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반란, 반격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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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오트리스산, 그곳의 산등성이를 따라서 잿빛의 성곽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는 고대 그리스 병사 복장을 한 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언뜻 보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를 재현한 듯한 풍경이다.
그러나 성곽 바로 아래에 우겨져 있는 녹음이 수풀이 아니라 나무, 그러니까 숲이라는 걸 눈치챈다면, 그제야 그 성곽의 크기가 얼마나 장대한지를 직시하게 된다.
해발 고도 1,728m의 오트리스산이 언뜻 동네 뒷산처럼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성채와 병사들…….
그곳이 바로 티탄들의 본거지인 ‘거인 성채’였으며, 플레이어들이 점령해야만 하는 4개의 ‘빅토리 플래그’ 중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일명 ‘제1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3km 떨어진 한 구릉지에 일명 ‘인류통합군’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一!”
총 1,981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훨씬 더 실감이 안 되네. 어떻게 저렇게 큰 거야?”
“하一 젠장, 솔직히 좀 겁난다.”
이렇듯, 아직 전투도 치르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사기는 확연하게 꺾인 상태였다.
그럴 것이, 무려 3km나 떨어져 있거늘, 불과 몇십 미터 거리처럼 보일 정도로 적진의 모든 것이 실로 경악스러운 크기였으니 기가 절로 죽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저 말도 안 되는 걸 들이받아야 한다는 거야.”
“하一 솔직히, 괜히 이쪽에 참여했나 싶다. 그냥 알랭 지암 쪽 따라서 나갈 걸 그랬나? 아니, 지금이라도 몰래 빠질까?”
앞서서, 많은 플레이어 그룹이 스틸레인의 지휘를 거부하고 이번 공선전 참전을 유보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거인 성채’를 공격하는 게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절반 이상의 플레이어가 스틸레인을 비롯한 수많은 영웅을 필두로 의기를 품고, 이렇게 진격해 왔지만…….
저것을 실제로 마주하자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날 선 표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본능이 경고 중이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게 무너지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 저게 절벽이지 무슨 성벽이야.”
"그리고 이제는 스틸레인의 모글레이 투하도 무용지물이 됐으니까 무너뜨릴 방법도 딱히 없어 보이고……."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웬 거대한 불덩이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후우우우——
"제13 집단 마법 발사 완료一!”
"제14 집단 마법 발사 준비一!”
한쪽,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마치 전열보병(戰列步兵) 머스킷 소총수처럼 대열을 바꾸며 발사一시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쏘아 보낸 불덩이는 한참을 체공한 뒤, 마침내 티탄의 성채에 적중했다.
콰一앙——!
하지만.......
"......큰 타격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실망한 기색도 없었는데…… 이 장면이 벌써 6시간째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계속하는 게 맞는 거야?”
이들은 성벽과 마주한 직후부터 적진을 향해 마나 폭격을 날리고 있었다.
불, 물, 번개 등 온갖 속성의 ‘대규모 광역 마법’이 드높은 상공에 조형된 뒤, 링크 마법이나 바람의 정령술사의 도움을 받아서 훨씬 더 먼 거리로 날려 보낸다.
그리하여 마치 공성전에 쓰이는 ‘캐터필드’ 공격처럼, 먼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성벽을 두드려대고 있는 것이었다.
쾅! 쾅! 쾅! 쾅!
"젠장, 조금도 안 먹힙니다.”
그러나 저 무식한 크기의 성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너머에 서 있는 티탄 호플리테스들도 이제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무의미한 공격에 가장 회의적인 건 역시나 마법사 플레이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분석가 플레이어들이 관측하기에는 이제야 36분의 1 정도 깎았답니다."
그 광역 마법 공격을 지휘하던 네덜란드의 한 길드 마스터는 부관의 보고에 땀을 닦아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러면 이런 짓을 몇 날 며칠은 더 해야지 성벽의 방어막이 깨진다는 거잖아?”
"예, 그리고 그전에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골병이 나서 죽을 겁니다. 지금도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아우성 중입니다. 이대로면 오늘 내에 마나 탈진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본디, 성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며, 전쟁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정통적인 공성전 방식은 공격이 아니라 포위한 채로 성의 물자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인 성채를 제대로 포위하고 있다고 한들, 절대로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전쟁 퀘스트>의 ‘목표’ 때문이었다.
