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게임, 실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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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끝이다.’
이현욱은 총구에서 뿜어져 오르는 마나의 흐름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총구 끝에 걸린 한 명의 인영一고든 프라이스가 갈가리 찢어져서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는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그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갓 슬레이어(명인)
- 효과 : 이 공격은 신살(神殺)의 힘을 품고 있으므로 모든 방어를 무시합니다. 단 5번 발의 탄환을 발사하면 소멸하게 됩니다. (현재 남은 횟수 : 4)
이것은 신화 등급의 아이템인 ‘미스틸테인’을 재료로 하는 최초의 ‘명인’ 등급의 플레이어 제조 아이템으로써 5발밖에 쏠 수 없지만, 단 1발이면 충분했다.
"크아아아——”
그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고든 프라이스의 온몸에서 스파크가 요란하게 튀고 있었다.
그건 전기 같은 게 아니며 배리어가 녹아내리고 격이 타들어 가는 기묘한 현상이었다.
즉, 소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런 현상이 일어나면, 성녀가 힐을 해줘도 살 수 없다.’
이현욱은 전생에 동료가 저렇게 죽는 장면을 몇 차례나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렇게 끝날 수는……."
그놈은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비비 꼬더니, 이내 인간의 형상을 잃고는 마왕의 모습으로—그러니까 촉수 같은 생김새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 이제 다 끝났다.”
이현욱은 놈에게 다가가면서 철컥— 갓 슬레이어의 펌프를 한 번 더 당겼다.
이미 충분한 데미지를 입혔기에 그냥 두어도 결국 소멸할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기에 확실하게 한 방을 더 먹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놈은 몸이 바스러지면서도, 그리고 자신이 패했다는 걸 직감했음에도 이현욱을 향해 악다구니를 퍼붓는 걸 멈추지 않았다.
“큭— 차, 착각하지 마라, 네가 이긴 게 아니다!”
"......."
"결국, 전부 그, 그들의 뜻대로 된 거다! 네가 나를 이긴 건 그들이 내가 아니라 너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저 더욱 성공적인 실험 결과물로써……."
그는 억지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 순간 너희가 수행 중인 <월드 퀘스트> 그건 이 차원의 마지막 시나리오다. 그게 무슨 뜨, 뜻인지 알고는 있나? 이 실험에서는 얻을 수 있는 모든 결과를 다 얻어서 실험 종료가 임박했다는 거다!”
이현욱은 슬슬 언짢아졌다.
"그래서, 그 볼품없는 징징거림이 신이 되고자 하는 마왕 각하의 유언인가?”
"하하— 나는 널 놀리려는 게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시, 실험이 끝나면, 실험실의 도구와 재료는 어떻게 될지를 말이야!”
그 말에, 이현욱은 고든 프라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눈치를 챘다.
‘내가 지키고자 한 이 세계가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을 또 하려는 거다.’
즉, 놈은 지금 유언으로써 이현욱에게 저주를 퍼붓고자 하는 것이었다.
“—무릇 실험의 '결과물’은 더 큰 시, 실험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나머지 ‘재료’나 ‘부산물’은 가치에 따라서 구분되어서 재활용되거나 폐기된다!”
"그러니까 ‘결과물’인 너는 나처럼 두 번째 실험으로 투입되고 나머지는 쓰, 쓸모를 구분해서……."
그 촉수의 눈이, 어디론가 향했다. 이현욱의 오른쪽 부근이었는데, 그곳에는 제2 왕자가 이끄는 다크 엘프, 아가이디카가 이끄는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 등의 아군 몬스터 부대가 몰려 있었다.
“……그 부산물은 어느 정도 쓸만하다면 저기 저것들처럼 몬스터로 재활용되거나, 아니라면 아예 폐기되어 버린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인 거다. 으흐흐—”
그 말에 이현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몬스터가, 한때는 플레이어였다는 거냐?”
