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 결전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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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마왕성에 달린 거대한 눈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동공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서울 도심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언데드 군단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 나가며, 동시에 여러 개소의 쉘터를 공격 중이었다.
하지만 많은 부근의 언데드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이내 마왕의 시선은 이내 단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멈춰섰다.
「인페르노……」
그녀의 몸에서 번져 나오는 불길이 서울의 한쪽 면을 붉게 물들이며 언데드 군단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퍼—어—어—어——!
그녀가 거검을 단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때로는 수백 마리가 리타이어된다.
마왕성을 직접 움직여서 인페르노에게 광선 포격을 날릴 수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테지만 ‘영혼 수확’이라는,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마왕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마왕성의 모든 기능이 정지한다.
「……계획 수정이 필요하다.」
이런 소모전을 지속하는 건 절대로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곳 서울을 제대로 파괴해야지만, 놈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데 고작 이제야 1만 명…… 영혼 수확을 고작 1단계밖에 충족하지 못했다. 이 강력한 힘을 더 축적하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해.」
그의 눈에도 여전히 플레이어와 같은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고 있었다.
- 영혼 수확(1단계) 완수까지 134명 남았습니다.
영혼 수확 1단계의 완성은 1만 명을 죽여서 그 영혼을 마왕성으로 끌어오는 것…… 그리고 134명 남았으므로 현재까지 9,866명의 인간을 살해한 셈이었다.
그 숫자가 절대로 적지는 않았으나, 압도적인 숫자의 언데드 군단을 풀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수치였다.
이에 네크로맨서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한테 크로노스와 아틀라스 주세요.”
크로노스, 아틀라스.
그건 티탄 종족의 보스 몬스터들의 이름이었다. 그들도 마왕의 권속으로써, 현재 마왕성 내에 대기 중이었다.
각각 256레벨, 241레벨이므로 마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전력이었다.
그런데 네크로맨서가 달라고 한다는 건, 그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겠다는 게 아니었다.
오직 ‘시체’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음,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유황불 누더기 골렘을 만들게요. 엄청 크게요. 그 둘의 시체라면 인페르노의 불에도 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군.」
유황불 누더기 골렘.
그건, 네크로맨서가 인페르노를 꺾은 이후 그녀의 심장을 먹고, 또 ‘악마의 돌(인페르노)’까지 흡수하여 얻은 막강한 스킬이었다.
아주 많은 마나와, 보스 몬스터의 시체를 소모하여 만들어지는 시체 골렘.
그것은 웬만한 불에는 타지 않는 언데드 병기였다.
「그래, 그것이라면…… 저 사나운 불길을 꿰뚫고 인페르노를 처리할 수 있겠군. 좋아, 그것들을 가져다가 써라. 그 대신 최대한 빨리 인페르노를 죽이고, 계획대로 움직인다. 스틸레인이 오기 전에.」
"예! 실망하시지 않게, 열심히 해블게요!”
이제 막 소년티를 벗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천진난만해 보이는 네크로맨서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인페르노는 전진했다.
그녀의 이름은 한주화.
그녀는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태를 겪은 뒤, 잠적에 가까울 정도의 칩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진 그녀에 관해 의문을 표했고 온갖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다.
일반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남자가 싸우지 말라고 했다더라, 그래서 임신을 했다더라.
보통은 그런 가십거리였다.
세상에서 잊히고 싶은 건 아니었고, 세상을 외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 위태로운 세상에는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았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죽어 나가는 고난도 전장일지라도, 자신이 도착하기만 한다면 손쉽게 해결이 된다는 걸, 그래서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녀는 ‘가디언’이었다. 게임으로 변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지키고자 하는 비밀 결사대의 일원.
그래서 때로는 마음을 굳게 어떻게든 나서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떤 끔찍한 기억이 자꾸만 셈 솟아서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힘이 아주 약간 부족해서, 끝내 지키지 못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의 눈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예언자.
'……안도 스즈.’
한주화가 막 각성했을 무렵, 같은 길드에서 안도 스즈를 만났다.