1) ‘빅토리 플래그’ 총 4개를 168시간 이내에 1시간 이상 확보 (진행 중)
- 주의! ‘1번’ 목표 실패 시 ‘티탄’들의 사기가 크게 치솟으며 전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37시간, 5일 정도뿐이고……."
그리고 총 4곳을 점령해야만 하거늘, 지금은 화력 부족으로 단 2곳을 공격 중이었다.
한편, 인류통합군이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에도 알랭 지암을 비롯한 ‘공성전무용론’을 펼치는 이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지금 이 장면을 중계하며 신랄하게 비판 중이었다.
- ……이것 좀 보십시오, 결국은 저희 쪽 의견이 들어맞았다는 게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프랑스의 한 방송에 출연해서, 공성전을 라이브로 지켜보면서 해설 중이었다.
- 벌써 6시간 째죠. 총력을 기울여서 공격하고 있지만,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한 마리의 티탄도 죽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 그래도 아직 ‘아크메이지’ 최정철의 '세미 아마겟돈’이 사용되지 않는 걸 볼 때, 스틸레인이 일부러 어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이 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MC의 질문에, 알랭 지암은 냉소를 머금었다.
- 그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4곳의 빅토리 플래그를 어떻게 다 뚫겠습니까? 미스터 최의 새미 아마겟돈 쿨타임은 24시간 정도인 걸로 알려져 있죠. 그리고 저희 <그랑피네트> 길드의 분석 결과 그걸로도 거인 성채의 방어막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한 1.9번은 쏴야 하죠.
- 아, 그랑피네트의 분석팀은 정확하기로 유명하죠. 예, 생각보다 암담한 상황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감에도 이 작전의 핵심 인물인 ‘스틸레인’이 단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있다는 점 역시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 그 지점을, 알랭 지암이 물고 늘어졌다.
- ……지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처럼 성벽을 두드려대는 데 가장 적합한 능력을 지닌 자가 스틸레인 아닙니까?
- 그렇죠. 그가 강철 무기를 쏘아 보내는 게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게, 조금 이상하다는 의견들이 속속히 나오고 있긴 합니다.
- 제 생각에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모글레이 투하가 막히게 되자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합니다.
- 그 말은…… 스틸레인이 지휘관 회의 때 숨겨둔 전략이 있다고 말했다는데, 무슈 지암께서는 그걸 안 믿으시는 겁니까?
MC의 물음에 알랭 지암이 코웃음을 쳤다.
- 하하一 전략이라…… 솔직히 저는 안 믿습니다. 전 세계 앞에서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공략할 방법이 없어져 버렸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하기가 민망하니까 저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는 걸 겁니다.
- 아.......
- 그러니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는 자기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플레이어를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디,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은 다소 가정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한편, 오트리스산의 서북쪽 능선의 ‘제2 전장’에는 중력 마법사 이성윤을 비롯한 <즈믄나래> 길드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시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법 폭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성윤, 이제 슬슬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아?”
그렇게 묻는 건 <즈믄나래> 길드의 마스터 강서윤이었고,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길드원들 역시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이성윤은 그들은 함께 ‘히든 퀘스트’를 수행하여 ‘타르타로스 미궁’을 공략한 끝에 ‘헤카톤케이레스의 권능’이라는 이름의 대(對)티탄 병기를 얻었다.
그 무기야말로, 현재로서는 ‘거인 성채’의 두꺼운 마법 방어막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였다.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사용되도록 고안된 아이템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기의 사용권을 가진 이성윤이 좀처럼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동료들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제 5일 정도 남았는데, 더 시간을 끌다가는 그 지팡이의 쿨타임도 있고, 마지막에 시간에 쫓기게 될 거야, 알고 있지?”
이성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내 회의적인 말을 뱉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해.”
"그래서 대체 뭘 기다리는 건데?”
그가 이렇게 고민에 빠진 이유는, 어젯밤, 그가 전해 받은 이현욱의 ‘쪽지’ 때문이었다.
‘그는, 이 지팡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오직 가디언의 멤버들끼리 은밀하게 수행한 작전이었거늘, 이현욱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심지어…… 이성윤에게 아버지 같은 자였던 니콜라스 스틸의 죽음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전을 따라줄 경우, 니콜라스 스틸을 살해한 자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
그 지점에서 이성윤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했던 자신의 마음가짐이 누군가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역시, 초월급 오브젝트의 힘인 건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게 어떤 과거사의 진위까지 밝힐 수 있는 건……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그가 걱정하는 건, 이현욱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인가, 그것이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이현욱이라는 신예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가 ‘가디언 퀘스트’를 거절했으리라는 것도 예상하였다.