이 게임의 정체만큼이나 해결할 수 없었던 의문 중 하나는 몬스터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이 지성을 가진 몬스터들과 접촉할 때마다 가장 먼저 ‘어디에서 왔고, 왜 왔느냐’냐고 물었다.
‘나도 여러 차례 지성을 가진 몬스터들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치 로봇이 된 것처럼 정해져 있는 모호한 대답을 해댔다.’
가령, 고향 세계가 멸망해서 피난 왔다거나 혹은 신의 계시를 받고 차원을 넘어왔다거나,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것이었고, 자세하게 캐물으면 호감도가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성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렇기에 몬스터에 관해서는 인류의 신화와 상상력에 기반을 둔 존재라는 뻔하디뻔한 추정 외에는 지금까지도 그 어떤 사실도 알아낼 수 없었다.
"으흐흐— 이게 거짓말 같나? 그게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건가? 그러나 결국 네가 목격하게 될 진실이다.”
"너는 네가 지키려던 세계의 끝을 네 손으로 내게 될 거다.”
이현욱은 놈의 말을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실험이라면, 고든 프라이스도 실험실에 갇힌 한 마리 쥐일 뿐이다.’
즉, 놈에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내가 직접 끝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갓 슬레이어’를 놈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그 폭음과 함께 놈의 몸이, 허무하게도 먼지가 되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우우우——
이게 두 번의 삶을 이어서 상대해온 원수의 최후였으니…….
'아…….'
이현욱은 순간적으로 왠지 모를 강렬한 공허감을 느꼈다.
- 축하합니다! 당신은 월드 퀘스트의 보스 몬스터 ‘마왕’을 처단하였습니다!
그 시스템 메시지는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아주 잠깐, 무거운 적막이 흐르더니…….
와아아아——!
이내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이 전장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니, 온 세상이 환호하고 있을 것이었다.
저 멀리에서 온갖 마법들이 하늘로 치솟아서 터졌다.
펑— 펑—
마치 폭죽을 터뜨리듯이, 기쁨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멸망한다는 공포감이 퍼진지도 꽤 오래전이었다. 그간 인류는 모든 활동을 멈춘 채 오로지 이 싸움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방금, 인류가 승리하며 그 모든 근심과 걱정이 깨꿋이 씻겨나갔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하…… 정말로 이길 줄은 몰랐는데……."
“좋아, 다 끝났다! 이제 푹 쉴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모든 게 가능하게 한 단 한 명의 영웅의 이름을 연호했다.
스틸레인—! 스틸레인—!
한때 서울의 구원자로 출발한 그는 이제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현욱은, 아니 오로지 그만은 이 통렬한 순간에도 통쾌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오히려 마왕을 상대하기 전보다 머릿속이 훨씬 복잡해졌다. 그리고 가슴 속은 무언가 허전해졌으니…… 이는 고든 프라이스를 죽인 뒤부터 그를 잠식해나가고 있는 이유 모를 공허함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 그 공허함의 이름은 바로 ‘목표의 상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껏, 목표를 잃은 적이 없었다.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이래에 실패한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맹렬하게 달려왔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웠다.’
그러는 동안 다른 건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물론, 근본적인 의구심—회귀의 이유나 이 게임의 정체 등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해결할 수 없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서든 최선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선(最善), 이를테면 승리와 평화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능동적으로 달려온 모든 목표조차도 이 게임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게임의 목적이 그가 원하는 최선과 방향이 다르다면…….
‘나는, 또 한 번 최선을 위해서 싸울 수 있을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가 가진 모든 힘은 이 게임에 근거하지 않던가?
즉, 플레이어에게 시스템은 불가항력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한 가지 의문으로 귀결됐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회귀한 걸까?’
그게 이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한 첫 번째 분기점이었으나, 그 해답은 여전히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그런 생각에 잠식된 채 한동안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 등 뒤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그와 지금껏 함께해온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중 김세희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이제 정말로, 완전히 끝난 거죠?”
그러나 이현욱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그러자 웃음을 머금고 있던 김세희는 불길함을 느낀 듯이 천천히 무표정으로 변했다.
