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베를린, 다크 엘프 왕국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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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점차 더 큰 무리를 이루었고 끝내 국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건 전부 ‘필요’에 의해서였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가족, 부족, 국가, 세계와 단합을 하면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외부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즉, 개인이 감내할 수 없는 위협에 함께 맞서는 것一 그게 ‘인류’라는 거대 집단 형성의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21세기 초, 바로 오늘날, 그러한 이론을 파괴하는 존재인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그들은 다수가 총력을 기울여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을 홀로 해냈다.
그렇기에 이 ‘게임’ 현상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국가의 기능이 퇴색되고 국제 사회라는 공조가 점차 무너지리라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주류 의견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중세 유럽의 봉건제처럼, 힘이 있는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세상이 패권이 나누어지고 있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공통된 목표를 상실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며 세상의 위기를 이용하곤 했다.
"一제가 있는 이곳은 오트리스산 집결지 현장입니다! 현재, 수많은 유명 플레이어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전 세계 최고의 무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고, 전 세계가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게 된 건, 이 시대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 것이었다.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전쟁 이벤트가 터졌을 때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얻을 건 불명확하고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큰데도 말이죠!”
오트리스산에서 22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그곳에 플레이어 그룹의 작전 회의장이 마련되었다.
“이 현상을 두고 많은 사람이 스틸레인의 리더십이 세상을 바꿀만한 영향을 발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현욱은 그 지점에서 자신의 공로가 100%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점차 더 큰 대재앙이 일어나면서 ‘개인’의 한계가 다시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단합의 필요성이 증가하는 게 당연하다.
즉 이현욱이 아닐지라도, 인류는 공동의 적에 맞서 다시 뭉친다. 그가 살았던 전생 역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기적인 이들은 있다.’
이기적이라는 건, 자신의 목표를 공동의 목표보다 우선시한다는 것으로, 그들은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런 부류가 잔뜩 와 있다.’
이현욱은 에밀리아 뮐러와 함께 작전 회의장으로 다가가면서 어깨에 앉은 후긴의 감각을 이용하여 두꺼운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런 상황일지라도 제대로 된 통제를 위해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지휘관을 선출해야 합니다! 아니, TV쇼로 눈길 좀 끌었다고 대장을 시켜줘요? 여기가 무슨 중고등학교 교실인 줄 압니까?”
“……그렇게 보면 안 되죠! 그게 말을 잘해서 그를 따르자는 게 아니고, 그가 보여준 게 있지 않습니까?”
"하! 그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거검 말하는 거죠? 그건 물론 대단하다는 거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요? 좋은 무기를 가져서 지휘를 맡아야 하면 2차 세계대전 때는 전차장이 군단을 이끌었어야 했겠죠?”
이는 이현욱이 도착하기에 앞서, 먼저 도착한 이들이 누구를 지휘관으로 둘지를 두고 논쟁하는 듯했다.
‘아무리 세상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해도, 무력을 손에 쥔 이들을 휘두르지 못하면 전부 소용없다.’
철컥一
그 다툼은 이현욱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멈췄다.
"......."
의자 하나 없는 넓은 공간,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들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서 있었다.
마치 스텐딩 파티에 온 것처럼 질서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단숨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현욱에게 몰렸기에 단상이나 마이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현욱은 잠시 침묵한 채 그들을 쭉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던가?
이는 전생에서도 목격하지 못한 진풍경이었다.
그러다가 최정철 장군, 강서윤, 안양 듀오 등 아는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강서윤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이현욱이 들어오기 전에 한바탕 벌이던 게 그녀인 듯했다.
"제가 공표한 장소에 모여주신 각 길드 각 국가의 대표자 여러분께 우선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렇다. 이곳은 이현욱이 지목한 집결 포인트였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여기 계시는 모든 분께서 제 작전에 힘을 보태주신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이현욱의 목적은 자신이 군대를 통제하는 것이기에 초장부터 강하게 나갔으나, 반발이 나올 걸 예상했다.
그리고 역시나 한 대머리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이름은 멜빈 아츠, 네덜란드 플레이어였다.
"큼, 조금 비약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이현욱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쪽이 이곳의 좌표를 뿌렸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그쪽의 지휘하에 들어가겠다고 여기는 건 황당하군.”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강한 어조로 토를 달았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슬쩍 눈을 마주쳤는데, 이현욱은 그 찰나에 후긴의 눈으로 그쪽을 살폈다.
‘알랭 지담, 푸투레의 멤버들이 잔뜩 와 있군?’
<푸투레>, 플레이어 중심으로 세상이 재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럽의 길드 마스터 모임이었다.
