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종말 대비, 총력전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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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뿐이다.
이 정체불명의 게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그러나 모든 플레이어가 ‘영웅’일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강인한 플레이어일지라도 이타심이나 사명감이 없다면 제 몸부터 사리기 마련이다.
지금껏 <블랙 오크 왕국의 침공>이나 <티타노마키아>와 같은 전쟁 이벤트 때마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참전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플레이어가 침묵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 <월드 퀘스트>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으니…….
“……옆집에 불났다고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는 우리 집까지 옮겨붙게 생겼잖아?”
이는 약 이틀 전에 멕시코 랭킹 1위인 페르난도 벨라스케스가 출국 직전에 한 말이었다.
그는 지금껏 라틴 아메리카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에는 그 어떤 요청이 있더라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가 먼 길을 행차했다는 건, 이 월드 퀘스트가 가지는 의미를 방증했다.
즉, 전 세계 모두가 피부에 와닿는 위기인바…….
-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드는 정상급 플레이어들, 길드 마스터 111명, S등급 플레이어만 21명 달해……
-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플레이어 회담, 브라운 잭슨 의장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낼 해답을 찾아낼 것”
온 세상의 힘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두—두—두—두—
한 언덕 위, 큰 대리석 건물 앞으로 수많은 헬리콥터와 자동차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중의 마법 방어막이 처져 있었고, 수백 명의 경비 병력이 사방을 경계 중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리고 접근 금지선 밖에는 다국적의 리포터들이 모여서 취재 열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 제가 나와 있는 이곳은 스위스 취리히로……."
"—이들이 세계를 지킬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응원……."
그들의 목소리가 한 대 뒤엉키면서 이 상황을 다급하면서도 묘하게 활기 넘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이곳으로 전 세계의 거물급 플레이어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포터들은 하나둘씩 등장하는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소개를 했다.
"아— 리징타오입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DS, 에드워드 우즈를 비롯한 영국의 영웅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어어— 저기 두 무리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은데, 유혈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지역의 최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는 듯했다.
"어, 뭐야, 자네도 온 건가? 이건 좀 의외인데……."
"뭐? 왜? 나는 초청 안 받을 것 같았나?”
지금 대화를 나누는 이 두 사람은 스페인 양대 길드의 핵심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카메라를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섰다.
“으흐흐— 아니, 오해하지 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누가 자네 실력을 의심하겠어?”
그러더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악수하고는,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따지려는 건 아니야.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2년 전 엔트의 숲 공략 이후 처음인가?”
찰칵! 찰칵!
이렇듯 플레이어들이 휘황찬란한 아이템을 두른 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장하고, 서로 인사와 담화를 나누는 장면은…… 전투 대비가 목적이라기에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졌다.
어떤 이는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지구를 지키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아이템 패션쇼나 올해의 플레이어 시상식 따위가 아니냐고 빈정거릴 정도로 다소 느슨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플레이어들이 위기의식이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건 전투가 일상일 바, 큰 재앙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민간인으로서는 웃음을 동반할 수 없는 순간일지라도, 이들은 유쾌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멎는 게 아닌가?
"......."
마치 일시 정지를 한 것처럼,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싹 사라진 것이었다.
그들은 맹수의 울음을 들은 미어캣들처럼 고개를 내빼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
이에 카메라들 역시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서 포커스를 움직였다.
그곳으로 검은 옷을 입은 동양인 사내 한 명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왔다.”
현 시점상 가장 유력한 ‘용사 후보’라고 불리는, 최강의 플레이어 ‘스틸레인’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에밀리아 뮐러, 도널드 해리스, 우성문 등이 함께 등장했다.
지금껏 저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업적을, 모든 이들이 머릿속으로 상기했다.
지금 이 시점상, 단연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가장 지지받는 세력이었다.
저벅— 저벅—
그들은 침묵을 뚫고 플레이어 사이를 나아가…… 백색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
그 장면이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한가롭게 가십을 즐기고 있던 플레이어들 역시 하나둘씩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한 리포터가 어딘가 어색한 고요를 뚫고 말했다.
"이제 스틸레인은 존재만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까요? 어떤…… 격이 느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왕에 맞설 대표자 ‘용사’가 결정된다는 게 세간의 예상이었다.
***
- ……이 월드 퀘스트의 목표물은 ‘마왕’이고,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추적하기 위해서 많은 분이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더 신경 써야 할 건 앞으로 다가올 전투겠죠.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큰 전투에 앞서서 결의를 다지고, 전력을 응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국회의사당 본 회의장을 연상게 하는 큰 홀 안, 수백 명의 플레이어가 앉아 있었다.
- ……그렇기에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총력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단상에 선 한 장신의 노인이 확성 마법으로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세계 플레이어 협회(WPA)의 의장, 브라운 잭슨이었다.
