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208화 (208/221)

208화.  < 체크메이트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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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오크의 국왕.

월드 보스 몬스터 스토녹스.

중국이라는 대국을 통째로 뒤흔들어서 재기 불능 수준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존재의 이름.

비록 블랙 오크 군단의 한반도 침공이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 이후, 스토녹스는 왕국을 포기하고 사라졌으나…… 오히려 그게 더 큰 공포로 작용했다.

그런 거물급 보스 몬스터가,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방금도 그 악명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캠프로 진격하는 몬스터 군단이 발이 묶였음에도, 홀연 단신으로 치고 들어가서 활로를 만들었지 않았던가?

마치 옛 전설 속 장군이라도 된 듯한 위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토록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그으으으—」

마그마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검붉은 지면에 엎어진 채, 선지피를 울컥울컥 쏟고 있었다.

그것의 한쪽 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상태였으며, 다리 한쪽은 비틀려지고, 온몸에 온갖 검과 창들이 처박혀 있었다.

그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는 ‘글레이프니르’로 결박되어 있었다.

장렬하게 패배한 적장의 최후.

딱 그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앞으로 한 남자가 공중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스틸레인, 이현욱.

블랙 오크 군단을 한차례 격파했던 그가 기어코 블랙 오크 국왕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아주 쉽게.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검은 연기를 그냥 해제해 버렸잖아?”

스토녹스 특유의 검은 연기로 변하는 공격 방식.

그게 상당히 공략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건, 지난 몇 차례의 전투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류 공격도 흘려버렸으며 연기라는 특성상 바람 공격이 상성인 듯했으나, 그것마저도 막혔다.

그런데 이현욱의 공격은 이상하게도 아주 쉽게 놈을 제압해버렸다.

그럴 것이, 이현욱은 애초에 놈을 공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몬스터는 확실한 약점. 공략 방법이 있다. 그걸 알아내기까지 시행착오가 필요할 뿐이지.’

전생, 인류는 수차례 놈과 싸웠고, 같은 숫자로 패배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빅 데이터를 바탕으로 김세희를 비롯한 흑호 부대원들이 놈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었다.

이현욱도 그 작전을 여러모로 도왔고.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예요?”

이현욱의 옆으로 김세희가 착지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 스토녹스와 동귀어진하는 게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전혀 다른 전개를 흘러가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도달한 것이었다.

“근데, 방금 뭘 뿌린 거예요? 그게 먹혔던 것 같은데, 맞죠?”

방금, 이현욱이 검은 연기 속으로 무언가를 흩뿌렸다.

그 직후 공격을 퍼부었고, 스토녹스에게 유효한 데미지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 녀석이 검은 연기로 변하는 건, 검은 연기 그 자체가 되는 게 아닙니다. 검은 연기는 눈속임일 뿐이죠.”

일명 악마의 그림자.

그 검은 연기를 커튼처럼 치고, 그 안에서 ‘중첩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안을 넘나들면서 공격을 피한다.

애초에 다른 공간에 존재하니까, 공격을 맞출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중첩 공간을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욱이 뿌린 건, 얼마 전 중국에서 대량으로 얻었던 ‘마나역류석’이었다. 그걸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든 뒤 흩뿌리자 일대의 마나 흐름이 정지했다.

'그러면, 공간 중첩이라는 아공간 마법이 깨진다.’

즉, 스토녹스는 이현욱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온몸에 강철 무기가 처박히면서 행동이 느려지더니, 모글레이 한 방으로 팔이 잘려나간 것이었다.

“와…… 그래도 저 정도 보스 몬스터가 꽤 쉽게 잡혔네요. 흑마법사 계열이라 몸이 약한가 보네요.”

"그렇죠.”

그녀의 말처럼 스토녹스는 생각 이상으로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렇기에 호위 병력을 항시 대동했었던 것이었다. 이현욱이 서울에서 처리했던 전사장 수막트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싹 다 한반도 침공 당시에 죽었으니, 지금의 놈은 사실상 반쪽짜리인 셈으로, 공략 방법만 안다면 이렇게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현욱은 놈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이현욱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우두머리여, 곱게 죽여라.」

제왕이라는 설정답게 끝까지 고고한 말투였다.

이현욱도 큰 고민 없이 모글레이를 들어올렸다. 놈은 이제 최종 보스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였다. 구태여 쓸데없는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퍽—

단 일격에 그것의 머리가 비탈길을 따라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이로써, 가장 많은 인류를 죽인 몬스터 중 한 종족이 멸망했군요.”