"어, 설마…… 뭐가 더 있는 거예요?”
이현욱은 고개를 저었다.
“……끝나긴 끝날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게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 재앙은, 이 게임은 끝나야만 한다.
하지만 그 끝이란 게 마왕이 말한 것 같다면…….
이 세계의 끝, 이들의 끝, 우리의 끝이라면.......
그리고 그때—
구—우—우—우—웅———!
웬 굉음이, 하늘을 울리기 시작했으니…….
"어, 이건…… <전체 공지>의 전조 아니에요?”
"예,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헉, 그러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요?”
<전체 공지>란, 플레이어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라, 특정 다수의 민간인까지 모두 볼 수 있도록 ‘현실 공간’에 떠오르는 메시지로써 하늘에 거대한 글자가 영사되는 형식이었다.
그런 건 아주 중요한 이벤트의 분기점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내 하늘 한쪽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축하합니다! 해당 월드는 ‘엔딩’에 도달했습니다.
* 최종 승자의 최후 선택을 기다리세요!
“……에, 엔딩?”
그 단어는 모두의 입에서 탄식을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모두가 추구했으나 이제는 잊어버린, 마치 오래된 진리를 마주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니…… 묘한 설렘과 함께 왠지 모를 두려움이 들었다.
“와, 지금 이 게임이 이제 끝난다는 거야?”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능력이나 몬스터가 전부 사라지나?”
"그냥 그렇게 끝나버려도 문제 아닌가?”
이미 너무 오랫동안 게임에 적응한 플레이어들로서는 당혹스러운 한편 앞날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현욱의 눈앞에는 조금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당신은 월드의 최종 승자로서 ‘엔딩’ 선택을 자격을 갖췄습니다. 곧 개방될 ‘블랙 게이트’에 입장하여 최종 선택을 시작하세요.
또한.......
- (!)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아, 메인 퀘스트…….'
언젠가 고든 프라이스가 말하기를, 메인 퀘스트는 한 차원에서 성공적인 실험체로 보이는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현욱은 그 내용을 확인했다.
[메인 퀘스트]
- 두 번째 삶의 기회, 의무, 운명…….
1) 이 세상 어딘가에 열려 있는 ‘블랙 게이트’를 추적하시오. (상위 조건 만족으로 성공!)
2) 전생—첫 번째 세계에서 찾아올 ‘차원 이동자’를 처치하시오. (성공!)
3)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관리자’와 조우하시오.
1번, 블랙 게이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파편을 모아야 한다고 했는데, 월드 퀘스트를 클리어하자 ‘상위 조건’이 충족되었다면서 해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3번은 원래 ■■■로 블록 처리되어 있었는데 마침내 열렸다.
'음, 관리자라…….'
그리고 이내—
지지지지——
그러한 자글자글 끓는 소리와 함께, 근처의 폐허 위에 짙은 검은색의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어, 저거 블랙 게이트 아닙니까?”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다시 긴장하며 무기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럴 것이, 지금껏 블랙 게이트가 발생했을 때는, 꼭 차원 이동자가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블랙 게이트는 다른 차원과 이어지는 문이다.’
즉, 저곳은 지구가 아닌 곳으로 이어진다.
‘즉, 관리자가 있는 곳이다.’
앞서서 듣기로는, 고든 프라이스도 첫 번째 차원에서 승리자가 된 이후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다음에 블랙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만났다고 했다.
‘그들이 바로 관리자고, 그들이 이 게임을 만든 존재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현욱의 차례였다.
그는 동료들은 잠깐 돌아보았다.
그들도 이현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저 하늘에 떠오른 ‘엔딩’을 결정지을 ‘최종 승리자’가 이현욱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이현욱은 갓 슬레이어를 왼쪽 손목에 각인한 뒤, 바닥에 박혀 있는 백여 자루의 모글레이 한 자루를 허공에 띄운 채 블랙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이현욱은 한없이 넓은 검은 공간을 걷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설마 우주인 건가?’
