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마지막 분기점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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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분기점에 도달했다.’
이현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회귀, 두 번째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최후의 상대로 생각했던 네크로맨서를 생포했다.
물론, 흑막인 고든 프라이스가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네크로맨서를 잡은 이상 놈의 무기를 전부 무력화한 상태나 마찬가지로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이쯤 되니까 또 다른 고민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메인 퀘스트를 쫓아야 한다.’
이현욱은 이 세상을 잠식한 게임의 정체, 그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퀘스트가 진행 중이었다.
이 게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존재가 무슨 이유에서건, 이현욱에게만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왜 하필이면 내가 과거로 돌아왔을까?’
늘 마음속 한구석에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으나, 지금껏 그 어떤 힌트도 없었기에 추측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의심이 가는 키워드가 있었는데…….
'……적어도 이 모든 게 <초월>이라는 키워드와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현욱은 눈앞에 있는 두 번째 차원 이동자,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를 바라보았다.
일명 ‘준(準) 초월자’라는 분류의 플레이어인 차원 이동자, 리카르도 올리베이라…….
‘이 자식은, 내가 궁금해하는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놈을 즉살하기보다 생포하여 심문할 필요가 있다고, 이현욱은 생각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을 것이었다.
"워, 설마 나를 환영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 모인 건가? 이건 좀, 아무리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게 익숙한 나라도 부담스러운데……."
그놈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긴장이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에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제 입으로 말한 만큼,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는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대응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현욱은 후긴으로 놈의 움직임을 살피는 동시에, 혹시 모를 또 다른 습격을 경계했다.
지금 이 상황, 분명히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놈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으니 혹여나 허튼짓하려고 했다가는 일시에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했다간 한 방 먹을 수도 있다. 그래도 8년이나 앞서나간 놈이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아이템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
이현욱은 ‘블러드 로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힘이 담긴 자신의 피를 매개로 하여 온갖 마수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즉, 지금은 홀몸처럼 보이지만 몸 곳곳에서 권속을 소환할 방법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본 미래의 블러드 로드는 피 몇 방울로 웨어울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
물론, 상당량의 마나가 소모되기에 무한대로 소환하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요소였다.
그렇기에 이현욱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놈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절그럭— 절그럭—
우선 리빙 아머들이 움직여서 놈을 포위했고, 그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ROK AMT 병력이 합세했다.
그리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수백 개의 금속 무기들도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칼날을 바닥으로 드리운 채 촘촘하게 도열했다.
“……블러드 로드, 한 가지 묻고 싶다.”
이현욱이 한 걸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그래, 나를 인터뷰하려는 건가?”
여전히 배짱을 부리는 놈이었지만,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이현욱은 느꼈다.
"왜, 우리 차원으로 넘어온 거냐? 네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다.”
“오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야. 그런데 그걸 묻는다는 건 우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건데, 윌리엄 버나드 그 자식이 첫 번째로 넘어온 뒤 제대로 죽 쒀놨군? 어쨌든, 그게 말이지……."
그렇게 말꼬리를 흘리던 놈은, 별안간 아크로바틱하게 몸을 뒤틀더니, 이현욱의 반대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一안 말해줄 거다! 큭큭! 난 간다!”
물론, 그 지점에도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단,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리빙 아머 몇 대와 ROK AMT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린 채 대기 중이었다.
‘역시, 순순히 포기할 놈이 아니다!’
이현욱은 놈의 다리를 향해서 페일노트를 쏘았다.
쉭一 쉭一
그러나 놈의 등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손바닥이 튀어나왔다. 마치 날개처럼 생겼는데, 그것이 페일노트를 막아냈다.
푹一 푹一
그리고 상처 부위에서 핏줄이 튀어나오더니 페일노트를 옭아매 버렸다.
“하! 그 날파리 같은 화살을, 내가 안 막아 봤을 것 같냐?”
이어서 제 검은색 코트를 열어젖혔다.
“자, 서프라이즈一!”
그러자 놈의 양쪽 옆구리에서부터 일렁임이 일어나더니 수백 마리의 박쥐 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졌다.
끼릿一끼릿一끼릿一끼릿一
- 붉은 칼날 박쥐 (LV:61)
그것들의 발톱은 낫처럼 날카로웠기에, 그 범위에 서 있던 리빙 아머와 플레이어들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끄아아아——!”
