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두 번째 격돌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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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람들이 오트리스산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반격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었다.
-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킬 더 몬스터>의 MC들 역시 그 장면을 생중계하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 이번에도 또 스틸레인, 그가 해냈습니다.
- 예,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 이 상황, 이 감정,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충격적이네요.
약 십여 분 전, 제1 전장에서 이현욱의 모글레이 투하로 거인 성채의 마법 방어막이 깨졌다.
그 직후, 최정철의 ‘세미 아마겟돈’이 작열하여 다리가 묶인 티탄들을 마치 볼링공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수십 마리의 티탄들이 빈사 상태에 빠졌고, 바인가드가 조종하는 ‘그린 웨이브’가 헐렁해진 놈들의 몸뚱이를 완전히 잠식해버렸다.
즉,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바……
"—지금이다! 전 병력 돌격한다!”
지금까지 당하고만 있었던 플레이어들이 맹렬하게 전진하여 반쯤 죽어 있는 티탄들에게, 화풀이처럼 온갖 스킬을 퍼부어대었다.
그렇게 가장자리부터 한 마리씩, 한 마리씩, 15m에 이르는 티탄들이 죽은 나무처럼 무너져내렸다.
이어서 그곳에서 십여 킬로미터 제2 전장 역시 비슷한 구도로 흘러갔다.
- 아! 그러면 이제 제2 전장 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2 전장에 있는 특별 특파원 조쉬 폴 씨, 들리십니까?
<킬 더 몬스터> MC의 물음에, 화면이 제2 전장 쪽으로 넘어가며 선글라스를 쓴 남자, 조쉬 폴의 모습이 나왔다.
"아, 오케이—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은 제2 전장입니다.”
- 지금 제1 전장은 승기를 확실하게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으하하— 아주 재밌게 흘러갑니다. 한 1분 전까지만 해도 탈탈 털려서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스틸레인이 등장한 이후, 여기에서도 저 좆 같은 넝쿨들이 역으로 거인들을 속박했습니다!”
그는 전문 리포터가 아닌 만큼, 시선 처리를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안타깝게도 마법 방어막을 뚫을 방법이 없는 것 같네요. 이봐요, 스틸레인— 거기 끝내고 빨리 여기로도 좀 와줘요!”
그런데 그때였다.
- 주의! 해당 지역에 ‘헤카톤케이레스의 권능—메테오’가 시작됩니다!
"응? 이건 또 뭐야?"
- 조쉬, 무슨 일이죠?
"어, 그…… 젠장, 뭐라고 설명해야겠는지 모르겠으니까, 직접 보시죠.”
그때, 카메라의 포커스가 하늘로 올라갔다.
- 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겁니까?
MC의 물음처럼 하늘에 여러 개의 구멍이 우후죽순 뚫리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건 검은색의 포탈들이었다.
"오, 누군가 엄청난 일을 벌이려는 것 같은데…… 저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내 그 안에서부터 거대한 흑색 암석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그건 운석, 아니 유성우라고 볼 수 있었다.
콰—과—과—과—과——!
그것들이 거인 성채에 낙하하여 마법 방어막에 부딪히자, 마치 화학 반응이 일어나듯 기묘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법 방어막이 치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뭔지 모르겠지만, 대박이다!”
"좋아, 우리도 가서 쓸어버리자—!”
제2 전장에 대기 중이던 플레이어들은 그 장면에 환호성을 내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저 운석들이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뒤쪽 언덕 위, 한 장신의 마법사 플레이어가 거대한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지휘에 따라서 흑색의 운석들이 다시 허공으로 치솟는 게 아닌가?
“오— 근래 신비주의를 고수하시던 중력 마법사가 권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군요? 으하하— 진짜 볼거리가 넘치는 하루입니다!"
이성윤, 그가 특정 지역의 중력을 역전시켜서 ‘운석’들을 다시 상승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올라간 것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또 한 번, 유성우가 쏟아집니다!”
그는 심지어, 세세한 중력 조절을 통해서 그 운석들의 궤도를 수정— 티탄 한 마리 한 마리의 머리통에 적중시켰다.
