 날 회귀시킨 게 너희인가?”
이 모든 여정의 시작점,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 그거? 그건 말이지……."
그녀는 킥킥 웃더니, 민망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숨을 고르다가 내뱉은 한 마디는, 다소 황당한 것이었다.
"그건, 순전히 버그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