그것들이 하늘로 비상하여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는데, 붉은 칼날 박쥐들의 입에서 웬 벌레 떼가 흡사 검은 연기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왜애애애——
일명 뱀파이어 플라이, 블러드 로드가 제 권속들의 몸 안에 배양하는 흡혈충이었다.
그것들이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어서 현욱의 강철 무기 세례를 막아냈다.
‘저게 퍼지게 되면 귀찮아진다.’
이현욱은 바닥을 박차고 나가며, 놈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가 늘어나며 놈의 몸을 휘감았다.
“一윽! 이건, 글레이프니르잖아?”
한 번 적중당하면 무려 10분이나 무력화되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강력한 단점이 있었는데, 제3 자가 손을 쓸 경우, 아주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슥—
그때, 리카르도 올리베이라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손아귀가 올라오더니, 재빠르게 글레이프니르를 풀어버렸다.
- 그림자 흡혈귀 (LV:113)
그 기이한 존재는 유령 계열 권속으로, 주인의 그림자에 자생하는 것이었다.
“하, 나를 물로 보지 말라고, 이 자식아!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온갖 괴상망측한 싸움을 해봤다! 거의 모든 수에 대비되어 있단 말씀이다!”
그는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제 손목을 그었다.
퍽—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그것들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나누어지며 수십 개의 덩어리로 뭉치더니, 각기 어떤 모양을 형성했다.
- 블러드 로드의 정예 웨어울프 (LV:99)
그 숫자가 총 43마리였고, 앞서서 ‘현재’의 블러드 로드의 권속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였다.
이런 식으로, 미래의 블러드 로드는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마수 떼거리를 기습적으로 소환하곤 했다.
그래서 네크로맨서가 빌런의 군단이라면,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는 특공대라고 불리곤 했었다.
하지만…….
“……음, 그게 다는 아니겠지?”
이현욱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그에게는 그리 큰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전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게 다라면 저항은 그만두는 게 좋겠는데…… 피차 피곤해질 필요는 없잖아?”
이어서 놈은, 이현욱의 무시에 반박을 제시하듯, 아이템을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이 시대의 강철대제, 네가 어떤 변수로 어떻게 강해졌든, 이 세상에서는 8년이라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건 사실, 완벽하게 맞는 말이었다.
'그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이현욱은 ‘비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이어서 리카르도 올리베이라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웬 금속 구체였는데, 이현욱은 그걸 알아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템 정보]
- 이름 : 휴면 상태의 무닌(전설)
- 효과 : 마나를 불어넣으면 작동합니다.
무려 ‘후긴’의 짝인 ‘무닌’이었고, 이현욱은 저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더 꺼내 봐.”
“……뭐?”
"그것 말고도 더 있잖아. 어디 한 번 다 꺼내 봐.”
이현욱은 놈이 쓰던 무기 중에서 쓸만한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이어서 그것들을 앞으로 어떻게 쓸지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쇼핑하는 기분일지도 몰랐다.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쓸만한 아이템을 하나 더 꺼냈다.
그것은 웬 안경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호루스의 렌즈(장인)
- 효과 : 호루스의 눈 1번 조각의 능력을 30% 강화합니다.
이 아이템은 호루스의 눈 조각 1번을 마법공학으로 가공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현욱이 평소에 활용하는 것처럼, 무닌과 호루스의 눈을 조합하여 정보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걸 바탕으로 권속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그게 놈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뭔데 계속 내 아이템을 논하는 거냐?”
이현욱으로서는 두 아이템 모두 군침이 돌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손뼉까지 치자 리카르도 올리베이라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나, 날 그렇게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내가 병든 가젤인 줄 아는 거냐? 저 잡스러운 애들 다 치우고, 나랑 1대1로 붙으면 네가 바로 그 처지라는 걸 깨닫게 해주마!”
이현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뒤로 뻗었다. 그곳에는, 용아병들이 모여 있었다.
"다 꺼냈으면, 이제는…… 내 턴이다.”
