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마왕성 공략전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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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과 아가이디카가 마주 서 있었다.
그 둘은 단 한 차례, 겨우 몇십 초간의 격돌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약 백 미터 반경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리고 더는 대화가 진행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격화됨에 따라서, 양측 병력이 당장이라도 몰려와서 한바탕 전투가 벌일 듯한 상황으로 전개되려는 찰나…….
후—두—두—두——
난데없이 비가, 그것도 신성력이 잔뜩 담긴 비가 쏟아져 내리면서 과열된 열기가 식어버렸다.
그르르르?
그걸 뒤집어쓴 에이션트 레드 드래곤들은 투레질을 하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이건……."
“내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아!”
즉, 머릿속의 잠재 주문이 해제된 것이었다.
“……이러면, 그 자식들한테 항명한다고 해서 머리가 터져 죽을 일은 없는 거잖아?”
"그러면…… 도망갈 기회인가?”
"어쩌면 다시 한번 싸워볼 기회일 수도 있고.”
놈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르기 시작했다.
다 같은 종족이지만 누군가는 마왕에게 붙었고, 누군가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잠재 주문’이라는 족쇄에 채워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르르—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부락은 달라도 한 종족으로 동고동락하던 사이이지만, 이제는 두 분파로 나뉘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곧장 불꽃이 튀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가 각기 다른 존재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아가이디카와 차할리스.
그 둘 다 전방으로 가 있는바, 그들의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두 분은 뭘 하시는 거지?”
한편, 이현욱과 아가이디카의 대결까지 중단되었고 둘은 무기를 내려놓은 째 꽤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장이 완전한 고요에 잠겼다.
오직 그 둘에게 모든 시선이 모였다.
후우우우—
모종의 이야기가 끝난 후, 아가이디카는 고개를 돌려서 후방에 대기 중이었던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이는지, 눈썹이 몇 번 움직였다.
“……정말로, 전부 다 해제됐군. 이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소 분노가 가신 목소리였다. 즉, 이현욱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는 소거된 듯했다. 이현욱은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면서, 조금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영영 마왕에게 복종하려고 했던 건가? 넌 그런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놈을 죽일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몇십 년 더 나아가 몇백 년이 되더라도.”
"아, 그러면 내가 시간을 절약해준 셈이군?”
이현욱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맨손으로 아가이디카의 주먹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싸울 의사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의 신뢰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자 아가이디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의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현욱은 후긴과 무닌으로 그것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왜냐하면…….
- 붉은 화산의 동부 지배자 차할리스 (LV:193)
* 마왕의 권속
- 붉은 화산의 동부 백부장 (LV:181)
* 마왕의 권속
- 붉은 화산의 동부 백부장 (LV:181)
* 마왕의 권속
셋 다 마왕의 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차할리스는 보스 몬스터고. 나머지 셋은 엘리트 몬스터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그래도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인 붉은 화산의 수호자 아가이디카의 눈치를 보는지,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너희는, 마왕과 다르다고 할 수 있나?”
문득 아가이디카가 물었다.
이현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
"그놈도, 너희와 같은 부류였다. 일명 플레이어라지.”
이현욱은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너희 플레이어들은 이 붉은 화산 안에서 가만히 살고 있던 우리를…… 그 어떤 원한도 없음에도 집요하게 공격했지 않았나?”
"......."
"우리는 늘, 잠이 드나 사냥에 나서나 너희의 침략을 경계해왔다.”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 처지에서는 플레이어는 다 같은 침략자로 보이는 듯했다.
"우리는 너희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땅을 강제로 빼앗은 게 아니다. 그건 너희도 알 거다. 우리가 왔을 때는 너희는 없었고 오직 화산 지대와 황무지뿐이었으니.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땅을 개척하고 집을 세웠다.”
이 지점에서는, 인류로서도 여러모로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게, 엄밀히 따지자면 캘리포니아를 통째로 빼앗겼고 그걸 되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은 침식 이후에 등장했으니 주인 없는 땅에 자신들이 이주해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 여기서 논쟁할 문제가 아니다.’
그걸 따지려면은 근본적으로 이 게임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누가 왜 지구를 이 만신창이로 만들고,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을 보내서, 인류가 게임이라는 투쟁을 벌이도록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현욱에게 주어진 ‘메인 퀘스트’라는 걸 따라가다 보면 그 진실이라는 것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우선은 우리 모두 마왕을 죽여야지만 다음을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다.