퍼—버—버—버——!
“……여, 역시 중력 마법사다!”
"젠장, 활약상이 뜸에서 까먹고 있었는데, 그는 진짜 최고야!”
그렇게 제2 전장 거인 성채에도 인류의 깃발을 내리꽂을 수 있었다.
- ……제1 전장에서 145마리를, 제2 전장에서 131마리를 사냥했다고 합니다! 앞서서 대회전에서 잡은 숫자의 2배에 이르는 숫자를 더욱 쉽게 처리했습니다. 이건 전부 스틸레인, 그의 업적이라도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 시각, 이현욱은 이미 거인 성채를 점령한 뒤, 그 위에 서서 거인들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 중 한 마리 목에 이현욱의 모글레이가 박혀 있었다. 그놈은 이 성채에서 가장 강력한 엘리트 몬스터였는데, 다른 티탄들과 마찬가지로 몸뚱이 절반이 그린 웨이브에 뒤엉켜 있었다.
그 속박 덕분에 무려 209레벨의 엘리트 몬스터임에도 단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던 것이었다.
‘보스 몬스터인 네임드 티탄, 아틀라스와 크로노스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거인 성채에 있을 거다.’
그놈들은 지금처럼 쉽게 쓰러뜨릴 수 없는바, 이성윤 쪽과 합류하여 함께 공략해야 할 것이었다.
그때, 이현욱의 마나 메신저가 울렸다.
- 칙— 아아— 들려요?
이 목소리는 에밀리아 뮐러였다.
"네, 말씀하세요.”
- 지금 ‘밸브 설치’ 끝났으니까, 언제든지 신호해주세요.
이현욱은 다크 엘프 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몇 가지를 부탁해 놓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전혀 다른 곳에 가서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 오케이, 피터가 마나 메신저 앞에서 항시 대기 중이니까 언제든지 불러요.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조금 힘드시더라도 신성 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주세요.”
- 그건 제가 더 전문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쿵—
그때, 마지막 티탄 호플리테스가 쓰러지며 곳곳에서 승리의 기쁨이 담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이겼다!”
그 함성은 이내, 스틸레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크— 나는 계속 믿고 있었다고, 스틸레인—!”
"저는 의심했지만, 이제는 무조건 믿겠습니다!”
"역시 그가 있으면 무조건 승리한다!”
하지만 이현욱은 아직 안심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는 후긴을 하늘에 띄운 채 티탄의 시체가 너부러진 전장을 유심히 살폈다.
츠츠츠츠——
바닥, 그린 웨이브 사이로 모래들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걸 조종하는 건 모래성의 지배라고 불리는 빌런, 코너 오닐이었다.
그는 오메가팀으로, 알랭 지암과 같은 <그랑피네트> 소속의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랭 지암을 따라가지 않고 여전히 전투에 참여 중인 것이었다.
그 지점을 일부 언론에서는 둘 사이에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이유는, 나를 노리려는 거다.’
이현욱이 그를 처리하지 않고 있는 건, 아직 명분이 없기도 하겠거니와 놈이 공격하는 순간을 역으로 노려서 세상에 ‘빌런’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킬 목적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티탄 부대, 다크 엘프 군단, 블랙 오크 군단까지, 표면적인 위험 요소는 전부 다 등장했다.
그러나 단 하나, 빌런들은 여전히 정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비록 내가 다크 엘프 왕국을 정복하면서 놈들의 계획을 망쳤다지만, 그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놈들로서는 지금 막지 않으면 이현욱을 멈출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 무조건 이 <티타노마키아> 안에서 최후의 카드를 꺼낼 것이었다.
그건 바로—
‘—네크로맨서…….'
이현욱은 놈과의 두 번째 만남을 예상하고, 준비 중이었다.
***
오트리스산 격전지에서 약 5km 떨어진 곳, 인류통합군에서 이탈한 플레이어들의 캠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한 방송국의 간이 스튜디오가 설치되었는데, 알랭 지암을 비롯한 일부 유명 플레이어들이 그 스튜디오에 앉아서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부터 <티타노마키아> 상황을 토의하고 해설해주는 중이었는데…….