“우리는 이 재앙에 맞서 왔고 최후의 싸움을 위해서 기꺼이 온 것이오. 즉, 당신의 초대를 받은 게 아니라, 숭고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란 말이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옳소’하는 말이 나왔다.
"물론, 당신이 선보인 저고도 투하의 힘을 알고 있고, 그게 이번 작전의 핵심 무기라는 것도 알一”
그때, 이현욱이 손을 들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걸 먼저 알려야겠습니다.”
"예?”
"이제 모글레이 투하는 함부로 못 쓰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힘을 기대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지체 높은 거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티탄의 데우스 팔랑크스를 일격에 날려버렸던 100t짜리 모글레이 투하…… 사실상 그 압도적인 무기를 믿고 이 자리에 온 이들이 상당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걸 못 쓰게 되었다니…….
그때, ROK AMT 출신의 한 마법사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오더니 큐브 형태의 아이템에다가 마나를 부여했다. 그러자 그 큐브에서 홀로그램이 흘러나왔다.
그건 웬 동영상인 듯했는데…….
“앞서서, 다크 엘프 쪽 첩자가 우리 사이에 숨어 있다는 걸 목격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여러분 모든 분이 고등급 분석가 플레이어의 검문을 받으셨어야 했죠. 어쨌든, 그놈들은 아주 영악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홀로그램 화면은 계속 바뀌었고, 이제 다크 엘프 군단 주둔지를 감시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놈들은 제 모글레이 투하를 목격했을 테고, 그 공격에 대비가 되지 않았다면…… 저렇게 대놓고 초원 지대에 병력을 깥아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말하는 도중에 홀로그램을 가리켰는데…… 하늘, 구름 너머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서, 한 번 다른 무기로 시도해보았습니다.”
챙——!
그러한 소리와 함께, 음속으로 떨어지던 어떤 물체가 녹색의 마법이 걸리더니, 허공에서 우뚝 멈춰섰다.
"어?”
"뭐야?”
이어서 클로즈업되는 화면, 한 자루의 큰 창이 보였다. 그것은 웬 보라색 사슬에 칭칭 휘감겨 있었다.
“……설마 저거 아이템 무력화 그물이야?”
"그걸 저렇게 넓게 펼칠 수 있다고요?”
아이템 무력화 그물이란, 닿는 모든 무기를 일시적으로 봉인시키는 제압 스킬이었다. 그것을 추출하여 아이템에 부여할 경우 항공기 탑승 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3등급 능력 구속 사슬’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에 걸리면 아이템의 모든 능력이 사라지는데, 모글레이의 질량이 봉인되면서 운동 에너지가 일순간 증발하는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일어난다.
"저 스킬은 특정 아이템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복해야 할 4곳의 ‘빅토리 플래그’ 근처에도 저런 아이템이 준비되었을 겁니다.”
이렇듯, 이현욱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를 공개했다.
그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이걸로 어설프게 붙어 있을 놈들을 털어낸다.’
이 자리에 있는 거물이라고 해서 전부 필요한 부품인 건 아니었다. 이현욱의 합주를 망칠 불협화음을 걸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게 그 미끼가 될 것이다.
그때一
"음, 그렇다면 정면승부는 사실상 불가능하군요.”
한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역시 알랭 지담, 드디어 나오는군.’
이현욱은 그가 바로 오메가팀의 기획자이자, 유럽 내 극단주의 조직인 푸투레의 수뇌라는 걸 알았다.
비록 빌런은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속이 거뭇한 인물 중 한 명으로써, 이현욱 계획의 방해요소였다.
'저런 놈들을 걸러내야지 앞으로 작전이 편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욱이 약점을 노출하자마자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것이다.
"저는 <그랑피네트>길드의 부마스터 알랭 지담이라고 합니다. EPU의 대외협력국장이기도 하지요.”
그는 난데없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현욱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쭉 둘러보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뜻은, 이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자, 이번에는 제가 준비한 걸 보시죠.”
그는 당당하게 홀로그램 생성기를 꺼내서 활성화했다. 그의 자료에는 웬 그래프 같은 게 잔뜩 있었다.
"이건, 저희 길드의 분석팀이 준비한 적들의 전력과 우리 전력의 비교 자료입니다. 왼쪽 붉은 그래프가 적들의 숫자 및 평균 레벨 값을 통해 산출된 전력이고 우측이 우리, 플레이어의 총 전력 추정치입니다.”
꽤 복잡한 자료였지만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왼쪽 그래프가 오른쪽 그래프보다 훨씬 높았다.