등 뒤에서 브라이언 틸이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몬스터를 연구해온 분석가 플레이어로써, 역사적인 장면을 마주한 양 감탄했다.

"앞으로 5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그의 판단은 역시나 꽤 정확한 편이었다. 실제로 이현욱이라는 변수가 없었더라면 5년 뒤쯤에 공략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다 정리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쾅— 쾅— 쾅— 쾅—

가장 까다로운 적수인 스토녹스는 처리했으나, 아직 수천 마리의 몬스터 군단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이현욱은 고개를 돌려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기세는 이미, 완벽하게 넘어왔다.

하늘 위, 기계 드래곤과 수십 대의 비공정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콰—과—과—과——!

특히, 아직 정비를 받지 못한 기계 드래곤이었지만, 그런데도 압도적인 화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한번 선회하여 화력을 방출할 때마다 수십 마리의 티탄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의 폭격을 뒤집어쓰고 정신을 못 차리는 적진을 향해서, 다양한 병력이 전진했다.

「가즈아——!」

가장 먼저, 라퓨타에서 뛰어내린 탈로스와 거신병들이 마치 공수부대처럼, 적진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쿵— 쿵— 쿵— 쿵—

각기 수백 톤, 혹은 천 톤까지 나가는 그 거구들이 지면을 내딛는 순간, 얇게 굳어 있던 마그마가 으스러지며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랐으나 그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늪지를 헤치고 나가듯이 움직이며 대열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검이나 창 같은 게 아니라 기관총…… 그것도 흔히 ‘미니건’으로 대표되는 다총열기관총처럼 생겼다.

이내, 총열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고…….

투—두—두—두——!

불을 뿜었다.

분당 수천 발을 뿜어대며 사정거리 안의 모든 곳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티탄 브레이커 발사 준비!」

탈로스의 명령에, 후방에 대기 중이던 유독 큰 거신병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것들의 등에 탑재된 사각형의 장치가 철컥— 소리를 내며 개폐되었다. 그건 로켓 런처로 보였다.

「발사! 박살 내 버려! 으하하! 혼돈! 파괴! 망각!」

푸—수—수—수——!

그곳에서 뿜어져 나가는 다발의 회색 연기. 그것들은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티탄들을 추적해서, 요격했다.

쾅—! 쾅—! 쾅—! 쾅—!

수십 마리의 티탄들이 단숨에 무너졌다.

그 모습을 실로, SF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전투 로봇, 그 자체나 다름 없었으니, 장르가 바뀐 기분이었다.

"와…… 이제 완전히 딴 세상 같잖아.”

"그냥 현대전의 방식…… 아니, 미래전인데.”

그동안 냉병기를 바탕으로 마법을 쥐어 짜내서 싸워왔던 플레이어들은, 절정에 달한 마법공학의 화력 앞에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아가이디카와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은 기병대처럼 전진하며 티탄들 사이로 파고들어 가며, 블랙 오크와 아이스 트롤 무리를 짓밟아 버렸다.

그 모습만 보면 분명 기마대 같았는데, 이내 엄청난 탄력으로 바닥을 박차서 날아오르더니 티탄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시작할 때부터는, 늑대 무리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플레이어는 대다수가 저것들이 왜 아군이 되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적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라퓨타와 함께 등장한 비공정 함대에는 2차 지원군이 타 있었고, 그들 역시 전투에 돌입했다.

"—우리도 가자!”

"몬스터랑 로봇한테 밀릴 수는 없지!”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수준 높은 플레이어들의 공격도 아주 유효하게 먹혀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하는 정통적인 레이드 방식으로 전진해서, 티탄을 하나씩 하나씩 사냥했다. 그건 화력 면에서는 부족할지언정,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내.......

"놈들이 도망친다!”

결국, 몬스터 군단은 도주를 선택했다.

“계속 따라가! 싹 다 죽여!”

놈들은 피난하는 쥐 떼처럼 한 방향으로 우르르 내달렸다.

목표물은 자신들이 기어나왔던 구덩이였다.

"젠장! 지하로 도망친다!”

"그 안에 최대한 많이 잡아야 해”

하지만…….

콰드드드——

그 부근에서부터, 웬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몇 분 만에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규모로 급속 생장했다.

그린 웨이브.

그 이름답게, 녹색의 파도처럼 일어나서, 도망치는 몬스터들을 향해 몰아쳤다.