이현욱의 손짓에 용아병들이 등에 메고 있던 철제 상자를 열어젖힌 뒤, 그 안에 든 창과 방패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물건들에서 풍겨오는 격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네크로맨서와 전투 때 깜짝 카드로 꺼내 들려고 했던 거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세인트 드래곤 스피어(장인)
[아이템 정보]
- 이름 : 세인트 드래곤 쉴드(장인)
이현욱은 현재 무려 3마리의 드래곤 시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라퓨타에서는 그 드래곤을 재료로 한 아이템 개발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그 프로토타입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특유의 격을 감당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었기에, 아직 ‘상용화’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건 리빙 아머나 아이언 골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이 저 아이템들을 쥐는 순간, 스파크가 터지며 리타이어 되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이빨을 근본으로 하는 용아병만은 그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게 바로 용아병이라는 권속을 보유할 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치지지지——
그 녀석들이 드래곤 무기를 쥐자 손아귀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었으나, 이내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렇게, 드래곤의 뼈와 비늘로 만들어진 창과 방패로 무장한 용아병들이 블러드 로드의 최정예 권속들을 향해 진격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8년 전 놈들이다! 싹 다 쓸어버려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리카르도 올리베이라 역시 제 권속들에게 과감하게 돌격을 명령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현욱을 이겨보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시선을 끈 뒤, 탈출을 시도할 요량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무려 드래곤 무기로 무장한 용아병이다. 애초에 근본이 격이 다른 생명체의 신체 일부인 만큼 정면충돌로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크아아아——!
양 측의 괴물들이 난폭하게 내달려서 한대 뒤엉켰다.
퍼—버—버—버——!
그러나 결국 먼저 나동그라지는 건 블러드 로드의 권속인 웨어울프들이었다.
그것들은 드래곤의 늑골 뼈로 만든 창에 단 한 번 찔리기만 해도 사실상 리타이어 되었다.
"뭐, 뭐야! 내 최정예 웨어울프들이 단 한 방에……."
그 이유는 ‘세인트 드래곤 스피어’의 창대가 강화도의 신목 ‘신단수’의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즉, 아주 짙은 신성력이 붙은바, 웬만한 언데드 계열은 버틸 수 없는 일격이 된 것이었다.
"그 무기들은 애초에 너 같은 냄새 나는 언데드들을 잡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다.”
이현욱은 오로지 네크로맨서를 잡기 위해서 수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비록 그 과정이 무의미해졌으나 이처럼 쓸모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단 몇 초 만에 자신의 권속이 전멸했으니, 올리베이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현욱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말한 대로 1대1로 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도망갈 궁리를 하지 말고 어디 한 번 도전해 봐.”
그는 구태여 ‘성검’ 효과를 쓰지 않고 놈에게 다가갔다.
왜냐하면, 놈을 생포할 생각이었는데, 성검으로 자칫 잘못 찔렀다가는, 즉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대1 대결을 시도하는 것도, 놈을 생포하기 위함이었다.
“……이 새끼가 나를 대체 어떻게 보고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더니, 놈이 먼저 달려들며 양손을 짐승의 발톱처럼 변형시켰다.
아마도 이현욱이 근접 전투에서는 무력하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전생의 이현욱은 분명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쯧, 아직도 모르겠나?”
이현욱은 달려드는 놈을 향해서 가볍게 잽을 날렸다.
쩍—
그의 잽一그것도 건틀렛 '아르게틀람’이 놈의 코를 부숴버렸다.
“컥!”
그는 코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치다가 이현욱이 앞으로 접근하자, 눈을 번뜩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브라질리언 킥’을 날렸다. 애초에 주춤거리며 틈을 내준 건 기만술이었다.
턱!
그러나 이현욱이 팔뚝으로 머리를 가리며 가볍게 가드한 뒤, 놈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쩌저저저——
그의 손에서 금속이 생성되더니, 마치 뱀처럼 놈의 다리를 타고 오르며 한쪽 다리를 칭칭 휘감았다.
“큭, 무슨—"
훙!
"으아아아—”
이현욱이 손을 휘것자, 마치 철퇴를 휘두르듯이, 놈의 몸이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내리꽂혔다.
뻑——!
“컥!”
뻑——!
그리고 그런 장면이 무려 8번이나 반복되었고, 놈이 내리박힌 땅이 움푹 패였다.
"흐어어……."
제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날지라도, 입에서 절로 바람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묻는다.”
이현욱은 놈의 사지를 신성력이 담긴 쇠사슬로 묶은 뒤, 놈의 양쪽 관자놀이에 페일노트를 가져대었다.
"왜 우리 차원으로 넘어온 거냐?”
이제는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이거늘, 리카르도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억지스러운 여유를 자아냈다.
“큭一 개 같네…… 내가 두 번째로 넘어와서, 내가 먹을 게 많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망해버리다니……."
