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마왕성 공략전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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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엑스 마키나라니, 그게 뭐야?”
그렇게 물은 건 서은하였다. 그녀의 질문은 모두가 궁금할 만한 부분이었기에, 모든 시선이 이현욱에게 을렸다.
이현욱은 바로 옆에 착륙해 있는 기계 드래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도 저 기계 드래곤처럼 라퓨타의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는 무기입니다. 서 대위님도 라퓨타를 오고 가면서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서은하도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라퓨타에서 생활했지만, 대장장이들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면밀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간 오로지 ‘초현실 훈련’에 열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무기길래, 티탄이나 블랙 오크들을 죽일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에드워즈 우즈가 물었다.
“제가 전해 듣기로는 캠프 쪽에 나타난 놈들의 숫자가 수천 마리에 이른다고 한 것 같은데…… 정말로 그걸 막을 수 있는 겁니까?”
그는 융기한 산맥 너머, 캠프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이 걱정되는 기색이었다.
지금 당장 도와주지 않으면 고작 몇 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에드워드 우즈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판단이었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죽여서 막는 게 아니라, 시간을 지연시키기에 알맞은 성능일 겁니다.”
“예?”
“……다수의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데 가장 알맞은 속성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에 대답한 건 브라이언 틸이었다.
“빅 데이터상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분석 계열 플레이어답게, 확실한 데이트를 바탕으로 정답을 제시했다.
“……바람, 빙결, 전기까지 이 세 가지가 마나 소모량 대비로 공격 범위는 그 무엇보다 넓지만 데미지는 가장 낮았거든요. 아, 물론 각각의 능력도 수준이 오르면 살상력이 극대화되지만요.”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캠프에 그중 두 가지 능력이 극에 달한 플레이어가 있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마법공학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현욱은 AD-2 한 대를 허공으로 천천히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더 설명하자면, 제 금속 통제 능력을 이 금속 상자들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현욱의 금속 조종 능력이, 극강의 화력으로 치환될 수 있던 건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공중투하장치’ 시리즈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항상 함께 다니던, 그 두 분 말씀인가요?”
그건 김세희와 박준모를 뜻했다.
각각 바람의 정령술사와 전류 통제능력자였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전류 쪽은, 다들 아시다시피 흔히 말하는 S등급 플레이어입니다. 제가 핸들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그 녀석이기도 하고요."
이현욱은 박준모의 잠재력은 크게 평가했다.
그 녀석의 능력인 전류는 '무형’이고 ‘광속’이며 ‘투사’된다. 그리고 ‘감전’이라는 범위 데미지까지…… 그렇기에 적으로써는, 그 공격을 막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만큼, 밸런스 때문인지 성장 방법도 상당히 어려운 편이었다.
‘그 녀석의 성장 방법은, 자연의 벼락을 맞는 거다.’
그래서 기상악화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온갖 방법으로 번개를 유도했고 박준모는 그간 수천 번에 이르는 벼락을 맞았다.
또한 근 몇 주간 박준모가 이현욱과 함께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도 역시 최후의 전쟁을 대비하며 쉬지 않고 벼락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박준모는 몇 배나 성장했다.
이 일대를, 전류로 가득 채울 만큼이나…….
"그러니까, 그 녀석이 시간을 벌어줄 겁니다.”
이현욱은 고개를 들어 올려서, 캠프와 이곳을 반으로 나누어버린 화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으로는 산 너머가 보이지 않았으나, 후긴과 무닌의 초월적인 감각을 통하여 반대쪽에서 울리는 어떤 ‘진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두—두—두—두——
마치 물소 떼가 내달리듯이, 무언가가 바닥을 요란하게 두드려내는 소리였다. 그게 캠프를 향해서 나아가는 적들의 발소리라는 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30분,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는 끔찍한 전조를 느끼면서도 한층 강화된 박준모, 그리고 김세희를 믿었다.
이 상황을 완전히 예측한 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서 그들을 캠프에 남겨두고 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른다.’
사실, 지금 이 상황조차도 이현욱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으니…… 이런 변수가 또 한 번 일어난다면, 그가 대응할 방법은 현재로서 모호할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박준모와 김세희를 믿는 한편 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이곳 ‘캠프’는 마왕성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써, 현재 2,344명의 플레이어가 선발대로 도착해 있었다.
그들 중 5분의 1 정도가 전투 병력이었고 나머지는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었다.