이현욱 역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플레이어 (LV:43)
‘……생각보다 훨씬 레벨이 낮았군?’
브라운 잭슨, 그는 최초의 각성자 중 하나인 1세대 플레이어였거늘 상당히 낮은 레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그의 판단을 의심하거나 그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진짜 능력은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지성인으로서 발휘된다.’
그는 이 세상이 게임과 공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로서, 그 방면에서는 최고 권위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던전 공략 전술 디자이너이기도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공략 작전은 현 시점상 무려 98%의 성공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소집하고 초청을 했을 때, 각 지역 최강자들이 군말 없이 따른 것이었다.
그라면 <월드 퀘스트>라는 세계적인 대재앙을 막아낼 혜안을 내놓으리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의 재주를 기대하기에는, 이번에는 적수가 너무 강하다.’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직접 네크로맨서와 싸워본 이현욱보다는 통찰이 떨어질 것이었다.
애초에 이 시기의 플레이어들은 ‘웨이브 침식 지역’조차 공략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저들은 통제해야만 한다. 그게 유일한 답이다.’
이현욱은 고개를 들어서 천천히 주변의 플레이어들, 각지의 최강자들을 둘러보았다.
- 플레이어 (LV:89)
- 플레이어 (LV:84)
- 플레이어 (LV:78)
‘쯧— 이 시기에는 고작 이 정도였나? 이걸로는 절대로 안 된다.’
적은 무려 8년 후의 세계를 독식했고, 그로부터도 더 진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마왕까지 있으니…… 내 예상 이상으로 강할 거다.’
이현욱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목소리가 그의 귀를 치고 들어왔다.
- ……제가 한 말씀 먼저 해도 되겠습니까?
- 예, 존경하는 마스터 하인리히, 말씀하시지요.
- 큼— 저는, 스틸레인께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이 부드러우면서 당찬 목소리는…… 하인리히 볼코프라는 독일 유력 플레이어였다.
그는 지금껏 알랭 지암의 뒤를 이어서 이현욱을 공격해온 <푸투레>의 회원이기도 했다.
- 부디, 이번만큼은 독단적인 행동을 삼가십시오.
그리고 푸투레 세력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현욱을 물고 늘어질 작당인 듯했다.
‘이 순간에도 제 몫을 챙기려는 멍청한 수작이라니…….'
저 인간의 정보를 살펴본바 ‘빌런’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현욱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텐데…… 그 목적성이 시대착오적이고 이기적이라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저런 미꾸라지 같은 부류의 인간은 전생에도 마지막 순간까지도 존재했다.’
온 세상이 빌런들에게 집어 삼켜지고 있는 와중에도 제 잇속과 제 자존심이 우선인 자들…… 이현욱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브라운 잭슨 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이현욱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 ……스틸레인, 한 말씀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그에 앞서서 하인리히 볼코프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용사, 하하— 이 뻔하고 유치한 호칭은 단 한 명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연설하듯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 역시 1세대 플레이어로서, 길드 마스터로서 군중을 다룸에 능숙했다.
- 의장님, 제가 몇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자 하인리히 볼코프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자신과 안면이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눈인사했다. 그는 원체 매너가 좋고 사람을 잘 챙기기로 소문이 난, 인망이 두터운 노인이었다.
즉, 그의 말은 충분히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 나, 하인리히 볼코프…… 이 늙은 마부가 지금껏 이 게임이라는 진창 안에 빠진, 인류라는 마차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온갖 사투를 겪으며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돌려서 이현욱을 힐끔 쳐다본 뒤 말을 이어갔다.
- ……한 마리의 힘 좋은 말에게만 고삐를 채워서, 단 한 방향으로만 마차를 잡아당기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얕은 진창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빠진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힘이 잡아당긴다면 마차는 오히려 뒤뚱거리며 더 깊숙이 처박힐 겁니다.
그는 양손을 펼쳐서 플레이어 모두를 가리켰다.
- 으레 힘이란 것은 가장 기초적인 과학이 아니겠습니까? 큰 무게를 받들기 위해서는 그저 강한 하나의 기둥이 아니라, 무게 중심을 이해하고 힘을 최대한 분산시켜야만 더 큰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마차를 진창에서 건지기 위해서도 많은 말을 동원해서 다양한 방향으로 끌고, 밀고하는 게 답입니다. 그러므로 힘은 분산해야 옳다는 걸 주장합니다. 이 상황도 똑같습니다. 단 한 명에게 집중되는 힘과 권한…… 오히려 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푸투레 소속의 길드 마스터로 보이는 몇몇이 “옳소!”하고 외쳤다.
또한, 그와 관련 없는 몇몇 플레이어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등 공감을 표했다.