"마왕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한다. 너희는 멸망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참한 노예 신세겠지."
"......."
"그리고 어차피, 너희 쪽에는 선택지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 기회를 잡으라고 말한 거다. 그다음은 천천히 생각해.”
이현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차할리스를 바라보았다.
놈의 입이 움직이고 있는 걸 보아하니 먼 거리의 눈가와 마법을 통해서 이야기 중인 듯했다.
'아마도 마왕일 거다.’
마왕이 지금 상황을 시하고 있을 테고, 자신의 시간 끌기가 수포가 되었다는 걸 안다면 또 다른 계책을 내놓을 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벅—
이현욱은 차할리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자 놈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놈을 호위하듯이 서 있던 나머지 둘, 일명 ‘붉은 화산의 동부 백 부장’이라는 이름의 엘리트 몬스터들이 앞으로 나섰다.
셋 다 ‘동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걸 볼 때 혈족인 듯했다.
이현욱은 그놈들에게 다가가며 등 뒤로 손을 뻗었고, 바닥에 내리 박아두었던 거검, 모글레이가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턱—!
그 거검이 햇빛을 받아서 위협적으로 빛났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해야지.”
이현욱은 모글레이를 치켜들고 아가이디카를 스쳐 지나갔다.
다분히 차할리스를 죽이겠다는 태도임에도 아가이디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즉 이현욱의 의견에 완전히 동조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성의를 보여서 네 아픈 이 몇 개를 뽑아 내줄 테니까, 잘 해보자고.”
아무리 종족의 배신자들일지라도 수호자 아가이디카는, 자신의 사명감 때문에 동족을 집적 죽이는 걸 꺼릴 수도 있으니 이현욱이 대신 처리해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차할리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보게 수, 수호자여! 그대는 나를, 우리 종족 모두를 지켜야 하지 않나? 응?”
하지만 아가이디카는 말이 없었다.
그는 긴 한숨을 토하더니, 노여움에 찬 표정으로 차할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놈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저도 모르게 아가이디카에게 손을 뻗더니 마나를 발산했다.
웅—
아마도 놈에게 ‘잠재 마법’ 발동 권한이 주어진 모양이고 그걸로 아가이디카를 통제하고 있는 듯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을 영 못하는군. 아니면 발악인가?”
이현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이—!”
차할리스의가 양손을 모으더니, 마법진을 피워냈고 그 안에서부터 강력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펑——!
하지만 이현욱은 모글레이를 휘둘러서, 간단하게 그 불꽃을 소멸시켜버렸다.
"저 녀석이 아니라면…… 애초에 너희는 내 상대가 못 돼.”
이현욱이 고갯짓으로 아가이디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녀석은 붉은 화산의 수호자답게 이곳 붉은 화산에서만큼은 웬만한 드래곤보다 강력한 존재였기에 이현욱으로서도 쉽사리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라면, 제아무리 보스 몬스터 등급이라고 할지라도 이현욱이 이기지 못할 건 없었다.
아니. 전부 이길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시간대에서는 아니, 8년 후의 세계에서도 적수가 없을 만큼 강해진 상태였으니…….
저벅— 저벅—
놈들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존재인 이현욱이 다가옴에도 잔뜩 움츠러든 채 뒤로 물러섰다.
놈들도 느낄 수 있었다.
이현욱에게서 풍기는 격의 규모를.
"이— 이— 저 자식을 막거라!”
차할리스의 외침에 두 백부장이 본 모습인 드레이크로 변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할리스는 ‘근거리 텔레포트 마법’을 시도하려는 듯 합장을 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죽어라, 미개한 생명이여!”
달려드는 두 놈을 향해 이현욱이 있는 힘껏 모글레이를 휘둘렀다. 비록 허공을 그었지만 ‘스페이스 커터’가 발동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 칼날이 쏘아졌다.
촤—자—자—저——!
두 놈의 허리춤의 부근의 공간이 뒤틀리더니 퍽— 하고 비늘이 깨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칵!”
"큭!”
역시 레벨이 상당히 높은 만큼 스페이스 커터에 직격당해도 즉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지가 꽤 큰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며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본 모습으로 돌아가면 회복 속도가 더 빨라지기에 방어를 우선으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이미 다음 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푹— 푹—
두 발의 은색 화살이 호를 그리며 움직이더니, 두 놈의 왼쪽 눈에 동시에 처박혔다.