이를테면 대장장이, 분석가, 프리스트 등…….
즉, 현재 캠프의 전투력은 현저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약 2~3km가량 떨어진 부근이었기에, 캠프의 플레이어들은 직접 공격받을 일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만에 하나 우회 공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스틸레인 쪽에서 곧장 구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캠프는 지금, 최소한의 경계만 유지한 채 앞으로 이어질 전투 지원을 위한 각종 선행 작업을 처리 중이었다.
하지만.......
쿠一구一구一구——!
온 세상이, 한순간에 뒤틀려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딛고 서 있던 땅이 갈라지며 마그마가 치솟았고, 평야가 융기하며 산이 솟아났다.
천지개벽(天地開關).
그렇게 부를만한 급격한 지형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큭一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스틸레인 쪽은 어떻게 됐지?”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캠프의 플레이어들이 처음으로 떠올린 건 어쩔 수 없이 스틸레인 일행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자신들의 생존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융기한 산맥에 가려져서 스틸레인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들은 일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이 미친 땅, 그것도 적진 한복판에서, 스틸레인의 직접적인 보호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쿠—구—구—구........
온 세상이 희뿌연 연기로 뒤덮였고, 마그마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으며, 폭발과 함께 치솟은 암석 조각들이 캠프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은 살아남을 궁리부터 해야만 했다.
"젠장一 어서 움직여!”
"넋 놓지 말고, 대응해!”
그 광경은 어쩌면 폼페이 주민들이 목격했을 최후의 장면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즉, 이 작은 캠프 정도쯤이야 바람 앞에 등불처럼 한순간에 삭제해버릴 만한, 대재앙이었다.
그때--—
한 끗 차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광역 마법 방어막이 전개되면서 캠프 위를 돔처럼 뒤덮었다.
웅——
그 위로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쿵一 쿵一 쿵一 쿵一!
"와, 씨— 갑자기 뭐야!”
일명 ‘캠프 가드’라는, 캠프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재빠르게 광역 마법 방어막을 시전한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인근에서 언데드 군단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전원이 긴장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캠프가 초토화될 뻔했다.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좀 좆된 느낌이야.”
그때, 캠프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전 병력 전투 준비—! 전 병력 전투 준비—!
이 목소리는 이교준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캠프 운영의 총괄을 맡은 우성문 실장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급하게, 전투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 뜻은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게 아니던가?
그러나 이들에게 ‘전투’는 예정된 작전이 아니었다.
이에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서 캠프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 뭐? 저, 전투라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그러나 온통 화산재로 뒤덮여 있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으니, 무엇이 다가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눈으로는 볼 수 없을지언정 점점 커지는 굉음…….
두—두—두—두——
그 짙은 울림에, 플레이어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건 누가 들어도 그건 발걸음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큰 존재가, 아주 많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사방을 커튼처럼 에두른 화산재 위로 그림자가 하나둘씩 떠올랐고, 그것들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큰 방패를 들고, 키보다 더 큰 창을 든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지자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헉......."
그들 중 한 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티, 티탄이다.”
그렇다. 그것들은 식인 거인 ‘티탄 호플리테스’로 보였다. 일전에 <티타노마키아> 때 상대했던 존재들…… 그런데 최후의 공성전을 앞두고 마왕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것들이 다시 한번, 인간들의 앞에 나타났다.
하필이면 지금, 이들의 앞에 말이다.
"우, 우리끼리 저것들을 막을 수 있을까?”
"……글쎄요, 스틸레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아아아——
그 거인들의 발아래로 새카맣게 움직이는 작은 무언가…… 아니,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지 인간보다 훨씬 큰 거구의 존재는 다름 아닌 블랙 오크 군단이었다.
또한, 그 사이사이에는 5~6m 크기의 아이스 트롤까지 섞여 있었다.
말 그대로, 몬스터 군단이, 화산재에 뒤엉킨 채 몰아치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고 억지로 호기를 품더라도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에 맞설 수준이 아니었다.
이들은 애초에 경비병력일 뿐이지 않던가?
"저, 저건 못 막아요!”
그 진실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토해낸 건 ‘캠프 가드’의 수장인 안토니나 그라소였다.
그녀는 이탈리아 플레이어 랭킹 4위로, 무려 80레벨이었다.