- 이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비유지만, 부디…… 마차를 끄집어내기 위해 지혜를 모아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 한 뒤, 이현욱을 한 차례 바라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일명 용사 특전, 단 한 명에게 돌아갈 그 업적의 옵션은 무려 ‘모든 능력’ 3배 상승이었다.
그리고 분석가 플레이어들이 조사해본바,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용사로 선정되는 플레이어에게 이 세상 전체를 의탁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한 지역의 최강자인 이들은, 단 한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걸 꺼린다.
마치 봉건 영주들이 절대적인 중앙집권체제의 탄생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내 곳곳에서 마치 공청회가 된 양, 이현욱을 향한 요구와 질의가 쏟아졌다.
- 음, 저도 스틸레인이 용사 특전을 받기 위해서는 그에 응당한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많은 분이 말씀하시는 라퓨타 기술의 공유라든지…… 예, 그런 거 말이죠.
- 저도 스틸레인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힘의 분배가 필요하다는 건 동의합니다.
이현욱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인리히 볼코프의 논리를 깨고 이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무려 3배의 모든 능력 상승에다가 유일하게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용사 특전 옵션…….
그걸 얻기 위해서는 흔히 말하는 표심을 얻어야 했는데, 여기 이들이 표심의 중추였다.
이들이 만에 하나 이현욱에게 반감을 품고 그걸 발언으로 옮긴다면 파급이 꽤 컸다.
이현욱은 그들을 아우성을 들으면서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속에는 경계심보다 더 짙은 감정이 하나 웅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잘난 플레이어들께서 이미 겁에 질려 있군.’
지금껏 이 세상을 쥐락펴락해온 최강자들이지만,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는 유약해진다.
미지(未知)에 대한 공포…… 그건 인간이 지닌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왕이라는 존재는, 플레이어들로서는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두려운 적수였다.
'즉, 나를 경계 대상으로 보기보다…… 나에게 어떤 증명을 바라는 거다.’
저들이 봉건 영주와 다름없는 만큼 중앙집권체제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저항할 수 없는 침략이 이루어진다면, 왕의 결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즉, 저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힘의 분배가 아니다.’
오히려…….
'……확실한 힘의 증명이다.’
이현욱은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느끼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골랐다.
그런데 그때—
- 응?
브라운 잭슨이 제 귀를 감싸 쥐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긴급 무전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 큼, 여러분.......
그는 무슨 소식을 들은 건지,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이었다.
- 지금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 그게…… 마왕의 위치가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 자, 우선 한 번 보시죠.
그가 등을 돌리며 벽에 달린 원형 물체 ‘크리스털 영사기’에 마나를 부여했다.
웅—
그러자 그곳에서부터 홀로그램이 뿜어져 오르며 동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후우우우——
웬 설원…… 눈보라가 몰아치는 침엽수림이 보였다.
"......저기는 시베리아잖아?”
한 남자, 아마도 러시아 유력 길드의 마스터로 보이는 이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퍽 익숙한 광경인 듯했는데, 동시베리아의 툰드라 삼림 지역이었다.
- 저곳은 동시베리아 제3 관측소입니다. 2년 전부터 아이스 트롤 무리를 감시 중이었죠.
꽤 오래전, 시베리아에 다수의 고위 게이트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베리아라는 험지의 특성상 게이트가 굉장히 늦게 발견될 수밖에 없었고, 그사이에 몬스터의 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지역이 무인 지대로, 이렇다 할 피해가 없었기에 억지로 공략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렇게 방치된 아이스 트롤 무리는 점점 성장했고, 일대에 눈보라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겨울의 심장이라는 전설 등급 아이템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시베리아의 추위가 점점 세력을 확장했고 뒤늦게 아이스 트롤 공략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때의 아이스 트롤은 완전히 격이 다른 몬스터로 진화했다.’
쿵— 쿵—
"어, 저게 아이스 트롤이야?”
지금, 동영상 속에서 침엽수림 사이로 거구의 존재들이 등장했다.
“……뭐야, 알려진 것보다 더 크잖아?”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은데, 뭐야?”
한 층 진화한 그것들이, 누군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대상은 허공에 뜬 한 명의 인영…… 네크로맨서, 아니 마왕이었다.
이현욱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마왕에 관한 한가지 확신을 얻었다.
'……역시, 몬스터를 복속시키는 능력이 있는 거다.’
앞서서 티탄들과 손을 잡는 장면이 포착된 바 있었다.
그때는 추정만 했을 뿐인데, 저 장면으로 확실해졌다.
- 그리고 저 장면은, 이곳뿐만 아니라 사하라 사막, 아마존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직후 동영상이 종료됐고, 브라운 잭슨 의장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 지금껏 우리가 쉬이 처리할 수 없었던 험지의 몬스터들을…… 마왕이 모으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그때, 브라이언 틸이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 여러분, 이건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그의 비명 같은 고함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브라운 잭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분석가 플레이어였다.