“……우리의 승률은 고작 7.8%라는 결론입니다. 물론 이건 정면승부 때를 뜻합니다만, 우리는 지금 공성전을 앞두고 있으니 사실상 정면승부를 해야만 하죠.”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그랑피네트>길드의 분석은 적중률이 세계 최고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현욱이 보기에도, 단순 비교 상으로는 저게 맞았다.
알랭 지담이 고개를 돌려 이현욱을 쳐다보았다.
"이 통계를 뒤집을 만한 근거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또 숨겨둔 무기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의 말에 현혹되어 참전한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무가치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다분히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이현욱이 늘 새로운 카드를 꺼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없겠거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현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이번에도 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래서 정면공격을 시도할 겁니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피식 웃었다.
"하, 그렇다면 그게 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죠?”
아마도 이현욱이, 자신의 계획을 섣불리 밝히지 않을 것이란 걸 아는 듯했다. 그리고 그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이현욱의 영향력을 깎을 생각이었다.
"......."
이현욱이 대답하지 않자 그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탔지 않습니까? 드레스덴에서 당신이 멋지게 연설하면서 마지막에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뭐, 힘을 합치는 말이었죠. 그러니까 당신도 우리를 신뢰하고 모든 걸 오픈해주셔야 마땅하죠. 그게 진정한 동맹이고 진정한 팀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끝날 때, 이현욱은 냉소를 머금었다.
“제가 여러분께 신뢰를 주지 않는 게 싫다면……."
이현욱은 알랭 지담을 바라보았다.
“……길게 말하지 말고, 부디 꺼지세요.”
그 순간, 장내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도 이 자리, 꽤 무게감 있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꺼지라니……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뭐, 뭐, 지금 뭐라고 한……."
“내가 신사답게 토론해주길 바랐습니까?”
이현욱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알랭 지담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기에는 이 순간, 너무 중요하고 위급하니까, 마음에 안 들면 내 계획에 초 치지 말고 당신 패거리 데리고 당장 꺼지세요. 여기는 내 주둔지니까요.”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이었는지 알랭 지담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누구도 이럴 줄은 정말 몰랐을 텐데, 그건 이현욱의 최측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들도 하나 같이 당황을 머금고 주변을 살폈다.
지금껏, 전장에서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었던 스틸레인이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지켰었다.
그렇기에 알랭 지담은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서 그를 논리적으로 막다른 길로 몰아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무력을 지닌 길드 마스터들의 마음을 자신들 쪽으로 돌려서 이 전투를 주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면전에 대고 이런 모욕을 줄 줄은 몰랐다.
"어,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그런 저급한 말을…… 하! 같이 싸우겠다고 온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주제에 이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을 맡겠다는 건가?”
이현욱도 이런 식으로 배짱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과 싸우기도 바쁜데, 이런 허튼 마음을 품은 헛짓거리를 곱게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이현욱은 냉랭하고도 온화한 표정이었다.
“나는 여러분의 합류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으로, 나를 믿어 달라고 요구했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러분까지 믿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너희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건 스포츠가 아닙니다. 제가 가진 정보를 공개하는 건 공평한 룰이 아니고, 멍청한 짓이죠. 그것도 우리 주변에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
"그러니까제 계획에 구멍 내지 마시고 꺼지세요.”
이현욱이 연달아 꺼지라는 말을 하자, 알랭 지담의 얼굴을 울긋불긋해졌다. 그러나 반문하지는 못했다.
그래, 불특정 다수가 모인 곳에서 ‘핵심 전략’을 오픈하라는 건 얼핏 공평해 보이지만 안일한 말이었다.
그걸 파악한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를 믿고 여기에 남으신다면……."
이현욱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제가 장담하죠. 저를 믿고 싸운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뭐든 이 싸움 끝에서 그걸 쥐게 될 겁니다. 끝을 보겠다면 끝을,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아이템을 원한다면 아이템을, 돈을 원한다면 돈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과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가 세워온 업적은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가장 가능성이 큰 쪽에 투자하고 싶을 테고, 그건 나다.’
이로써 알랭 지담 같은 완전히 글러 먹은 족속을 걸러내는 동시에 필요한 전력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현욱은 그렇게 생각하던 중 구석에 서 있는 장신의 동양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현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중력 마법사, 이성윤이었다.
그런데 그가 쥐고 있는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헤카테케이레스의 권능 (특수)
- 효과 : 다량의 마나(1,000)를 주입할 시 메테오를 소환한다. (재사용 대기 : 72시간)
‘비록 모글레이는 먹히지 않아도, 저건 먹힌다.’