즉, 이중에서는 사실상 최강자인 셈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백 마리의 티탄 호플리테스 중 단 한 마리조차 쉬이 쓰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저토록 많은 숫자와 난투를 벌여야 한다니…… 미친 짓이었다. 자살행위였다.
"티, 팀장님, 그러면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그녀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몸을 아군 쪽으로 돌려서 명령을 내렸다.
“—모두 잘 들어요! 지금 당장 모든 마나를, 마법 방어막에 쏟아부어서 최대치로 만든 뒤에, 마나 물약을 복용하고는 장거리 포탈을 열 준비를 하세요.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해요!”
결국 답은 전력을 다하는 후퇴뿐.
그런데…….
치—지—지—지——
웬 짙은 마찰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법 방어막의 상단부가 죽 찢어지더니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일한 생명줄이 끊어지고 있었다.
“……배리어 붕괴 마법이잖아?”
그건 마법 방어막이나 배리어를 무효화시키는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미친, 이런 쓰레기 같은 마법을……."
그건 그녀도 들어봤을 뿐이지, 실제로 목격하는 건 처음 보았다.
왜냐하면, 그건 정상적인 범주의 스킬이 아니라 ‘인신 공양’을 바탕으로 하는 흑마법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오— 내 마법이 얼마나 비싼 건지 알아 봐주다니 감격스러운데.”
머리 위, 웬 목소리가 확성 마법을 통해서 울렸다.
고개를 들자 하늘을 뒤덮은 화산재가 서서히 옅어지는 중이었고, 그곳에 떠 있는 한 마리의 좀비 히포크리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타 있는 여자가 보였다.
많은 이들이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챘다.
"저, 저 인간은 레이첼 하디……."
"맨체스터의 마녀잖아!”
저 여자의 악명은 너무 유명해서 모두가 그 이름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레이첼 하디는 영국에서 다년간 수차례 벌어졌던 연쇄 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진, 악랄한 레드 플레이어였다.
일명 맨체스터의 마녀.......
그녀에게 당한 희생자들은 전부 흑마법의 재료로 희생양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여자가, 마왕의 가신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혹시 너희도 내 마법의 일부가 되어 볼 생각이 있어? 이걸 준비하려고 한 스무 명 정도의 영혼을 뽑아서 배합했는데, 거기 너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다섯 정로도 충분하겠다 싶은데.”
레이첼 하디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좀비 히포그리포의 머리에 손을 얹자, 그 괴물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지팡이에는 ‘페어리’ 한 마리가 장식품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미라의 눈코입에서 붉은빛이 번져 나왔고, 되살 나듯이 입을 쩍 벌리더니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끼에에에—
그러자 검은 구체가 쏘아져서 녹아내리고 있는 마법 방어막을 때렸고, 더욱 빨리 소멸하기 시작했다.
"흐흐— 결국 내 선택이 옳았어! 나는 이 개 같은 세상에서 평생 도망쳐다녔지만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했거든! 이제 도망쳐다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다!”
레이첼 하디가 한껏 흥분한 채 소리쳤다.
그녀는 1세대 흑마법사 중 한 명으로, 세계의 어둠 계열 탄압을 견디고 그림자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 남아왔다.
그러다가 마왕이라는 호재를 얻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결국, 마법 방어막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고.
"자! 가서 싹 죽이자고!”
레이첼 하디의 외침에 몬스터 군단이 전진했다.
그녀는 마왕의 가신으로서 티탄 55마리와 블랙 오크 644마리를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상태였다.
쿠—구—구—구—구—
먼 거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물소…… 아니, 코끼리 무리에게 짓밟히기 직전인, 몽구스 무리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만큼 위태로운 순간이었으나, 플레이어들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어……."
지금 당장 등 돌려 도망친다고 한들,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마치 달려드는 트럭 앞에서 몸이 굳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 칙— 전 병력, 돌풍에 대비하세요.
캠프 가드 안토니나 그라소의 마나 메신저, 그리고 몇몇 간부 플레이어의 마나 메신저로 그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 칙— 다시 한번 말합니다. 모두. 엎드리세요. 당장!
웬 여자가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안토니나 그라소가 본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이내 전부가 바닥으로 넙죽 엎드렸다.
웅—
그 순간, 일대의 기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산의 융기와 화산 폭발로 인해서 뒤죽박죽 꼬여 있던 바람의 방향이 오직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진을 향해.
몬스터들을 향해.