다크 엘프의 제2왕자 클라이페우스 그리세오가 이끄는 다크 엘프 군단이 후방에 매복하고 있다가 덮친 것이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싹 다 포박하라!”

그것들이 얼마 남지 않은 몬스터들을 옭아매고, 넝쿨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즙 짜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끝났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이겼다!”

플레이어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몬스터 연합군이 상대로 아군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완벽한 승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완벽했다.’

이현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막기 위해서, 놈은 너무나 많은 걸 사용했다.’

그리고 이현욱이 준비한 모든 전력은 이제야 도착했다.

즉,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할 시점이 온 것이었다.

'......이제는 확신한다. 내가, 놈보다 강하다.’

그래서 놈은 이현욱에게 직접 맞서기보다 ‘마왕성’이라는 특전을 어떻게든 완성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리다.

그때, 비공정 ‘테세우스의 배’가 이현욱을 향해 다가왔다. 그 안에서 내린 건 당연하게도 도널드 해리스였다.

"해리스 씨, 제가 부탁한 건 준비됐습니까?”

이현욱은 그에게 아주 오래전에 부탁해 놓은 게 있었다.

이에 그는 하늘에 뜬 채 백색 빛을 발하고 있는 공중 도시, 라퓨타를 가리켰다.

"그래, 미스틸테인. 그 끔찍한 물건은 라퓨타 안에 잘 모셔뒀다.”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 미스틸테인.

그 신화 등급의 무기 위그드라실의 양분을 머금고, 마침내 무기로 피어났다.

"내가 보기에 그건 정말 미친 물건이야. 그러니까…… 특별하게 조심히 다뤄야 할 걸세. 내가 쥔 칼끝이 내 살을 파고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성윤, 강서윤, 한태산, 김강석 등 2차로 지원온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서는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 무리가, 오른쪽에서는 다크 엘프 무리가 멀찍이 떨어진 채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접근이 신경 쓰이는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플레이어와 몬스터라는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함께 싸웠음에도 쉽게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목표는 같았다.

마왕.

그놈을 죽이는 것.

"시간이 많이 없는 거로 아는데, 곧장 역공을 시작해야겠죠?”

이성윤이 말했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개미굴에서 여왕을 끌어낼 시간입니다.”

“개미굴이라…… 내부가 꽤 복잡하겠군요.”

이에 몇몇 플레이어들은 앓는 소리를 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미지의 세계—던전을 공략하는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어두운 지하를 공략하는 건 가장 꺼려지는 일이었다.

좁고 어둡고 함정이 잔뜩 있는 곳.

그런 장소는 가장 까다로운 전장이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곳이기도 했고.

이에, 이현욱이 고개를 저었다.

“개미굴로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두 줄기의 빛이 내리꽂혔다.

쾅——! 쾅——!

그 충격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저 멀리서, 진폭이 다가왔고 그와 함께 희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워—”

“까, 깜짝이야.”

"모글레이입니까?”

이현욱은 고개를 내저었다.

"비슷한 무게로, 워박스에 몇 개를 더 탑재해뒀습니다.”

"아…… 그런데 어디를 공격하신 겁니까?”

그곳은, 이현욱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모글레이로 두들겼던 지점이었다. 그렇기에 한 차례 제대로 으스러진 직후, 지각 변동이 일어나며 지반이 더욱이 약해진 상태였을 터—

이현욱은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다가갔고, 산 중턱에서 거대한 싱크홀…… 아니, 사실상 분지 규모의 구덩이를 마주했다.

콰드드드——

그때, 그 구덩이를 가득 메운 바위 더미들을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마루가 힘을 쓴 것이었다. 이어서 이성윤이 ‘중력 역전’을 통해서 바위 더미들을 통째로 들어냈다.

그러자.......

"어? 기둥이 보여요!”

"저건 무슨 유적지 같은데요.”

구덩이 안에는 빌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건축물들이, 벽을 따라서 우후죽순 늘어서 있었다.

"......유적지가 아니라 우리의 도시다.”

그렇게 말한 건, 아가이디카였다.

그는 자신들의 터전이 이렇게 파괴된다는 게 영 씁쓸한 모양인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가이디카, 마왕성이 건설되는 곳이 어디쯤이지?”

이현욱의 물음에 그는 눈을 잠깐 감았다.

이 땅의 수호자인 만큼, 땅 자체와 교감하는 걸까?

이내 눈을 뜨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오른쪽 부근이다. 그리고 3개의 도시를 통과해야 한다.”