그렇게 생각할만한 공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까지 했다.
저 멀리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고, 가지각색이 성운이 배경의 그림처럼 사방을 에두르고 있었으니…….
그는 우주 한가운데 서 있는 게 분명했다.
이내 웬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렸다.
「잘 왔다, 일개 월드의 최종 승리자여—」
「그리고 필멸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여—」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서 어디에서 울리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일그러지는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손끝과 발끝이 아리고 머릿속과 가슴안이 울리며 어지럽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는 지금까지는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격’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이현욱이 눌려 죽지 않을 만큼 어느 정도 조절되고 있는 듯이, 그 중압감이 오락가락 뒤바뀌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두드려대는 고통을 간신히 참아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내 저 멀리, 아득히 먼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일렁임이 일어나더니 웬 형상들이 빠르게 조합되기 시작했는데…… 원체 거대하여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탓에 정확히 직시하고 인지할 수는 없었으나, 인간의 형상과 닮은 무언가였다.
그것들이 이현욱을 에두른 채 내려다보았다.
'저게 설마 관리자…… 그러니까 신들의 모습인가?’
이현욱은 고개를 치켜든 채로 그것들을 마주 보다가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에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는 우리가 내린 시련을 모두 통과했다.」
「그것도 다중우주의 어떤 인간보다 더욱 훌륭하게, 모든 시련을 완벽하게 해결했고 끝내 최후의 시련인 마왕까지 쓰러뜨렸으니, 그 업적은 실로 놀라웠도다—」
시련, 이현욱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실험’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두 가지 의미는 비슷하지만 오묘하게 달랐다.
그러는 한편, 왠지 모를 분노가, 강력한 중압감을 뚫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련, 무엇을 위한 시련인 거냐?”
그게 이현욱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 안에는 저 관리자들—절대적인 존재들에 대한 경외는 예우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역시 지금 노골적인 반발감을 풍기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번의 삶 내내 인간 세상의 안녕을 위해서 그건 투쟁해오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게임…… 인간을 수도 없이 죽여온 그 장난질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설령 그 게임에서 승리한 자신에게 큰 행운을 줄지라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그저 귀여운 앙탈이었을까?
「하하— 역시 당돌하도다—」
「그 시련은, 너희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인도하는 과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
「—너희 인간은 지금까지 원시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우리와 어울릴 수 있는 고차원적인 존재가 되는 길에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고차원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는 없는 법일지니, 시련을 통하여 <초월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주로부터 한 줄기 빛이 떨어지더니 이현욱에게 내리꽂혔다.
고—오—오—오——!
그 빛을 쐬는 순간, 이현욱은 자신을 찍어 누르던 절대자들의 격이 옅어지는 걸 느꼈다.
즉, 그의 격이 한층 더 성장한 것이었다.
- 축하합니다! 당신은 절대자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보상으로 ‘준 초월자’로써 신격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은 고든 프라이스가 예견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너에게는, 두 번째 시련이 있을 것이다.」
「너는 성장을 게을리하지 않고 격을 성장시켜야 할지니, 다른 ‘월드’를 공략하여 그 세계의 힘을 흡수해야만 한다.」
'......이것조차도 똑같다.’
이현욱은 고개를 치켜들어서, 절대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설마…… 나도 마왕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건가?”
「하하— 아니, 완전히 같지는 않을 거다.」
「넌 빌런들이 정복한 차원을 공략하게 될 거다.」
「그곳은 네 기준으로는 악에 물들었으니, 네가 추구하는 권선징악이라는 미개하고도 얄팍한 가치관에 어울리겠다만, 초월의 길을 걷다 보면 그 생각도 곧 달라질 것이다.」
그 말은, 또 다른 차원들이 무수히 많이 있고, 그곳에서도 시련 혹은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배려 차원인지 뭔지, 그중에서 이현욱과 반대 성향이 되는 세계를 정복하게 ‘매칭’해준다는 것 같은데…… 이현욱은 당연하게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빌런이 정복한 차원이라고 해도, 결국은 지구고 그들도 나와 같은 인류잖아?”