놈들은 오직 이현욱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시야 밖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캭—
놈들은 고통에, 그리고 한쪽 시력이 상실됨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고, 그 순간, 이현욱이 바닥을 박차며 놈들의 머리맡까지 쇄도— 모글레이를 휘둘렀다.
퍼—억——! 퍼—억——!
무려 100t의 무게를 지닌 검이다.
제아무리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일지라도 살점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뼈가 나뭇가지처럼 끊길 수밖에 없었다.
한 놈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고, 한 놈은 한쪽 팔이 날갯죽지부터 뜯겨나가서 너덜거렸다.
사실상 리타이어였다.
"끄아아——”
“칵, 사, 살려......."
한편, 차할리스는 두 놈을 미끼로 던지고는 근거리 텔레포트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동하려는 찰나—
퍽—!
놈의 어깨에 웬 창이 하나 처박히는 바람에 주문이 뒤엉키고 말았다.
"큭!”
그건 에드워드 우즈가 던진, 드래곤 스피어였다.
"거기 서라.”
어느새 에드워드 우즈가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큭! 이—이—애송이 녀석이…… ”
그는 또 다른 드래곤 스피어를 꺼내 들며 투창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차할리스는 근거리 텔레포트 마법을 강제하는 데 성공했고, 눈앞에서 놈의 모습이 사라졌으나.......
웅.......
"이, 이런 제기랄!”
투창을 맞고 주문이 흐트러졌기 때문인지, 고작 십여 미터 밖에서 재등장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마법을 시도하며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콰—앙——!
머리 위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모글레이를 발견하지는 못했고, 그대로 곤죽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 싱거운 승부, 아니 압도적인 사냥이었다.
"......."
한편,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수천의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커 부대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잊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맴돌 뿐,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놈들은 불안함이 섞인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건 무리 형태의 몬스터들에게 나타나는 ‘지휘 붕괴’라는 현상으로, 리더 격인 몬스터를 제거하면 일시적으로 디버프 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에 정답을 제시하듯이, 아가이디카가 이현욱의 옆에 섰다.
후방의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은 이곳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상황 파악이 힘들을 텐데, 이 한 장면으로 설명이 되었을 것이었다.
새로운 동맹이 형성 만들어졌다.
그러자 드레이크들 사이에서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몇몇 드레이크가, 아마도 마왕을 따르는 드레이크들이 도주를 시작한 것이었다.
또 그걸 잡으려는 드레이크들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다수가 붉은 화산의 수호자를 따르기로 했는지 자리에 남은 채, 요란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어어어——
인간들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는데, 아마도 환호하거나 아가이디카를 연호하는 듯 듯했다.
그때, 이현욱이 아가이디카에게 물었다.
"아가이디카. 마왕성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알고 있다.”
"그곳으로 안내해. 가서 마왕을 죽인다.”
하지만 아가이디카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돕더라도 너희만으로는 안 된다. 네 공격이 마왕을 압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칼이 놈의 심장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선발대일 뿐이고, 이제 본대가 올 거야.”
***
그 시각,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런 미친, 그래도 저 빨간 도마뱀들이 떼거리로 나가면, 몇 시간은 버틸 줄 알고 보냈던 거 아니었나? 고든이 그럴 거라고 했잖아?”
큰 망치를 든 거구의 남자가 말했다.
그는 웬 굴 같은 방 안에서 서서,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붉은 산맥의 어느 봉우리의 절벽에 있는 에이션트 레드 드래곤들의 망루 시설로, 방금의 소동이 펼쳐진 황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때, 그의 등 뒤로 아주 긴 지팡이를 든 여자가 다가왔다.
그 지팡이는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에 아주 작은 요정 ‘페어리’가 박제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단순 조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정말로 말라비틀어진 페어리 시체…… 미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창밖을 내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버티기는커녕, 저쪽으로 붙은 것 같은데? 이거 완전히 좆된 거 아니야? 군단 하나가 통째로 넘어간 셈이잖아.”
"그렇지. 저 도마뱀 새끼들이 처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까먹은 것 같네.”
"흠, 마왕 폐하께서도 그렇게 판단하셨을 텐데…… 이번에도 스틸레인한테 한 방 먹은 건가? 하, 썅,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러다가 정말로 지는 거 아니야?”
“으흐흐一 레이첼, 설마 마왕을 따르기로 한 게 후회되나?”
"아, 아니, 그럴 리가.”
거구의 물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일개 언데드로 전락할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가 여럿 있기도 했고.