"......."
지금은 다소 긴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스틸레인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알랭 지담을 포함한 패널들의 입이 닫혀서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
이 방송의 스텐스는 지금까지 스틸레인을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등장하여 전황을 한순간에 바꾸어 버리는 순간,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고,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MC가 홀로 해설을 도맡아야만 했다.
결국, 참다못한 MC가 알랭 지암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음…… 무슈 지암,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스틸레인이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가 다크 엘프 왕국을 정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사실일까요?”
"......."
“……저, 므슈 지암,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시죠.”
알랭 지암은 MC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
여기에서 끝까지 스틸레인을 물고 늘어지는 게 얼마나 추잡해 보일지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 역시 대번에 돌아서서 알랭 지암을 비난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까지만 하죠.”
"예?”
무릇, 도를 지나치는 시기와 질투는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한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스틸레인을 견제한 것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스틸레인이 해낼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펼친 것이었는데…….
"그런데 씨발, 다크 엘프 군단이 놈의 편을 들 줄이야…… 이건 완전히 상식 밖의 변수잖아!”
그는 속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입 밖으로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스튜디오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걷던 그가 문득 멈춰 서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응? 지금 누가 나를 불렀나?”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열이 올라서 환청을 들은 건가 싶은 순간—
- 므슈—
그건 환청이 아니었다.
저 멀리, 두 대의 천막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길함을 느끼며 양손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이대로 약간의 힘을 주면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분사될 것이었다.
- 므슈,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이쪽 천막 안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목소리는 들리고 있지 않았다. 즉, 공기를 매질로 움직이는 음파가 아니었다.
이건 특정 대상에게만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마법인 ‘텔레파시’였다.
"네놈, 누군데 나한테 몰래 접근하는 거냐?”
- 므슈, 남몰래 만날 일은 아주 중대하며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 마련이지요.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 텔레파시가 흘러나오는 천막을 열고 들어갔다.
이곳은 스튜디오와 이어지는 공간으로 방송 장비들을 보관하는 곳인 듯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후우우우——
한쪽 구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더니, 보라색 가면 쓴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므슈, 이걸 받으시지요.”
그가 내민 건 웬 편지지였다.
- ‘검은 초대장’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게 뭐지?”
[아이템 정보]
- 이름 : 검은 초대장
- 효과 : 알 수 없음
“므슈, 우리 조직에서 당신을 초빙하고 싶습니다. 그곳에 마나를 불어 넣으면 초대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뭐? 무슨 조직을 말하는 건가?”
그러나 상대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고, 그 순간 알랭 지암은 그 조직의 정체를 눈치챘다.
"설마…… 스틸레인이 폭로한 그 조직인가?”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조금 다르죠. 우리가 어떤 대의를 품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들어보시면, 므슈 지암께서도 결코 부정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알랭 지암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
아무리 스틸레인이 싫다고 해도, 아니 증오한다고 해도 그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친놈들하고 함부로 엮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가면 쓴 사내가 한 발자국 다가오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므슈— 우리는 지금과 같은 불안한 구조의 사회가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주도하는 세계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 순간, 알랭 지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그의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푸투레>라는 사조직을 운영하는 것도 플레이어가 주도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플레이어는 사실상 신진 계급이었으나, 여전히 절대다수는 ‘일반인’이므로 플레이어의 지배를 제한하고 견제한 식의 법안과 정책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기조가 인류의 안전을 망치고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종종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에는 다소 폭력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모든 체제 변화가 그러하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므슈?”
"음…… 좀 흥미로운 말이군.”
"예, 므슈도 이 의견에 공감하시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 알랭 지암은 이 가면 쓴 사내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호기심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상적인 미래관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단연 스틸레인이랍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나? 며칠 전 드레스덴에서처럼 말이야.”
그 말에, 가면의 사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랬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뭐? 이번이라면 또 언제…… 당연히 전투 중일 때 뒤를 치려는 거군?”