이현욱이 한숨을 내쉬며 왼손 검지를 까딱하자, 두 자루의 페일노트가 빙글빙글 돌면서 놈의 관자놀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가가가一 아,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이현욱의 손짓에, 드릴 같이 돌던 페일노트가 멈춰 섰고, 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一 애, 애초에 플레이어가 위험한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뭐겠어? 다 퀘스트야! 그 좆 같은 퀘스트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개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거라고!”
“……그 퀘스트 이름이 초월 퀘스트인가?”
"너,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그런데 그거 싹 다 말해주면…… 나는 살려주는 거냐?”
"그거야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에 따라 다를 테니까, 한 번 노력해봐.”
"그래? 그러면 네가 모르는 중요한 걸 하나 말해주고 싶은데, 저기 저쪽 좀 봐줄래?”
그놈은 피식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고, 이현욱은 고개를 돌리는 대신, 후긴의 눈으로 그쪽을 살폈다.
그곳에 있는 건, 네크로맨서가 들어있는 구 형태의 캡슐이었는데…… 그 위에 이질적인 일렁임이 하나 얹혀 있었다.
웬 그림자였다.
까득— 까득—
그리고 정확히는, 리카르도 올리베이라의 권속인 ‘그림자 흡혈귀’였다.
그것이 아주 은밀하게, 캡슐의 경첩을 뜯어내고 있었다.
쿵一
결국, 캡슐의 문이 열렸다.
쏴아아…….
그 안에서 웬 액체가 쏟아져 내리더니, 한 소년이 휩쓸리듯 흘러나왔다.
그 녀석이 바로 네크로맨서였다.
'아, 이러면…….'
저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는 CCTV 화면상으로만 본 것이기에 ‘차원 이동자’ 소환 매커니즘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맨눈으로 보았고…….
- (!)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2번 : 차원 이동자 살해>의 세 번째 분기점에 도달했습니다.
- 주의! 전생의 악연一세 번째 차원 이동자가 등장할 예정입니다. 그를 처치하십시오!
“욱—"
결국, 그 녀석이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큭큭一 역시, 우리의 소환 조건은 이 차원의 우리가 너와의 접촉하는 게 맞지? 네가 윌리엄 버나드를 죽였다는 저 모글레이 덕에 알아봐서 혹시나 했는데, 운이 좋군! 으흐흐一”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툭툭 건드려 보였다.
‘호루스의 눈…….'
그것으로 이현욱의 모글레이의 정보를 확인했고, 자신의 차원에서 윌리엄 버나드가 가지고 온 물건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으흐흐一 네크로맨서가 넘어오는 걸 원치는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비록 나는 너한테 발렸지만, 네크로맨서는 아닐 거다. 그 자식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니까 말이야.”
그 말에, 이현욱은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주 잘 안다.”
"뭐?"
그 끔찍한 괴물을 가장 많이 상대했고, 끝내 이기지 못하고 짓밟혔던 당사자가 이현욱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놈과의 전투를 목표로 삼고, 최대한 과할 정도로 준비했다.’
이현욱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떠 있는 모글레이를 끌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성검 효과를 부여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너희 같은 냄새 나는 언데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다고……”
이현욱이 왼손을 들어 올리자 머리 위로 대여섯 대의 AD-2이 지나가면서 아공간을 개방, 무언가를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자유 낙하하여 성수를 머금은 진흙밭에 내리박혔다.
푹! 푹! 푹! 푹!
긴 장대 끝에 웬 거대한 세계수의 잎사귀가 매달린 깃발처럼 생긴 아이템이었는데, 그곳에서 백색의 빛이 번져 나오며 일대를 물들였다.
- 해당 지역에 <신목의 영역 : 3단계>이 적용됩니다.
* 모든 ‘어둠 계열’ 속성의 몬스터가 약화합니다. (-25%)
* 모든 ‘신성 계열’ 속성의 데미지가 상승합니다. (+35%)
그런 효과를 지닌 아이템이 무려 24개로, 이 공간 전체를 성소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이 역시도 네크로맨서를 공략할 때를 위해서 준비한 작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성검 모글레이가 하늘 높이 치솟아서,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이 수평으로 누웠다.
'……언데드를 소환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것이 겨눈 것은, 허공에서 생성 중인 블랙 게이트一그리고 그곳에서 튀어나올 전생의 네크로맨서였다.
'그리고 단 한 방이면 된다.’
이현욱은 범을 기다리는 포수처럼, 모든 덫을 깔고, 숨을 죽인 채, 단 한 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