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베를린, 다크 엘프 왕국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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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로마 게이트에서 왔다고 했나?”
이현욱 일행은 다크 엘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 수십 개의 포탈 생성기가 줄지어 있는 거대한 공간一다크 엘프 왕국의 ‘터미널’에서 검문검색을 받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총 다섯 명입니다.”
한 다크 엘프가 마법 철창 너머에 앉은 채 그들이 건넨 출입증을 살피면서 질의를 던졌고, 2왕자의 수호기사인 아르젠티 아르쿰이 대표로 대답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출입증에 이상이 없고, 폴리모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가 출입증을 그냥 덮었는데, 눈빛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
"큼! 자네들, 어떻게 감히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할 생각을 한 거지? 적어도 일주일 전에 방문 허가를 받아야지 게이트 이용이 가능한 거 모르나?”
“아, 그게……."
"그것도 지금 같은 전시에 말이야! 이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응?”
“……급히 들어올 일이 있어서 사전 보고 못 한 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시인 만큼 경계에 날이 서 있었는데, 사방이 무장 병력이었다. 만에 하나 여기에서 위장이 들통난다든지, 그게 아니라도 절차상의 문제로 구류되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종족에게도 위계질서가 명확하게 있는지, 터미널키퍼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는 능숙하게 쓴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봐 게이트키퍼, 내가 이렇게 물으면 그 이유를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네 터미널 출입 한 두 번 하나? 쯧쯧一 인간 세계에서 오래 살았더니 뻔뻔함이 인간을 닮아가나 봐?”
그러자 수호기사가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그게…… 수스 부포님을 아십니까?”
꽤 직책이 높은 이의 이름인지, 터미널키퍼의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커졌다.
"응? 어, 알다마다! 제7 숲의 관리자가 아니신가? 지금은 인간들과의 전쟁에 나가시지 않았나?”
"예, 그분께서 인간들의 술인 이탈리아산 최고급 와인을 참 좋아하십니다. 이번 전투 끝난 뒤 파티를 여시겠다고, 이번에 꽤 귀한 와인을 미리 공수해두라고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딘가를 가리켰는데, 그곳에 작은 철제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자 터미널키퍼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
그가 이토록 빠르게 수긍하는 건, 수스 부포라는 고위 관료가 인간들의 음식을 좋아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一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제7 숲의 관리자님 명령이라면…… 큼, 그래, 내가 멋모르고 귀한 시간을 잡아먹었군! 그래도 요즘 시국에 인간 세계의 물건을 반입하는 걸 들키면 그분일지라도 영 골치 아파질 테니, 자네들이 주의해야 해!”
이렇듯 아르젠티 아르쿰이 미리 준비한 그럴듯한 거짓 사유로 검문검색을 통과할 수 있었다.
“와, 다크 엘프들도 인간이랑 다를 게 없네요. 윗사람 이름 한번 대니까 바로 프리패스라니……."
"저는 휴가복귀 할 때 위병소에서 검사받는 게 생각났습니다.”
김세희와 박준모가 한 마디씩 감상평을 남겼다.
그들은 터미널을 빠져나와서 긴 통로를 한참을 걸었고, 곧 ‘광장’이라고 부르는 아주 넓은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곳이 우리 왕국의 중심지이고, 거의 모든 곳으로 연결된다. 혹시 문제가 생겨서 탈출할 때 반드시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만큼 경비가 많기도 할 거다.”
2왕자가 설명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많은 다크 엘프들이 오고 가고 있었는데, 도심 중심의 환승역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땅에서 솟은 건지 천장에서 내려온 건지 알 수 없는 두꺼운 뿌리들이 마치 빌딩처럼 서 있었고, 실제로 그 안을 파서 건물로 활용하는 듯했다.
천장에서는 빛을 내는 꽃들이 피어나서, 지하 공간 전체를 은은한 백색 빛으로 채웠는데…… 적진이라는 불안감만 없다면, 동화 속 요정들의 마을처럼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 저거…… 사람 아니에요?”