레이첼이라고 불린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힘…… 분명히 마왕의 가신이라는 힘은 너무 만족스러워. 이런 힘을 하사받고 어떻게 마왕을 의심할 수 있겠어?”
이들은 ‘마왕의 초대장’에 응하여 마왕의 휘하로 들어온 플레이어들이었다.
물론, 그 마왕의 초대장을 받은 절대다수가 당연하게도 무시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악마 숭배자나 레드 플레이어들…… 바로 이들이었다.
"으흐흐— 그렇지? 이 정도의 능력 상승을 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어? 그뿐이겠어? 내가 살면서 몬스터를 부하로 부리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거구에게, 오크가 한 마리가 다가와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로 귀족이 된 기분이란 말이지.”
이처럼 이들은 ‘마왕의 가신’이 되면서 엄청난 능력 상승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은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권능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방 중심에 파란색 마법진이 그렸다.
웅—
"아, 드디어 고든이 오는 모양이군.”
그러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플레이어들, 일명 마왕의 ‘가신’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작전인가?”
“이번에는 설마 우릴 내보내지는 않겠지?”
“그전에 티탄도 있고, 블랙 오크도 있잖아. 그것들을 먼저 쓰겠지.”
이내 마법진 위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키가 큰 남자. 포마드 머리에 양복을 차려입은 잘 생긴 백인이었다.
"고든.”
세상에서 가장 큰 기업인 <블루트리>의 총수인 고든 프라이스.
그가 마왕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을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플레이어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으니 말이다.
그가 천천히 마법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거구의 남자에게 다가와서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빼앗듯이 넘겨받더니, 다소 거칠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저…… 고든, 이제 곧 완공이지 않나? 마왕성 말이야.”
거구의 남자가 그 체구가 어색할 만큼 조심스레 물었다.
이들은 오직 마왕성의 완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완성되면, 마왕뿐만 아니라 마왕을 따르는 모든 존재의 힘이 대폭 상승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전력인 마왕의 군단이 몇 배로 강화될 터, 더는 숨어서 스틸레인에게 쫓기지 않고, 전 세계를 정복하러 출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스틸레인이 찾아와서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는바, 위기감이 조성되어서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 군단과 붉은 화산의 수호자를 내보냈건만…… 오히려 스틸레인의 전력이 보강되었다.
여러모로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고든 프라이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 완공까지 불과 7시간 남았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나?”
거구가 물었고 고든 프라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맥스. 버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응?"
“마왕성이 완공되더라도 그 힘을 받을 수 있는 병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 마왕께서는 병력을 보존하기를 원하신다.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복속한 이유가 그것이고. 그러니까……."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창밖, 산의 한 면을 살폈다.
쿠구구구——
그곳에서 큰 구멍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아주 많은 무언가가 구멍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개미굴을 건드렸을 때의 반응 같았다.
“……죽더라도 되살릴 수 있는 언데드 군단이 나가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너희가 마왕의 곁을 지킨다.”
무려 네크로맨서 군단이 출정한 것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이는 아주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레이첼이 한 걸음 다가오며 의문을 표했다.
“어…… 그런데 언데드 군단은, 지금 당장은 꺼내는 게 어렵다는 거 아니었어? 그…… 성녀랑 그, 신수를 탄 라퓨타가 나타나면 힘이 너무 약화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당장은 숨긴다며. 나중에 한 방을 위해서.”
이에 고든 프라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손해가 될 테지만, 언데드 군단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복구하는 게 가능하니까 어느 정도는 소모해도 된다고, 마왕께서 판단하셨다.”
고든 프라이스는 ‘네크로맨서’라는 존재의 힘의 공식을 잘 알았다. 그가 키워낸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또 다른 봉우리 근처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 현상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
"저건, 설마……."
훙——
검은 연기를 헤치고, 장막의 날개가 튀어나왔다.
붉은 화산이라는 대산맥을 일개 언덕처럼 보이게 할 만큼 거대한 존재…… 그건 무려 ‘본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무려 4마리…… 뒤를 이어서 본 와이번 등의 비행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하늘을 수놓는 광경은, 누구나 한번 쯤 떠올렸었던 지옥의 풍경 그 자체였다.
고든 프라이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까지의 언짢은 감정이 대번에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저 정도 수준의 언데드라면, 조금 진한 신성력 안에서도 충분히 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쿠구구구.......