가면 너머로 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므슈, 저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놈이, 어떤 방식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그물을 짤 겁니다. 자, 제 말에 동의하시면 그 초대장에 마나를 불어 넣으시지요.”
그 말에, 알랭 지암은 잠깐 고민하다가 초대장에 마나를 부여했다.
“빌런 퀘스트라……."
***
- 1번 빅토리 플래그를 점령했습니다!
*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0%)
- 2번 빅토리 플래그를 점령했습니다!
*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0%)
제1 전장과 제2 전장의 빅토리 플래그 점령이 끝나면서, 티타노마키아에 참전 중인 모든 플레이어에게 버프 효과가 부여되었다.
제1 전장의 한 성채 위, 각 그룹의 지휘관들이 모여서 향후 작전을 이야기 중이었다.
“……우선, 이 지점에서 제2 전장 쪽 플레이어들과 합류한 뒤 제3 전장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그 작전의 설계는 단연 이현욱이 주도 중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크 엘프의 정예부대인 ‘바인가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 모글레이 투하를 차단했던 아이템 무력화 사슬을 우리가 쓸 수 있는바, 티탄들의 투창 폭격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설명에 지휘관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만 된다면 정말 완벽하겠군.”
“……스틸레인, 당신만 믿겠소.”
이현욱은 지휘관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의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도 잠시나마 이현욱을 의심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의심 뒤에 다시 확신을 얻었을 때, 믿음은 보다 짙어지기 마련이다.
이들은 이제 이현욱의 무기였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이현욱의 말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의 그룹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마나 메신저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아니, 너희는 아무 데도 못 가.”
웬 목소리가 끼어들며 찬물을 끼얹었고,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게 무슨 소리요?”
그렇게 말한 이는 진저 스타일의 젊은 백인 남자, 코너 오닐이었다.
“으으으— 너희는, 다 같이 여기에서 묻혀야 해.”
그는 양손을 하늘로 뻗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손바닥을 펼치며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그 무덤을 만들어줄게—!”
그 순간— 그들이 밟고 서 있던 거인 성채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모두가 중심을 잃고 흩어졌다.
“큭!"
"젠장—”
이내 사방에서 모래가 치솟더니, 거대한 손이 되어서…… 이현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퍼어어어——!
"헉! 스틸레인이……."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 모두 눈치챘다.
또 한 번 악의 조직의 암살 시도가 벌어진 것이었다.
"아, 안 돼! 그를 구해야 해!”
콰과과과과——!
그러나 사방에서 모래 기둥이 치솟으며, 마치 드릴처럼 내리꽂히는 터에 그들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장님—!"
김세희가 바람을 일으켜서 모래를 밀어내며 이현욱의 모습을 쫓았으나, 시야를 가득 메운 모래 먼지 탓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꽈드드드——
"으하하— 스틸레인, 드디어 잡았다! 그 모글레이를 꺼내서 휘두를 틈도 없이, 내가 꽉꽉 눌러서 잡았으니까 넌 끝장이야!”
오로지 코너 오닐의 비릿한 목소리만이 울렸다.
놈은 자신의 몸 주변에 모래를 수십 겹으로 두른 채 허공에 떠 있었는데, 김세희가 그쪽으로 바람의 칼날을 날렸으나 몇 개 뚫지 못했다.
"이 ‘모래 갑옷’은 그딴 식으로는 절대로 못 뚫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
이어서 놈이 양손을 펼쳤다가 짝— 하고 합장을 하자 두 개의 거대한 모래 손이 형성되더니…….
콰—앙——!
마치 벌레를 잡듯 손바닥을 강하게 마주쳤는데, 역시나 이현욱을 향한 공격이었다.
그렇게 무려 3개의 모래 손아귀가 이현욱을 움켜쥔 것이었다.
"후— 아무도 못 해낸 스틸레인 제압을 내가 한 거야? 으흐흐— 이거야 원, 그 잘난 네크로맨서가 헛걸음하게 만들어 버렸잖아?”