불현듯, 박준모가 놀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그리고 정말로, 다크 엘프 인파 사이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삭발한 머리에 넝마 쪼가리만 걸친 비루한 모습으로, 양손이 녹색 넝쿨 같은 거로 속박된 채 일렬로 걷고 있었다.
그 주변을 다크 엘프들이 무기를 든 채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노예 신분인 듯했다.
‘저들은 3차 웨이브 당시에 베를린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일 거다.’
그 재앙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재앙을 막지 못해서 베를린이 녹색 지옥으로 바뀌기 시작할 때조차도 이 땅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
‘그리고 아마도 농경 노예로 부려지고 있을 거다.’
그 숫자가 족히 3~4만 명에 이른다는 게, 홋날 가디언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구출할 방법은 없었기에 끝끝내 다크 엘프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저거…… 설마 인간을 잡아서 노예를 부리는 거야?"
김세희가 날이 돋친 목소리로 물었고, 두 다크 엘프는 면목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 말이 없군.”
그리고 변명을 하듯, 왕가가 통치할 때는 저들의 삶의 질이 지금보다 높았다면서, 그때는 인질들을 최대한 존중했다고 설명했다.
그게 완전히 거짓은 아닐 것이, 다크 엘프 왕국은 인류와 우호적인 길을 가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때는 노예보다 인질에 가까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빌런의 간섭으로 ‘대장군’이 권력을 장악하며 모든 게 틀어졌다.
“……일단은 계속 갑시다.”
“큼, 이쪽이다.”
이현욱은 저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비참해졌던 인류의 모습을 전생 내내 지켜봤기 때문이다.
어느새 점차 인파가 줄어들고, 천장도 낮아지고, 빛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외곽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부터는 거주 지역이다. 내 친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런데 걔들, 진짜 믿을만한 애들이겠죠?”
김세희가 물었다. 그녀는 조금 전, 인간 노예를 본 뒤 불신을 품은 듯했다. 그러자 2왕자도 기분이 상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흠, 보통은 그런 관계에서 배신을 당하던데…… 그래야 반전이라서 그런 건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현욱은 자신들을 쫓는 발길이 있다는 걸 감지했다.
그게 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진 한복판인 만큼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페일노트 2자루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一왕자님, 여기입니다.”
한 골목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
“……현재로서는, 지금 당장 대장군이 머무는 ‘권좌의 방’으로 쳐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한 여성 다크 엘프가 일행에게 찻잔을 내밀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움 피데, 한때 왕실 내무부의 관료이자 제2 왕자의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비롯하여 이곳에 있는 ‘충성파’ 다크 엘프들은 방금 이현욱 일행의 계획을 전해 들은 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곳에 지금, 사실상 왕국 수비를 위해서 남겨둔 모든 병력이 모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장군이 권좌를 통해서 ‘바인가드’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어느 때보다 방비가 철저한 상태입니다. 오히려 평시보다 뚫기 어려울 겁니다.”
제2 왕자 역시 릴리움 피데의 말을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리 전 병력이 전장으로 투입되었다고 한들, 그곳만큼은 집요하게 지키려고 하겠지…… 아직 왕권의 복원을 염원하는 충성파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을 테니……."
이현욱이 빈집이 되는 순간을 노렸지만, 오히려 핵심 목표의 보안은 더욱 철저해진 상태였다.
‘그래, 이건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이현욱은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플라이 아이를 날려서 다크 엘프 왕국 곳곳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병력이 빠져나갔다고 한들, 중심부는 생각 이상으로 방비가 철저하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이현욱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아무리 은밀하게 침투할 수 있다고 해도 여기는 적진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건, 그린 웨이브가 모든 곳의 천장, 벽, 바닥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현욱이 위그드라실 시티에서 상대했던 식인 넝쿨의 파도 ‘그린 웨이브’ 이곳은 바로 그런 게 엮여서 만들어진 도시였다.