또 다른 산의 한쪽 면이 무너지더니, 그곳에서부터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소 떼가 내달리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그것들은 전부 다, 적골화된 ‘레드 드레이크 스켈레톤’이었다.
이렇듯 세 지점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언데드 군단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고든 프라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봐도 저게 말이 되나 싶군.”
그가 네크로맨서를 육성할 때, 저것 한 마리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죽음의 사원을 짓고, 엄청난 제물을 받혀서 단 한 마리를 만들어냈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나서, 스틸레인과 격돌 당시 놈의 에이션트 아이언 골렘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려 수백 마리다.
"그리고 저게 다가 아니다. 내가 준비한 것도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려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산등성이로부터 웬 로켓 같은 것들이, 희뿌연 연기를 꼬리에 매단 채 높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어, 저건 뭐야?”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마나역류탄’이다.”
"마나역류탄?”
"마나 회로를 일시적으로 망가뜨리는, 일종의 EMP다. 즉, 이제 몇 분간 놈의 저궤도에 떠 있는 그 위성 무기가 쓸 수 없을 거고, 모글레이 투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자 곳곳에서 ‘오—’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스틸레인을 상대할 때 가장 껄끄러웠던 게 바로 중력을 잔뜩 머금은 모글레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내 저 먼 하늘에서 빛이 번뜩였다.
마나역류탄이 폭발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궤도에 떠 있는 ‘워박스’를 마비시켰을 터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의 캠프 위로도 쏘아지며 비공정들을 싹 다 마비시켰다.
저 중에서는 레비아탄을 일격에 보냈던 ‘가우스함’도 있을 터, 스틸레인의 강력한 한 방을 전부 원천 차단한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놈이 난리를 치는 걸 두고만 보고 있던 게 아니다. 놈이 전 세계의 물자를 끌어모아서 무기를 만들고 있을 때, 나도 내 돈을 써서 무기를 만들었지.”
고든 프라이스는 술잔을 천천히 들어 올려서 남은 술을 싹 다 비웠다.
이제, 마왕과 자신이 합작한 승리를 관망할 차례였다.
훙— 훙—
어느새, 본 드래곤을 위시한 비행 언데드 군단이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플레이어들과 에이션트 레드 드레이크들을 덮칠 준비를 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급하강 폭격기 편대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현욱이 다루는 ‘성검’이라는 게 거슬리긴 했다. 그걸 모글레이에 적용한다면 무려 본 드래곤일지라도 리타이어 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모글레이가 제아무리 커도, 본 드래곤 앞에서는 과도에 불과한바, 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을 터— 단 방에 본 드래곤이 무너지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열댓 번은 쳐야 할 거다.’
그리고 마왕 측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시간이다.
'한 번 열심히 잡아라. 마왕성이 완공되는 순간 결국 되살아날 테니.......'
그때—
"어! 와이드 홀이 열렸다!”
플레이어 측 캠프 상공에 원형의 백색 고리가 형성되었다.
“……설마, 라퓨타가 오는 건가?”
"와, 타이밍 한 번 별로네.”
이들도 신목을 이식한 라퓨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언데드 군단이 출발했을 때 그게 나타났다.
그때, 고든 프라이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일대에 신성력 농도가 커진다고 해도 아무리 그래도 본 드래곤을 쉽게 잡지는 못할 거다. 그 정도는 다 상정하고 언데드 군단을 내보낸 거니까.”
그런데, 와이트 홀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어, 드래곤이잖아?”
그렇다.
웬 백색 드래곤이 포탈을 통과해 나오더니 수직으로 비상했다. 그뒤로 비공정 함대가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드래곤의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기이이이——
온몸에 온갖 기계 장치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이어서 그것이 입을 벌렸고, 백색의 브레스가 뿜어지며, 본 드래곤 한 마리를 강타했다.
콰과과과과——!
그 브레스는 신성력 덩어리 그 자체였고, 제아무리 강력한 본 드래곤일지라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가장 먼저 녹은 피막의 날개였기에 놈은 양력을 상실하고 곤두박질— 결국 바닥에 처박혔다.
쾅——!
본 드래곤 한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리타이어 됐다.
그리고 이어서—
투—콰—콰—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계 드래곤의 온몸에서 미사일이 쏟아져 올랐다. 동시에 징—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광선이 쏘아졌다.
온몸이 무기였다.
그것도 신성력 무기.
그 공세가 하늘을 뒤덮었다.
첫 번째 본 드래곤이 추락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비행 언데드들이 불나방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