당시에는 둘 다 S등급 플레이어로, 주목받는 신예였다. 자연스레 절친한 사이가 된 두 사람은, 이후 함께 가디언 퀘스트를 수행하며 세상을 좌우하는 영웅이 되기까지, 무려 11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예언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안도 스즈를 노리는 그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바로 ‘빌런’의 등장이었다.
가디언은 안도 스즈를 최우선으로 보호했다. 그리고 한주화는 안도 스즈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하는 만큼, 자신 만큼 완벽한 방패는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빌런의 그림자는 그녀의 강렬한 불빛에 속속히 밝혀지며,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던 세계 플레이어들의 연례행사 때였을 거다.
고든 프라이스라는 대부호이자, 가디언의 멤버가 주최한 행사.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보안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경비가 배치되었기에,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일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갑작스러운 폭발과 함께 암살자들이 등장해서 안도 스즈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으니…….
그 순간, 모두가 당황하며 제 몸 사리가 바쁜 순간, 한주화가 재빠르게 반응했다. 그녀가 불기둥을 일으켜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무기와 스킬들을 깡그리 밀어냈다.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빌런들의 수준이 올라간 것인지, 몇 개의 공격이 기어코 그녀의 불기둥을 꿰뚫고 들어와서…… 안도 스즈의 가슴팍에 박혔다.
정확히 심장에.
그렇게 예언자는 죽었다.
'......내 탓이야.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한주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만약 그곳이 부산이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한동안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 뒤로 그녀는, 부산 밖으로 나갈 생각만 하며 숨이 가빠지고 몸에 힘이 풀리는 등, 공황장애 증상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3위의 인페르노가 공황장애라니.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아니던가?
"빌런. 너희가 한 짓이라고……."
그녀를 이를 갈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저 멀리 마왕성이 보였다.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저기에 있다.
예언자를 죽이고, 세상을 잠식해나가는 존재.
빌런……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서울에 왔다.
그녀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준 건, 이현욱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수의 아이템과 함께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예언자를 죽인 빌런, 그들의 우두머리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곧 죄값을 치르게 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름은 바로 마왕이라고.
그녀는 지금, 저 마왕성을 격추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모자라지 않다.’
자신이 가진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 증거로, 마왕의 공세를 지금까지, 너무나 손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쿠—웅——!
마왕성으로부터, 무언가 거대한 게 떨어져 내렸다.
"......응?"
약 50m의 크기.
빌딩보다 거대한 체구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르르르——
언뜻 보면 티탄 같았으나, 기이하게 꼬여 있다고 해야 할까? 머리가 3개나 달려 있었고 팔은 6개나 됐다.
내장, 뼈, 살점 등이 이리저리 꼬여서 마치 갑옷처럼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인의 정강이뼈로 만들어진 둔기를 쥐고 있었다.
유황불 누더기 골렘. 다수의 시체를 마구잡이로 기워서 만든 최악의 언데드 병기였다.
또한…….
화르르르——!
그것의 몸뚱이에서 녹색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주화는 코웃음을 쳤다.
"불? 내 앞에서 불을 자랑해?”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이 한 자루의 레바테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검 끝에서 화염이 쏘아졌고, 회오리치면서 누더기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콰—과—과—과——!
50m가 넘는 거구일지라도, 그녀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음먹으면 빌딩조차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저런 생체 형태의 몬스터라면 더더욱이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다.
‘그저 덩치 큰 예비 잿더미일 뿐이지.’
단숨에 재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후우우우.......
그녀가 쏘아낸 불길이 멎었음에도........
그르르르…….
그것은, 아주 멀쩡했다.
잿더미가 되기는커녕, 피부가 녹지도 않았다.
그저 뒤로 수십 미터 밀려난 게 전부였다.
“……어?"
그녀는 당황했다.
“……안 통해?”
그럴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불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에도 수준 차이가 있다. 인페르노의 불은, 웬만한 불 속성 몬스터도 통째로 구워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저것은 달랐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불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불로는 놈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불이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뭘 해야 하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없었다.
그 순간,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육중한 몸집 탓에 동작은 꿈 떴지만, 단 한걸음에 한 블록을 건너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한주화는 다시금 놈을 향해 불기둥을 쏘았다.