“3개의 도시? 그게 뭐지?”

"우리의 도시는 여러 층으로 지어졌다.”

“그러니까 3층이라는 소리고. 깊이는?”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 종족의 도량형은 미터법이 아닌지라서, 몇 번의 설명을 듣고 대략 추정한 결과......."

"약 4km 정도 깊이라는 소린데……”

그 말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혀를 내둘렀다.

“4km라니…… 생각보다 훨씬 깊은데요.”

"아니, 무슨 놈의 도시가 그렇게 커?”

그러자 아가이디카가 언짢은 기색으로 설명했다.

"그곳은, 땅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신전이었다. 이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신성한 힘이 깃든 곳이다. 그런데…… 놈이 장악한 뒤 사악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래서, 마왕성 완성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있지?”

이현욱이 구덩이 아래를 굽어보며 물었다.

“……나도 정확히 들은 건 아니지만, 오늘 중으로 끝난다고, 언뜻 들었다.”

단 하루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작 몇 시간일 수도.

‘어떻게 뚫어야, 최대한 빨리 내려갈 수 있을까?’

그 고민은 사실 무의미했다.

전에 했던 것처럼 모글레이를 다시 저궤도까지 끌어 올리고, 내리박는 방식이 물리적으로는 최고였다.

그러나 무려 4km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하다 보면 결국은 뚫리겠지만…….

"제 생각에는, 모글레이 투하로 뚫기에는, 저쪽에서도 대응할 겁니다. 시간이 없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건 이성윤이었다.

그의 말처럼 모글레이 낙하든, 다른 공격이든, 물리적으로 돌파하는 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왕 측에서도 마법 방어막을 계속 두르면서 버틸 것이었다.

"직접 진입하는 게 답일 수도 있습니다. 괜히 무너뜨리지 않고요. 함부로 헤집었다가는, 우리가 들어갈 길목도 막힐 수 있죠.”

이성윤의 주장이 옳았다.

그 방법이 현재로서는 정답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낭비다. 그리고 가장 위험하다.’

이현욱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고 고민했고,

이내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급히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칙—

"이 팀장님, 접니다.”

- 예, 말씀하십시오.

이교준 팀장이었다.

"강희설 좀 연결해주세요.”

잠시 후…….

- 네! 부르셨나요?

강희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수많은 마법공학 무기들이 대활약하자 한껏 들떠 있는 듯했다.

"무기 하나를 개조해줘야겠어.”

- 어, 개조요? 뭔데요?

"수다르사나.”

- 어…… 그거 이미 완성된 거 아니었어요? 아직 한 번도 안 썼는데 개조를 해요?

이현욱은 일전에 그레이 마운틴 드워프들에게 수다르사나를 거대 병기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현재 캐논 형태의 무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현욱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수다르사나는 사용 시 엄청난 속도로 회전해. 그걸 일종의 모터처럼 개조해줘. 최대한 빨리.”

***

"헉— 헉—"

레이첼 하디는 거친 숨을 내쉬며 은신 마법을 해제했다.

그녀는 은신 마법을 쓸 수 없었지만, 그녀가 차고 있는 팔찌 아이템이 그러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간, 레드 플레이어라는 수배자 신분으로 살아왔기에 도주에 필요한 아이템을 잔뜩 구비한 그녀였다.

그렇기에 방금, 난장판 속에서도 이렇게 도망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으로, 거구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역시나 은신 상태를 해제한 것이었다.

"젠장! 저 새끼는 도대체 숨겨둔 무기가 몇 개인 거야!”

거구의 남자, 안톤 블라코비치가 등장과 함께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쉿! 입 다물어! 스틸레인의 두 까마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모르는 거야?”

“아, 그렇지. 미안.”

그들은 한 산의 돌무더기 뒤에 숨은 채, 전장을 살폈다.

이미,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도 일부 후퇴한 게 아니라…… 전멸이었다.

"개털됐군.”

"좆 됐군.”

두 사람은 동시에 중얼거렸다.

이어서 하늘에서 무언가 낙하하더니,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스틸레인과 플레이어들은 그곳으로 가더니, 흙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젠장…… 지하로 가는 길을 뚫을 셈이야. 저 아래에 마왕성이 있다는 걸 아는 거고.”

레이첼 하디가 말했다.

"저 드레이크 새끼가 일러바쳤군! 젠장, 레이첼, 마왕성 완공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었지?”

"아까 고든이 7시간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한 6시간 남았겠지.”