그렇기에 저 한 장면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 지금껏, 우리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 비교적 우위에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역설하기 시작했다.
- 그 이유는 마치 게임 스테이지처럼 저들이 한 장소에서 한 그룹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로 뭉쳐서 대응한다면…… 차원이 전혀 다른, 최악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한 줄기의 강물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지만, 모든 물이 모인 바다는 감히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요.
그 말에, 브라운 잭슨 역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또다시 웅성거림이 퍼지며 묘한 절망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이 당혹감과 절망으로 물든다는 건…… 전 세계는 그 이상의 혼란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 ……그러니까, 몬스터 군단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군요.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이현욱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첫 발언이었다.
이에 장내가 일순간 침묵했다.
"......."
그리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는 마이크를 쥔 채 아주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군단이 필요하겠죠.”
이에 하인리히 볼코프가 서둘러 마이크를 켜서 한 마디 덧붙였다.
- 그 군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단과 독재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현욱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싱긋 웃어보였다.
“음…… 저에게는 이미 군단이 있습니다.”
-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그 순간 이현욱이 왼손을 뻗었고, 하인리히 볼코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턱—
그의 손아귀로 웬 둥근 물체가 날아와 사뿐히 안착했다.
그건, 연단 위에 있던 크리스털 영사기였다.
"자, 지금부터 제가 보여드릴 장면은 불과 30분 전 장면입니다.”
이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털 영사기에다가 미리 준비해둔 USB를 꼽았다.
그리고 마나를 부여하자 그의 손 위로 홀로그램이 치솟으며, 동영상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우——
그 동영상이 비추는 건 다름 아닌 라퓨타였다.
그것은 어느새 서울 하늘이 아닌, 강원도 산간에 떠 있었다.
"응? 저걸 갑자기 왜 보여주는 거야?”
“……쉿, 조용히 하세요. 다 이유가 있겠죠.”
직후, 라퓨타의 상단부와 하단부에서 무언가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벌집에서 벌들이 비상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웅— 웅— 웅— 웅—
그건…… 전부 비공정으로, 언뜻 봐도 엄청난 숫자였다.
족히 백여 대.......
"뭐, 뭐야— 저거 강철 함대야?”
“……아니, 강철함대는 여기에 와 있잖아.”
"그러면, 저건 도대체 어디서……."
즉, 강철함대의 몇 배에 이르는 비공정들을 양산했다는 뜻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어서 화면이 넘어가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헉— 저거 전부 다 그 금속 거인인 거야?”
“미친, 한 마리만 해도 그렇게 강했는데……."
한 공장 안, 오리할콘 거인 탈로스의 모습을 한 거신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전차를 양산하는 것처럼, 컨베이어벨트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고대 노움의 기술로 만들어진 탈로스-전투 모드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거신병 연구소의 기술로, 아다만트 소재로 만들어진 전투 병기들이다.’
이어서 또 한 번 화면이 넘어가면서, 강원도에 있는 ‘병기창’을 비추었다.
이제는 완공되고 바쁘게 돌아가는 그곳의 하늘에, AD-2가, 아니 그보다 상위 모델인 AD-3 잔뜩 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껏 단 한 대뿐이던 워 박스가 2대가 비행 중이었다.
"와......."
이현욱이 이 세 가지 장면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보여줄 쇼가 더 있음을…….
그것들이 이현욱의 통제하에 놓이게 될 시, 어떤 위력이 될지, 이들은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현욱이 지금껏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마법공학’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했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내가 만들어둔 공장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그가 확보한 ‘레드홀 마을’의 아다만트 광산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던전 강철 광산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재료를 공급받았으며 ‘위그드라실’과 ‘신단수’로부터 특별한 재료를 확보했다.
그 외에의 부속품들은 우성문을 실장 필두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그 지원을 받고, 최고의 대장장이 플레이어들과 그레이 드워프 종족이 밤낮으로 일했다.
무려 ‘라퓨타’라는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헤파이스토스 망치라는 아이템을 이용해서…….
"마스터 하인리히, 마차를 끌어내는데 여러 마리의 말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그의 말에 하인리히 볼코프는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의 침묵 속에서, 이현욱의 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저에게는 이미 기마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숫자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현욱은 홀로그램을 끄고, 크리스털 영사기를 쏘아 보내서 연단 위에 원위치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모든 이들의 시선은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가지 않고, 이현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보여드린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지금, 라퓨타에서는 ‘기계 드래곤’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섣불리 공개할 수 없는, 특수한 무기들이 잔뜩 준비됐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투자하십시오.”
그는 지금, 지지를 호소하는 게 아니라 투자의 기회를 베풀고 있었다.
"저는 전 세계의 자원을 총동원해서, 마왕을 향한 총력전을 준비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