즉, 조금만 잘못하면 오히려 허무하게 붙잡히고 말 가능성이 있었다. 마치 거미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행하는 날벌레 꼴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삐끗했을 때, 그 이후의 대처를 위해서는…… 최대한 은밀하게 침투할 수 있게, 상황을 개선해야만 한다.’
즉 ‘권좌의 방’을 지키고 있는 병력을 최대한 밖으로 끄집어낼 만한, 아주 충격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그건…….
“반란……."
"一예?”
이현욱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성내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진압을 위해서 권좌의 방에 있는 병력 중 일부가 밖으로 이동하지 않겠습니까?”
이현욱의 물음에 릴리움 피데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은 건 아니었다.
“……아,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왕당 복원을 주장했던 충성파 대다수가 현재 감옥에 갇혔습니다. 뭐, 쿠데타 식으로 흔들 수는 있겠지만, 고작 그 정도로 권좌의 방에 있는 병력을 끄집어낼 수는 없죠. 더 큰 혼란이 필요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이현욱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성파 다크 엘프가 아니라…… 꽤 많은 병력이 들고 일어난다면요. 이를테면 수천 명 규모로요.”
"음, 설마…… 인간들을 이용하려는 건가?”
제2 왕자가 무언가 눈치챘는지 그렇게 물었고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붙잡혀 있는 인간 포로들,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무기만 있다면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수가 다크 엘프에 맞서다가 생포된 이들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성’을 경험한 이들도 있을 테고...… 못해도 수백 명의 전투 계열 플레이어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현욱에게는 수백 자루에 이르는 플레이어 전용 무기가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아이언 골렘의 코어로 다수의 권속을 소환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반란을 제대로 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을 해방해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권좌의 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동원될 수도 있습니까?”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릴리움 피데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 그건 정말로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창밖, 천장을 가리켰다.
약 십여 미터 위, 천장 부근에는 마치 건물에 내장된 배선이나 파이프처럼 식물 줄기가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바로 ‘그린 웨이브’였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왕국의 어디에든 ‘권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식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반란이 일어나는 순간, 천장과 벽에서 식물들이 촉수처럼 날아들어서 전부 구속해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만약…… 불이 있다면요?”
이현욱이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불, 그것은 이곳 다크 엘프 왕국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물질이었다.
왜냐하면, 사방이 식물로 이루어진 만큼 불이 번진다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기에 다크 엘프는 화식(火食)조차 하지 않았고 불빛 역시 식물들이 자체 발광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현욱은 이어서 설명했다.
"만약 반란군이 불을 손에 넣으면, 그린 웨이브도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숲의 정령술사가 나서서 강제로 움직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숲의 정령술사 대다수는 전쟁에 나갔을 테고 나머지는 권좌의 방을 지키고 있겠죠. 즉, 그들을 출동하게 만드는 겁니다.”
앞서서 이현욱이 목격했던 그린 웨이브는 무려 숲의 관리자라고 불리는 보스 몬스터 플로스 루베르가 조종했었다.
그렇기에 웬만한 화염 마법으로는 도저히 저지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생하는 그린 웨이브라면, 평범한 불로도 충분히 활동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현욱이 거듭해서 반론을 제기하자 릴리움 피데는 약간 언짢은 표정이 되었다.
2왕자의 친우이자 충성파로서 이 계획을 돕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적개심과 반란이라는 개념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했다.
"하…… 당연히 불에는 다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도시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 지하 도시의 모든 곳에, 물을 머금고 있는 식물들이 뿌리를 틀어서 일종의 스프링클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2왕자를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이 인간들을 정녕 믿어도 되겠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아…… 그런데 그건 저희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구석에 앉아 있던 아직 젊은 다크 엘프였다.
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는데, 어리숙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 다크 엘프 정예 정령술사 (LV:61)
그러나 그는 다크 엘프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로 불리는 ‘숲의 정령술사’ 중에서도 '정예’라는 등급에 해당했다.