바람들이 장마철에 불어난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쿠—화—아—아—아——!
폭풍.
그렇게 불릴 만큼 강력한 바람이 후방 상단에서부터 불어 닥치며 일대를 뿌옇게 물들이고 있던 화산재를 깡그리 밀어내 버렸다.
화산 폭발로 날아온 바위가 다시 떠올랐고.
갈라졌던 지면이 통째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이쪽으로 흐르던 마그마가 역행했다.
"큭! 이건 뭐야!”
좀비 히포그리포에 탄 채 하늘에 떠 있던 레이첼 하디 역시 그 돌풍에 휩쓸려서 수백 미터 밖으로 날아가서 바닥에 내리박히고 말았다.
퍽——
그곳은 마그마가 흐르고 있었지만, 추락 직전에 몸에 마법 방어막을 둘렀기에 화상을 입거나 불타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그마 밖으로 기어 나오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썅— 이게 뭐야! 웬 돌풍이야! 허리케인, 코도 코시로는 여기에 없을 텐데 어째서……."
심지어 15m가 넘으며 체중만 해도 수백 톤에 이르는 티탄 호플리테스들까지 전진을 멈추고,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마치 태풍을 뚫고 가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는 있었으니 그걸 전진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작은 블랙 오크들은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고, 어떤 것들은 심지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몬스터 군단의 진군이 한순간에 정지됐다.
그만큼 압도적인 풍압이었다.
그 정체는…….
기—이—이—이——
바람 소리에 묻혔지만, 분명히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기계음…… 레이첼 하디는 고개를 들어서 그 소리를 추적했다.
그리고 캠프 곳곳에서 초대형 비공정들이 상승하고 있다는 걸 포착했다.
"응? 마나역류탄을 맞고 맞이 갔을 텐데......."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 고든 프라이스가 ‘마나역류탄’을 쏘아서 마법공학 장비들을 마비시켜두었다.
그런데 벌써 복구된 건지 제 기능을 시작한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비공정의 하단부에 원형 장치가 달려 있었다.
마치 발전소에 있는 터빈처럼 생긴 물체였다. 혹은 전투기의 제트 엔진을 닮기도 했다.
그것이 고속회전했고, 그 위로 피어난 거대한 청색 마법진들이 피어나더니 일대의 공기를 깡그리 다 한쪽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쿠—화—아—아—아——!
그렇게 폭풍 같은 바람을 쏘아냈기에, 비공정들이 반작용으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역방향으로 엄청난 출력을 가진 추진기를 분사하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완전히 날아가지 않고 일정 높이에서 고정되었는데, 그건 ‘세계수의 넝쿨’로 만든 로프로 지상에 단단하게 매어두었기 때문이었다.
"큭!"
"수, 숨이......."
그리고 모든 공기가 한쪽으로 휘몰아치는 터에, 산소가 남아나지 않아서 플레이어들은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공격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 이번에도 비밀 병기가 제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자, 어떠냐! 엔릴의 광분의 맛이!”
그렇게 외치는 건,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강희설이었다.
저 폭풍 발생 장치들, 그러니까 ‘엔릴의 광분’ 역시 그녀가 설계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영웅 등급의 ‘실프의 오브’를 십여 개나 부여한 오브젝트로써, 오로지 강력한 바람을 자아내는데 특화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넓은 전장을, 폭풍으로 뒤덮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게 한 것이었다.
쿵— 쿵—
하지만, 티탄 호플리테스들은 압도적인 체중을 바탕으로 태풍을 꾸역꾸역 뚫고 들어오고 있었고 어느덧 캠프 지척에 도달했다.
그때—
촥— 촥—
그놈들의 아킬레스건과 무릎 뒤쪽에서 피가 터졌다. 무언가가 그곳을 깊게 베고 지나가면서, 힘줄이 끊어진 것이었다.
「크어어어—」
그리고 제아무리 거인일지라도 다리의 힘줄이 끊어진 상태로는 폭풍을 뚫고 걸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전진을 멈췄고, 결국 맥없이 무너졌다.
촥— 촥—
어느덧 6마리째.
순식간에 티탄 호플리테스들이 무력화되었다.
그것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칼날의 정체는 단 한 명의 여자였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어느덧 세계 최고의 바람의 정령술사가 된 김세희였다.
훙—
"하늬— 오른쪽 놈을 노리자!”