제아무리 악인이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지구는 지구고 인류는 인류다. 그 안에 사는 이들 모두가 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학살을 자행하여 멸망하게 만드는 건 그의 취향일 리가 없었다.
「너는 우리에게 선택받은 것이다.」
"큭!"
그 한 마디에 이현욱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격이, 한 층 더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너는 우리의 선택을 거부할 수 없다.」
이어서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격의 압력, 이현욱은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너는 우리의 뜻을 따르게 될 수밖에 없다.」
격이 또 한 단계 올라가자, 결국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컥—"
그리고 끝내 피를 토해내기까지 했다.
"컥— 컥—"
그는 바닥에 손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후......."
그는 내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좀 이상한데……."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렸다.
"나를…… 왜 회귀시킨 거냐?”
「뭐?」
「너는 선택 받았다.」
그 대답은 어딘가 두루뭉술했다.
"그러니까, 왜 선택했냐는 거냐고 묻는 거다. 이렇게 귀찮고 반항적인데 그것도 모르고 나를 고른 건가?”
「넌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거야 뭔, ARS도 아니고……."
그는 등 뒤에 띄워놓았던 모글레이를 잡아채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서 겨누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난 싫으니까,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러자 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이현욱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이런 성격일 거라는 걸 모르고, 나를 회귀해서 승리하게 한 거야? 응?”
「.......」
"......그렇다면 너희도, 절대적이지는 않군?”
그 순간 차가운 적막이 흘렀다.
「너는…… 우, 우리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어딘가 버벅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설마 당황한 거야?’
그건 절대자가 보일만 한 태도가 아니었으니…… 흔히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 것이다.
이현욱은 그 순간, 어떤 직감인지 몰라도 모글레이에 금속 통제력을 부여—절대자들의 형상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러나—
「그 힘도 애초에 우리가 준 것을 모르는 것이더냐?」
훙—
저 멀리 쏘아지던 모글레이가,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파지지지——!
이현욱은 몸에서 스파크 튀기 시작했다. 그건 배리어와 격이 증발하는 것…… 즉 소멸하는 과정이었다.
「쯧一 어리석은 것, 넌 불량품이므로 삭제다.」
‘그래, 그래도 이게 낫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정체도 모를, 신도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느니, 이렇게 죽는 게 낫다.’
이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최악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一
치이이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스파크가 홀연히 꺼져버렸다.
그리고
「응?」
「이, 이거 뭐야? 야! 이거 왜 이래?」
「그게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뭐? 이 순간에 무슨— 지금 당장 복구해!」
이건 방금까지 근엄함을 자아내던 절대자들의 음성이었는데…… 극히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대화였다.
결국, 저것들은 신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현욱은 이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다 연극이었던 건가?”
그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고, 손목 각인에서부터 회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갓 슬레이어였다.
그는 그것을 천장을 향해, 저 우주에 있는 절대자의 형상을 향해 겨누고 과감하게 당겼다.
콰—앙——!
격발— 그런데 그 탄환들은 멀리 가지 않았다.
쿠구구구——
직후, 천장에서 파편이 쏟아져 내리며 마나가 사방으로 분출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온 세상에서 스파크가 요란스레 튀더니, 사방을 에두르고 있던 우주 배경이 깜빡거리며 꺼지기 시작했다.
“..응?”
이곳은 어딘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주는 아닌 듯했고, 정황상 마법으로 만들어진 신기루 공간인 듯했다.
「이런 미친, 시스템이 꺼졌는데 저 새끼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아, 아무래도 메인 서버가 해킹된 듯합니다!」
그리고 그때—
- 그 시답잖은 곳에서 나오는 게 어때?
이현욱의 귓속으로 웬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이현욱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오—오—오——
그 부근에서 블랙 게이트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 자, 내가 진실을 알려줄 테니까, 다시 밖으로, 너희 세계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