즉, 이 녀석이 레벨을 더 올리면 ‘엘리트 몬스터’에 등극한다.
이에 제2 왕자 역시 거들고 나섰다.
“그래, 숲의 정령술사가 몇 명 모인다면, 노예 거주지의 소방 식물들을 통제하여 불이 나더라도 물을 뿜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거다. 릴리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숲의 정령술사가 몇 명이나 되나?”
제2 왕자까지 거들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앞서서 이 인간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대다수가 징발되어서 왕국 내에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 떠오른 건 대여섯 명 정도......."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나 역시 숲의 정령술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으니, 나도 함께한다면 ‘워터 라인’을 제어하여 불이 퍼지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불이 난다면 분명히 심각한 일로 받아들이고 권좌의 방에 있는 병력이 출동할 테고……."
그는 고개를 돌려서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네의 말대로 권좌의 방에 있는 병력을 끌어낸다면, 자네가 그 마법의 투구를 쓰고 진입해서…… 대장군을 암살할 수 있겠나?”
이현욱은 앞에 놓였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마음 같아서는 그 병력을 통째로 권좌의 방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권좌까지 파괴할 수 있잖아?”
“……뭐라고요? 권좌의 방을 통째로 날리다니, 너무 과한 농담 아닙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릴리움 피데가 트집을 잡고 나섰다.
“지금 이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 줄 아시는지 궁금할 정도군요.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이현욱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차를 한 입 마셨다.
그러나 오히려 2왕자가 나서서 릴리움 피데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만一 릴리움 피데, 조금은 자중하길 바란다. 내가 지켜본 결과 이 사람은 농담을 안 하는 편이고, 방금 그것도 농담이 아니었다."
“……예? 그렇다면 정말로, 이 사람에게 권좌의 방을 한 번의 소멸시킬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물음에 2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니까, 우리 도시를 안전하게 돌려받으려면, 이 남자의 말을 따라야 해.”
"......."
"그걸 명심하고, 반란을 위한 제반 사항을 재확인해줬으면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명 혹성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
사실, 삶은 곧 절망이다. 애초에 행복은 이상향일 뿐이며 그걸 좇는 건 고통의 연속이다.
이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품었을 만한 뻔하디뻔한 허무주의였지만, 이곳 다크 엘프 왕국의 ‘노예 거주지’에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진리 같은 말이었다.
그곳 어딘가, 누런빛으로 밝혀진 습한 토굴 안, 넝마를 입은 인간들이 조잡한 식탁에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 배식 시간이었기 때문에 식후에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 이제는 정말로 버틸 수가 없어요! 전쟁이 일어난 이후, 노동량이 너무 극심해졌다고요!”
한 빼빼 마른 남자가 머리를 움켜쥐며 그렇게 소리쳤다.
“……이, 이대로는 난 죽고 말 거예요!”
인간 노예 중에서도 ‘플레이어’들은 특히나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크 엘프 과수원으로 끌려가서, 열매에 마나를 공급하는 일을 했다.
그건 쉽게 죽지는 않지만, 흔히 말하는 고혈을 빨리는 것처럼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생명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끔찍한 작업이었다.
"흑흑一 정말로 그냥 죽고 싶다고요!”
그리고 이 남자는 그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결국, 다른 남자들이 그를 달래여 재운 뒤 누추한 방으로 데려가서 눕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토굴에서 최연장자로서 이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도 언젠가부터 그늘만이 가득했다.
"이제는 나도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예? 할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한테 항상 희망을 품으라고, 인류는 언제나 해답을 찾았다고 충고하셨장아요!”
한 소년이 노인에게 말라 비틀어진 열매를 내밀었다.
그러나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하하一 그게 몇 년 전이었나?”
"어, 그게……."
"너무 오래됐어. 이 굴레도…… 슬슬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허황한 꿈을 좇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우스워지기 시작해. 그리고 인류에 대한 자긍심도 이제는 남지 않은 것만 같아.”