그녀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폭풍 속에서 하늬가 열어주는 바람길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비행했다.
마치 제트 슈트를 입고 협곡을 활강하듯이.
또한, 그녀는, 블랙 드래곤의 날개 피막으로 만든 망토를 매고 있었는데, 그 아이템은 더욱 자유로운 비행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티탄 호플리테스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쫓기 시작했다.
훙—
방금도 아슬아슬하게 거대한 손을 피한 그녀였다.
"큭! 썅!”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거대한 손에 짜부라질 수도 있었다.
"어— 어—”
이어서 두 개의 손이 그녀를 향해서 날아들었고, 그녀는 곡예비행을 하며 마치 좁은 협곡을 통과하듯이, 아슬아슬하게 두 손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겨우 통과했지만, 새끼손가락에 부딪히면서 중심을 잃고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도 하늬가 보조해주어서 금방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했다.
"언제까지 버텨야 해!”
그녀가 외쳤다.
그녀의 임무는 애초에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귓속으로 강희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 곧 최종 보스 발진합니다. 좀만 더 버텨줘요!
이제 한 30초 남았어요!
그러는 사이…….
철컥—철컥—
캠프 중심부.
그곳에 세워져 있던 프리드웬을 비롯한 14대의 비공정이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마나 엔진부에는 두꺼운 케이블이 잔뜩 달려 있었는데, 그 케이블들은 단 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케이블을 따라서 엄청난 양의 동력이, 그러니까 마나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으니…….
웅——
“좋아, 제우스 엑스 마키나 시동한다!”
강희설이 소리치며, 컨트롤박스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웅——
블루 사파이어로 조각한 듯한, 25m 크기의 시퍼런 청색의 금속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치지지지——
그것의 몸을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게 눈으로 보였다.
마법공학의 결정체 중 하나인 거신병.
그중 최고로 불리는 탈로스는 오리할콘이었고, 그 이후에 제작된 나머진 양산형 거신병들은 아다만트였다.
그렇다면 저 푸른 빛의 거신병의 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천철(天鐵).
마나를 부여하면 전류를 발생시키는 마법 금속인 '천철’과 각종 전격 관련 오브로 만들어진, 1,558t짜리 금속 거인이었다.
즉, 엄청난 양의 마나 공급이 있다면, 이 1,558t짜리 천철 덩어리는 말도 안 되는 전류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엔진부는 다름 아닌 ‘묠니르’였으니…….
무려 14대의 마법 공학 엔진의 마나를 머금고, 그것을 아주 진한 전격 에너지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었다.
파—지—지—지——!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몸 주변에서 전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있는 지면이 유리화(Glassing)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슴 부분에는 콕핏(Cockpit) 즉 조종석이 있었다.
그 안에 탄 건 전류의 통제자, 박준모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엄청난 양의 전류에 휘감겨 있었다.
즉, 그가 가장 강력해지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 김 팀장님. 어서 피하세요!”
- 아오, 박준모! 이제야 준비 다 된 거야?
"네. 이제 거기는……”
쿵—
제우스 오브 데우스(ZeCis Ex Machina).
기계장치의 뇌신.
그런 이름을 가진 25m짜리 거신병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 될 거예요.”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다량의 전기가 방전되며 일대의 바닥이 유리화되었고,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난 전류가 활개 치며 뻗어나가는 터에, 일대의 전자 장비나 마법공학 장비들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백 미터 떨어져 있음에도, 플레이어들의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
자기장.
이 공간 전체를, 전류가 뒤덮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대재앙의 전조였다.
그것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파—자—자—자——!
조금씩 고도를 높여나갈 때마다 폭발하듯이 뻗어 나가는 전류.
파—자—자—자——!
그 격류가 하늘을 메우고 있던 화산재를 타고 이리저리 번져나가며, 하늘에 형형색색의 빛줄기를 그려 나갔다.
그건 마치 심우주의 어느 이름 모를 성운이 현현한 듯이,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모습이었기에, 모두가 일순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고고히 떠 있는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자, 더 많은 전류가 흩어지면서 더 넓은 공간을 감전시켜나갔다.
온 세상이, 상상 속에나 존재할 법한 기이한 빛무리로 물들었다.
이내 그것의 손이 천천히 기울어져서, 어떤 계시를 내리듯이 지면을 가리키는 순간—
온 세상이 시퍼런 색으로 물들었고,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이, 강제로 정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