"음……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레이첼 하디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톤, 너는 제발 너무 낙천적으로 말하지 마. 아까도 오크 노인네가 나타나서 다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말했잖아. 그런데 씨발, 지금 이 상황이 뭐야?”

그러나 안톤 블라코비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잘 생각해봐. 스틸레인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파괴력은 그 큰 검을 떨어뜨리는 거잖아?”

“……그렇지.”

"그걸로 마왕성이 있는, 그 엄청 깊은 동굴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겠어? 흔들어서 땅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 쯤이야 뭐, 마법 방어막을 좀 두껍게 깔면 되잖아?”

"......."

"그렇게 6시간 버티는 게 어렵지 않을 테고, 마왕성이 완공되면 힘을 얻은 마왕 폐하가 반격에 나설 거야. 아직 희망이 있다고. 충분히."

그럴듯한 말이었기에, 레이첼 하디는 반문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되길 빌어.”

"그렇게 될 거야. 스틸레인이 모글레이 아빠나 모글레이 할아버지를 데려오더라도, 그곳까지 6시간 안에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야. 마왕 폐하도 다 계산하시고 그곳을 낙점하신 걸 테니까.”

"알았으니까, 설레발 치지 마. 이제는 솔직히 네가 그러면 뭔가 불안하다고.”

그런데 그때…….

“응? 저기 무슨 이상한 짓을 벌이려는 것 같은데?”

레이첼 하디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모글레이 4개를 전부 꺼냈어. 뭐지?”

그 무식한 거검은 그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적들의 등골을 시리게 했다. 그런데 무려 4개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스틸레인은 모글레이 4자루를 동시에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는 양손에서 금속을 생성하여, 케이블처럼 만들더니…….

"……엮는데?”

4자루의 거검을 한 데 엮기 시작했다.

그것도 4개의 검 끝을 하나의 점으로 하는, 기이한 모양새였다.

“……뭘 하려는 거야?”

"글쎄, 그런데 또 뭘 꺼냈어.”

그러는 사이, 스틸레인이 또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음…… 금색 파이프 같아.”

“……파이프라니, 아이템인가?”

그런데, 그 아이템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후—웅——!

일순간, 엄청난 크기로 불어나며 돌풍을 일으켰다.

“헉!”

그 크기나 두께가 얼마나 커졌는지, 눈앞에 빌딩 한 채가 치솟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족히 100m는 넘으리라.

그제야 두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 여의봉이잖아!”

“그런데 저렇게 커질 수 있다고?”

마나 주입에 따라서 크기가 커지는 아이템인 여의봉.

저 정도 크기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마나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 저걸로 뭘 하려는 거야?”

여전히 알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스틸레인은 그 여의봉의 끝에 한 대 엮은 모글레이를 부착했다. 그는 금속을 융해하는 능력까지 있었기에 용접한 것처럼 단단하게 붙일 수 있었다.

"긴 창을 만드는 건가?”

“……저런다고 더 강력해질 것 같진 않은데.”

저걸로 바닥을 두드려대봤자 무려 4km의 지반을 뚫어대는 건 어려울 것이었다.

그때, 비공정 한 대가 그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여의봉의 가장 위쪽, 끄트머리 부근으로 가더니, 램프도어를 열고 웬 원형의 기계 장치를 꺼내어서 그 위에 얹었다.

텅—

이어서 스틸레인이 나서서, 그 원형의 장치를 여의봉 끝에 부착시켰다.

철컥—

그로써, 여의봉의 하단부에는 모글레이 4자루가, 상단부에는 알 수 없는 원형의 기계 장치가 달린 기이한 물건이 완성됐다.

"......씨발,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레이첼 하디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틸레인이, 전설 등급의 무기를 조합하고 있었으니……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었다.

그때, 스틸레인은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서, 그 물체를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쿵.......

그리고 잠시 후—

윙—윙—윙—윙——!

그러한 소리와 함께, 여의봉 상단부의 원형 기계 장치가 요동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붉은빛과 함께 짙은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어, 엄청난 에너지다!”

그토록 강력한 힘이, 거대한 여의봉을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켰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러자 그 끝에 달린 4개의 모글레이가, 그 모든 힘을, 회전력과 중력을 받아서 지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

"아……."

그제야, 스틸레인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미친…… 저건 드릴이다.”

수다르사나를 모터로.

여의봉을 축으로.

모글레이를 드릴로.

순식간에, 수직 통로가 개통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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