그런데 그의 활약상이 예상 범주를 넘고, 상식을 넘고,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강해져서 사실 상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1위는 이제 이현욱이었다.
그런 그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가디언으로서도 큰 숙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어떤 목적을 품고 있건……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의 인류는 그의 힘이 필요하다.’
부디 스틸레인이 진짜 영웅이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는 다름 아닌 가디언이었다.
이성윤은 지팡이를 움켜쥔 채, 때를 기다렸다.
***
어느 집단에서든 지도자는 존재한다. 그게 설령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는 노예들일지라도 말이다.
이현욱은 노예 거주지에 침투한 직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지도자에게 데려가달라고 했고, 그들은 이현욱을 ‘토굴’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저분이, 우리의 리더 같은 분입니다.”
길을 안내한 소년, 한스가 말했고, 이내 어두운 방 안에서 금발의 백인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왔다.
키가 꽤 켰지만, 다른 포로들과 다르지 않게 빼빼 마른 데다가 넝마를 걸친 아주 볼품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지도자다.’
그의 눈동자 그 누구보다 또렷했는데, 달리 말하자면 어떤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건 이곳에서 반드시 벗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일 터였다.
‘이곳에서 6년을 버텼는데 저런 눈이라면, 흔치 않다.’
그리고 그는 낯선 인간들의 방문 앞에 놀라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물론, 이 예상 밖의 상황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런데도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저는 <뢰베>길드의 제1 공략팀장 요아힘 볼코프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과거의 신분으로 소개하는 걸 볼 때 이 비루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뢰베>길드라면…….'
한때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길드 중 하나였으나 3차 웨이브에 총력 대응을 하다가 베를린과 함께 몰락한 길드의 이름이었다.
그 길드의 제1 공략팀장이었다면, 그 당시 못해도 60~70레벨은 되었을 것이었다.
즉,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전력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이현욱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악수하고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조잡한 나무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 앉으시지요. 그래도 이게 여기에서는 가장 편한 의자입니다.”
그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고, 이현욱이 의자에 앉자 그가 맡은 편에 앉았다.
"그러니까…… 저희를 구하려고 외국에서 오셨다는 거죠. 그것도 한국에서요.”
이 방에는 요하임 볼코프 외에 4명의 남녀가 더 있었다. 이들이 포로들의 지도자 그룹인 듯했는데, “한국?”이라면서 다소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예, 맞습니다.”
"왜 한국 쪽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위험한 일을 자처하셨을까요? 혹시…… 우리 정부 측에서 어떤 요청을 한 겁니까?”
"현재 유럽 전역에 전쟁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지원을 온 상태죠. 저 역시 그 지원군 중 한 명이고, 이 포로 구출 작전을 직접 기획했습니다.”
이현욱은 여기에서 자신이 ‘인류통합군’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 연합군을 이끌고 있다고 언급할까 하다가, 그게 오히려 신뢰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런 거창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이렇게 직접 잠입할 리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남자, 지금 나를 가늠하고 있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이현욱의 곳곳을 훑고 있었다. 아마도 믿고 탈출을 맡길 수 인물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난데없이, 그것도 6년 만에 나타나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자를 섣불리 믿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다크 엘프들이 폴리모프를 해서 떠보는 게 아닐지,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음,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그렇지만, 제가 세상 소식을 못 들은 지도 6년 전이라서, 이현욱 씨의 명성을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혹시……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리고 신뢰의 지표 중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능력이었기에, 그는 다소 노골적으로 레벨까지 물어보았다.
"저는 ‘레벨 외 성장 특성’으로 금속 통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말에, 포로 지도자들이 술렁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S등급은 선망의 대상으로, 일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영웅들이었다. 그런 존재가 구하러 왔다니, 느낌이 전혀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 S등급이시군요.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갇혀 있는 사이에 명성을 크게 얻으셨겠군요.”
이현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요아힘 볼코프는 S등급 정도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면접 통과입니까?”