이곳, 다크 엘프 왕국 지하 도시에 잡혀 온 지 벌써 6년째…… 희망을 품기에는 이제는 너무 낡아 버린 그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그렇고, 다크 엘프 병력이 싹 빠져나갔다고 하던데…… 혹시 드디어 구출 작전이 시작된 게 아닐까요?”
이번에는 젊은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저는 아직 믿고 싶어요. 어, 언젠간 밖으로 갈 수 있다는 걸요. 그리고 제 딸에게는 꼭, 햇빛을 만끽하게 해줄 거에요.”
이 지하 감옥에서 낳은 자식에게 품은 죄책감 때문일까, 그녀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내가 지난 수확 때 간수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그거 오히려 역으로 정복을 당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뭐, 뭐라고요? 그러면…… 여기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유럽 전역이야. 어쩌면 전 세계일지도 모르지…… 어르신 말대로 인류에 대한 자긍심은 무슨, 우리는 끝장난 거야.”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냉소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갇힌 것도 끔찍한 일이거늘, 그 고통을 한층 후벼파는 것은, 인류 전체가 유린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건 흡사, 전쟁 포로가 된 상태로 조국이 침략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았다.
즉, 가장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젠장, 이 개 같은 귀쟁이 새끼들……."
결국, 한 남자가 울분 섞인 악다구니를 내뱉었다. 그는 얼마 전에 친구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분노가 들끓고 있는 상태였다.
"젠장,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한 놈은, 아니 두 놈 정도는 쳐 죽이고 죽고 말 거다!”
"이봐一 침착해,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러다가 간수가 듣기라도 하면, 우리까지 같이 처벌받는다는 걸 명심해.”
"씨발, 다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예요? 어차피 죽을 거, 싸우다가 죽는 게 낫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들, 플레이어잖아요! 한 번 제대로 싸워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벅一 저벅一
한쪽 어둠 속에서 발걸음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一 저벅一
하지만 그리 긴장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노예 거주지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라서 간수의 순찰이 매우 드문 편이었다. 이들이 여기에서 마음껏 떠든 이유도 그 덕분이었다.
그런데…….
“헉!”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가, 간수님?”
그곳에, 다크 엘프가 서 있었다.
“어, 왜 여기에……."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다크 엘프라면 잔학무도한 간수일 텐데, 방금 그 험담을 들었다면…… 이들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요즘 분위기상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을 당할 수도 있을 터, 특히나 어린 딸을 안고 있던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아, 안 돼…… 제발……."
그런데 그 다크 엘프의 얼굴에서는 노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어딘가 반가움이 담긴 얼굴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훑더니…….
“저기, 여기가 인간 거주 구역 맞죠?”
그렇게 물었고,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
꽤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젊은 남자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 어, 예! 그렇습니다, 간수님!”
그러자 그 다크 엘프가 고개를 들어 올려서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예, 맞아요! 이제 내려오세요!"
꾸드드드——
그런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고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천장을 이루고 있는 그린 웨이브가 꿈틀거리며 벌어지더니 그곳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게 아닌가?
턱一
총 6명의 다크 엘프가 천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와서 젊은 남자 앞에 섰다.
"이곳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도 역시나 젊은 남자가 대답했다.
"지, 지도자라니…… 노예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저희도 사조직을 만드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거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 물음에 그 다크 엘프가 맨 뒤에서 서 있던 다크 엘프를 바라보았다.
"내 폴리모프를 잠깐 해제해줄 수 있나?”
"음, 다시 적용하려면 15분이 걸릴 텐데, 괜찮겠나?”
"이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우우우우一
그 순간, 그 다크 엘프의 얼굴에서 검은빛이 일렁거리더니…….
“……어, 사, 사람이잖아?”
사람, 동양인 남자의 얼굴로 변했다.
"제가 본의 아니게 방금 여러분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조금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가 다가와서 젊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인류를 대표해서, 당신들을 구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