그리고 그가 양손을 휘저을 때마다 그가 등에 멘 항아리, 식양(息壞)에서 모래가 뿜어져 나오며, 이현욱을 잡아챈 3개의 손을 칭칭 휘감았다.
"내 모래 구속은 티탄도 풀지 못했던 거 알지? 으흐흐— 절대로 못 빠져나올 거다.”
그는 기고만장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퓩—
"......응?"
그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는데, 그건 오묘한 통증이었다.
그 순간,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컥—"
고개를 천천히 내리니…… 왼쪽 가슴, 심장에 웬 막대기가 박혀 있었다.
그건 은색의 화살이었다.
"어, 어떻게……."
이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몸 주변에 수천 겹의 모래 장막을 두르는 ‘모래 갑옷’은 웬만한 공격으로는 뚫을 수 없었다.
물론, 모글레이 같은 무식한 일격을 막아낼 재간은 없겠지만, 이깟 화살쯤은 백 발, 천 발을 쏘더라도 단 한 겹의 모래 장막도 못 벗겨 낼 것이었다.
"어…… 트, 틈?”
그제야, 그는 자신의 모래 갑옷에 마치 드릴로 뚫은 것처럼 아주 구멍이 있음을 확인했다.
"어? 대체 왜……."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래 통제 능력은 이런 틈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시시시시——
그는 붉게 충혈되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고, 자신의 모래 일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포착했다.
그곳은, 스틸레인이 잡혀 있는 3개의 손아귀 쪽…….
시시시시——
그가, 모래 구속을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있었다.
"마, 마, 말도…… 안……."
그의 걸음걸음마다 코너 오닐의 통제를 받는 모래들이 상하좌우로 흩어지며 길을 열었다.
"어, 어떻게 네, 네놈이 내 모래를……."
그리고 그 모래를 움직이는 힘은 이현욱의 등 뒤에 떠 있는 웬 구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젠장, 따, 땅의 정령이잖아……."
A등급, 아니, 그 이상의 땅의 정령이 이현욱을 따르고 있었다.
「쯧쯧— 영 좆밥이구나, 너? 그렇게 디테일이 없어서야 모래성이나 쌓을 수 있겠냐?」
그렇다. 이현욱은 이때를 위해서, 코너 오닐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마루의 정체를 숨겨두고 있던 것이었다.
“으으으——!"
코너 오닐은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모래를 조종, 이현욱을 휩쓸어버리려고 했으나, 마루의 방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몸이 멀쩡했다면, A등급 땅의 정령보다 강한 모래 통제 능력을 발휘했겠지만, 지금은 심장에 화살이 박혀 있었으니...…
그렇게, 모래의 흐름 곳곳에 구멍이 뚫리는 건 막지 못했고, 그 사이로 이현욱의 강철 무기들이 종횡무진 통과했다.
푹—푹—푹—푹——
그리고 놈의 몸뚱이 곳곳에 처박혔다.
"컥—"
결국, 온 세상을 뒤덮었던 모래 장막이 중력 방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현욱이 손짓하자, 코너 오닐의 몸뚱이에 박힌 금속들이 고리로 변하며 사지에 휘감겼고, 그가 다시 손짓하자 놈이 개처럼 끌려왔다.
“그래서……."
그가 코너 오닐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같은 들러리 말고, 진짜는 어디에 있나?”
“뭐? 그게, 무슨……."
그때—
- 주의! 해당 지역에 ‘죽음 도래지’가 선포되었습니다!
“……때마침 왔군.”
그러한 시스템 메시지를 발견한 뒤, 후긴의 시점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일대의 지면이 검은 진창으로 변한 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꾸득! 꾸득!
그게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죽음의 통제자의 등장이다.’
이현욱은 코너 오닐의 목을 꺾은 뒤, 공중으로 자신의 몸을 띄우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꾸득! 꾸득!
일대 수 킬로미터가 죽음의 힘으로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 위에 쓰러져있던 티탄의 시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어서 와라……."
지금 이 순간, 그가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내가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해두었으니……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말았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