"하하, 면접이라니요. 그저 저희를 구해주러 오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해주러 와서 평가부터 받는다는 게 기분 나쁠 만도 했으나, 이현욱으로서는 오히려 주도적으로 판단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래, 앞으로 무슨 변수가 터질지 모르거늘, 어리바리하다가 끝장나는 것보단 낫다.’
그때, 요하임 볼코프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어떻게 저희를 구출해주실 겁니까?”
이제야 본론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또렷하기만 했던 눈이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도 오랫동안 탈출을 꿈꿔왔지만, 솔직히……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6년이 지났죠.”
"이곳에 있는 사람만 적어도 4만 명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이 노약자입니다. 설령 외부로 이어지는 광역 포탈을 열더라도…… 저기 천장에 있는 식인 넝쿨들이 쏟아져 내려와서 우리의 앞길을 막을 겁니다. 그러니까…… 탈출이란 개념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현실이 요하임 볼코프의 심경을 불안하게 만든 듯했다.
"예, 탈출은 절대로 불가능하죠.”
이현욱 역시 그 지점을 인정했다.
“어, 그러면……."
"그래서 우리는…… 탈출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요하임 볼코프를 비롯한 포로 지도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은 이현욱의 다음 말에서 경악과 황당으로 변했다.
“……오히려 이 다크 엘프 왕국을 통째로 빼앗을 겁니다.”
"一뭐?”
"一예?”
하긴, 6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던 이들로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었다.
그래도 요하임 볼코프는 아무 말 없이 이현욱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했으나, 다른 지도자들은 성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싸우란 소리입니까?”
"젠장…… 기대한 내가 잘못인가……."
이에 이현욱은 앞으로의 계획을 짧게 설명했다.
현재, 다크 엘프 왕실과 손을 잡았고 그들 중 ‘숲의 정령술사’를 동원하여 물을 머금은 식물을 통제한다.
그리고 화염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 플레이어를 최대한 긁어모아서 그린 웨이브를 제압한 뒤, 이곳에서 농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권좌의 방에 있는 병력이 빠져나오면 저희가 잠입하여 대장군을 암살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들을 설득하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물들었다.
'역시, 쉽게 믿기 힘든 계획일 거다.’
그들은 ‘스틸레인’의 명성을 접할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플레이어의 힘을 6년 전 시점으로 판단할 테니…….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좋을까?’
그런데 그때…….
"헉! 헉! 요하임, 큰일 났어요!”
한 남자가 방안으로 급히 뛰어들어오며 소리쳤다.
그는 무슨 일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 지금 당장 피해야 해요!”
***
그 시각, 박준모와 김세희는 다크 엘프의 모습으로 토굴 밖에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감시하며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 중이었다.
“김 팀장님, 방금 뛰어들어간 그 남자…… 혹시 무슨 일 일어난 걸까요?”
“그런 것 같긴 한데, 무슨 일 있으면 말해주겠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자가 뛰어 왔던 방향으로 촉각을 곤두세우는 김세희였다.
그러던 중, 이들을 안내해주었던 소년, 한스가 박준모에게 쭈뼛쭈뼛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 그쪽도, 우리 같은 사람 맞죠?”
그 두 사람은 아직 다크 엘프 폴리모프 상태였기에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아, 맞아요!”
"저기 그러면 하나 묻고 싶은데……. 혹시 바깥 세계는 아직 무사합니까?”
이들도 전쟁이 벌어졌다는 건 들었지만 그 외에 6년째 세상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은 것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다크 엘프들이 유럽을 침공했다고 들어서요. 6년 전이지만, 제 가족들이 라이프치히에 있었는데 거기는 안전할까요?”
박준모는 라히프치히가 어딘지 몰랐으며 그곳이 티탄 호플리테스들에게 유린당하지 않았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그래도 좋은 말을 해줘야 해.’
그는 이곳의 포로들을 지켜보며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 소년, 한스는 이제 16살, 17살쯤 되었을까? 10살을 갓 넘었을 때부터 이 지하에서 노예 생활을 했을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박준모는 이들에게 어떻게든 희망찬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하一 아직 걱정하실만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플레이어들이 모였고요. 아마도 우리가 승리할 거고 여러분도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부디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스의 얼굴에서 어둠과 빛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를 구출하러 온 분들, 당연히 여러분이 전부는 아니겠죠?”
"아……."
박준모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세희가 옆구리를 찔렀다. 입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그게……."