그러나 놈은 4개의 팔을 앞으로 뻗고는, 불기둥의 압력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쿵…… 쿵……
그렇게 순식간에, 목전으로 다가왔다.
놈이 둔기를 휘두르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이에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부하들이 나섰다.
“인페르노를 지켜!”
“뭐든 쏴!"
그들은 인페르노의 앞을 가로막으며 유황불 누더기 골렘을 향해서 온갖 마법을 쏘아대며 견제했다.
그러나 그들의 임무는 애초에 전투가 아니라, 인페르노를 경호하는 것에 불과한바…….
"하나도 안 통합니다!”
저 정도로 압도적인 적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님,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텔레포트 마법 준비해!”
“안 돼! 여기서 비키면 쉘터가 무너져!”
그녀의 등 뒤에 수만 명의 민간인이 있다.
여기서 비키면, 그들이 싹 다 죽는다.
"그래도……."
그때— 유황불 누더기 골렘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펑! 펑! 펑! 펑!
폭발과 함께 썩은 살 조각들이 날아들었고, 그것들이 재차 폭발했다.
“—큭!”
그 폭발에, 한주화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휩쓸리며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그래도 한주화는 폭발과 화염에 내성이 있기에, 아무런 상처 없이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녀의 팀원들은 아니었다.
"큭......."
"으으으——!"
그들은 이곳저곳에 너부러져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몇몇은 의식을 잃은 듯했다.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한주화는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아…… 다시 이렇게……."
체력이 부족하거나, 데미지를 입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젠장! 힘이, 또 힘이 부족해.’
방금까지 들끓고 있던 분노와 호기가 식어버리고 그 자리를 무력과 공포가 채우는 건…… 무안하게도 한순간이었다.
"헉— 헉—”
공황장애.
억눌렀다고 생각한 트라우마가 물큰하게 올라왔다. 안도 스즈의 얼굴이 떠올랐고, 근처에 쓰러진 자신의 부하들에게서 그녀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같은 결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숨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뭐든 해야 해.”
힘이 부족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러나 힘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지, 힘이 부족해서 도망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일으켜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동료들은 더는 죽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호진, 내가 시간을 번다. 애들 데리고 빠져.”
"하,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는 온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쪽으로 다가오면, 너희도 타 죽는다.”
그녀의 확고한 의지였다.
"아……."
끄에에에——
어느새, 유황불 누더기 골렘의 주변으로 언데드 병력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유황불 누더기 골렘의 몸을 타고 오르더니, 녹아내리며 흡수되기 시작했다.
꾸륵— 꾸륵—
그것들의 살점과 뼈가 이리저리 뒤엉키더니…….
쿠드드드…….
유황불 누더기 골렘의 팔 6개 중에서 4개에 살점들이 옮겨가면서, 마치 채찍처럼 늘어났고, 그것들이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누님! 위험해요!”
이내 마구잡이로, 한주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쾅—! 쾅—! 쾅—! 쾅—!
그녀가 서 있던 장소가 난자되었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그녀였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공격은 먹히지 않고 방어는 현저하다.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말 것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네. 나는 중요한 순간에 계속 실패하네.”
그런데 그때—
- 인페르노, 완벽했습니다.
웬 목소리가, 확성 마법을 통해서 울려 펴졌다.
한주화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에, 한 남자가 고고하게 떠 있었다.
스틸레인.
마침내, 그가 도착한 것이었다.
- 당신이, 서울을 지킨 겁니다. 수백만 명을요.
“아……."
그리고 그의 몸 주변에는 수많은 금속 무기가 빽빽하게 떠올라 있었다.
스틸레인. 강철비라는 그 이름답게,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이 지상을 향해 날 끝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형태가 사뭇 달랐다.
그것들은 전부, 2m가 넘는 거검…… 모글레이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총 4자루라고 알려진 모글레이가…… 무려 수백 자루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 이제부터는, 제가 맡죠.
그가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끝에 담긴 무게감이, 평소보다 훨씬 육중하게 느껴졌다.
오늘 서울에 쏟아질 강철비는, 평소보다 거셀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