그때, 방 안에서 이현욱이 나왔고, 그 뒤로 요하임 볼코프가 급하게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一여러분,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어, 무슨 일이에요?”
김세희가 이현욱을 바라보며 묻자 요하임 볼코프 대신 대답했다.
"지금 불시 순찰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곳 노예 거주지를 관리 감독하는 간수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하, 하필이면 ‘간수장’이 직접 순찰한다고 합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한스가 말했다.
"헉! 그러면 ‘탐색’ 스킬을 사용할 거 아니에요? 간수장은 사람 숫자까지 정확히 파악해서, 없어지거나 죽음 사람까지 알아보는데…....."
이곳을 감독하는 ‘간수’ 계통의 다크 엘프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 등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 그 엘리트 몬스터가 저쪽에서 오고 있습니까?”
"예, 저희가 추정하기로 적어도 90레벨이 넘는 분석가 계열 그러니까 들키면, 끝장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90레벨쯤 되는 엘리트 몬스터는 플레이어 한 명이 상대할 수 있는 그리고 항시 ‘특별감찰대’라는 정예 몬스터 무리도 데리고 다녀도 아무리 S등급일지라도 상대할 수 없어요.”
그의 판단 기준은 6년 전이겠지만, 그때와 지금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즉,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6년 전에 제가 모르던 S등급이시라면, 각성이 비교적 최근일 텐데, 그렇게 압도적인 능력 성장을 하시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욱은 그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같이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아무리 S등급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한계는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현욱이라면 흔히 말해서 ‘차원’이 달랐다. 그는 그걸 절대로 몰랐다.
“제가 앞서서, 대장군을 암살하겠다고 말씀드렸었죠. 그걸 못 믿으셨고요.”
“지금 그 이야기를 왜……."
그 물음에, 이현욱이 간수들이 오고 있는 방향 쪽으로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걸 지금 증명하겠습니다.”
"어…… 잠깐만요一!”
"그, 그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곳곳에서 만류가 쏟아졌지만, 이현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고 이곳저곳에서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를 말릴 수는 없었고,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어디서 미친놈들이 굴러 들어온 거야……."
"이, 이러면 우리한테도 피바람이 불 거야!”
“一요하임, 어서 말려야 해! 저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까지 싹 다 죽는 거 몰라?”
그런데 요하임 볼코는 무슨 생각인지 주춤거리며 갈등하는 모습을 내비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죠.”
“뭐?”
“저 사람 눈…… 말릴 수 있는 눈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어딘가, 확신에 찬 눈이었요.”
이현욱이 그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그 역시 이현욱이 어딘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현욱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 검은 까마귀一후긴이 올라타 있었다.
이내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는 발걸음들이 느껴졌다.
‘총 14 마리…….'
그는 인사이트 렌즈의 ‘천리안’을 발휘하여 어둠 속을 꿰뚫어 보았다.
- 다크 엘프 정예 간수 (LV:64)
- 다크 엘프 정예 간수 (LV:63)
- 다크 엘프 정예 간수 (LV:65)
이런 게 13마리.......
- 다크 엘프 간수장 (LV:97)
확실히, 6년 전이었으면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몬스터 무리였다.
"응?"
“거기, 멈춰!”
그쪽에서 이현욱을 발견하며 외쳤고, 그는 멈춰 서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포로 지도자들을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감싸쥐며 "끝장이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 자식 복장이 왜 이래?”
"너 뭐야, 어디 소속이야?”
이현욱의 복장은 노예에 걸맞지 않았다. 무려 블랙 드래곤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으니…….
그리고 그때, 박준모가 겁에 질려 있는 소년一한스의 어깨를 살짝 툭 치면서 속삭였다.
"아까 몇 명이나 구출 작전에 투입되었는지 물으셨죠? 사실은, 여러분을 구하러 온 건 우리뿐이에요.”
"一네?”
그 뜬금없는 고백에 어찌나 놀랐는지 한스가 꽤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런 말은 하는 게 좀 멋쩍긴 한데……."
박준모를 검지를 들어 올려서 전방, 간수들과 마주 서 있는 이현욱의 등 뒤를 가리켰다.
"……사실상 인류 최강자가 여러분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해도 돼요.”
그 순간, 이현욱이 왼손을 옆으로 뻗었고, 그의 손에 거검이 현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