그렇기에 이번 전투에서는 그가 필요했다.
이현욱은 그 직후, 그에게 남몰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 만약 이성윤 씨께서 저를 믿어 보시겠다면,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때까지 ‘헤카톤케이레스’를 아껴주셨으면 합니다. (그 아이템의 정보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시겠지만, 이후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성윤으로서는 의문만 쌓일 뿐이지 이현욱의 요구를 수용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성윤의 큰 욕망을 알고 있다’
전생, 이성윤과 함께 싸운 게 족히 3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걸 공략하면, 반드시 넘어올 거다.’
- ……그리고 저를 믿어주신다면, 제가 와이트 트리 가드의 전대 단장인 니콜라스 스틸이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고 있으니, 그걸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공통의 적이 가까이에 숨어 있습니다.
니콜라스 스틸, 성녀 에밀리아 뮐러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자 세인트 돔의 수호자였던 성기사였다.
그리고 가디언의 초대 의장이며, 이성윤에게는 사실상 아버지나 다름없는, 정신적 지주였던 남자였다.
이성윤은 한동안 그의 죽음을 추적했으나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훗날, 고든 프라이스가 배신자라는 게 밝혀지며, 놈이 니콜라스 스틸을 포함한 수많은 가디언 멤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게 드러난다.
‘지금 당장 이걸 밝힐 수는 없다. 지금의 고든 프라이스는 가디언 내에서 상당히 신뢰받고 있을 때다.’
그러니 천천히, 놈의 숨통을 조여갈 생각이었다.
***
이현욱의 과감한 발언 직후, 플레이어 병력 중 절반 정도가 이탈하여 한참 먼 곳에 따로 캠프를 마련했다.
역시나 대다수가 알랭 지담과 푸투레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악의 담긴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다.
- [단독] 6개 거대 길드 마스터 입을 모아서 스틸레인 전략 비판 "전혀 승산 없어, 개죽음 막아야 해”
그러나 세상이 그 말에 설득되기에는 현재 스틸레인이라는 이름의 후광이 워낙 강렬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다크 엘프 군단과 블랙 오크 군단이 티탄 부대와 합류하여 방비를 강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튿날…….
“……안민태 하사님, 정말로 오늘 밤 진격합니까?”
"그래, 아까 뭐 들었냐? 야! 빨리빨리 움직여!”
아무리 예정된 전투라고 해도 걱정이 안 될 수 없었고 이곳저곳에서 걱정 어린 푸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민간 길드원일수록 심했다.
“하一 마나 드론으로 찍은 영상을 보니까, 거기 뚫는 게 말이 안 되던데요. 진짜 철옹성 그 자체에요.”
이들은 공성 측으로 일명 ‘빅토리 플래그’라고 불리는 4개의 지점을 점령해야만 했는데, 그 지점을 관측한 결과…… 지면에서 거대한 성채가 치솟아 있었다.
말 그대로 공성전(攻城戰)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해발고도 6~7백미의 산성이었다.
"저도 봤어요. 그런데 모글레이가 없다니……."
"그러게요. 그거 하나 믿었는데…… 스틸레인은 방법이 있다고 했지만, 그게 뭔지 모르니까 답답하네요.”
그리고 그 성채가 단순한 돌벽이 아니라, 강력한 마법 방어막이 처져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높이가 최장 45m에 달했으며, 어떤 곳은 마그마가 질질 흘렀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철옹성 혹은 통곡의 벽이었다.
우우우우——
그곳을 향해 수백 대의 수송기와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갑차, 트럭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는 ROK AMT가 맡았다.
“흠,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질 텐데…… 여기에 스틸레인이 없는 걸 알면 정말로 난리가 나겠군그래.”
그렇게 말하는 이는, 작은 키의 군인 최정철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플레이어 병력이 공성전을 위하여 전 병력 진격 중이었으나, 이곳에 스틸레인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이현욱의 최측근인 최정철, 김강석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대대장, 자네 생각은 어때? 이현욱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무작정 돌격을 시킨 걸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조차도 이현욱이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는지 몰랐다. 그저 때를 기다리며 공격하는 시늉을 하라는 말만 남긴 채, 이른 새벽부터 사라져버렸으니…….
"그래, 그 녀석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나? 이번에는 또 어떤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을지 기대되는군그래!”
***
“컥一 헉一”
그 시각 이탈리아 로마, 티타노마키아 이후로 멈춰 서버린 그 도심 어딘가의 와인바에서 신음이 흘렀다.
"너, 너희는 누구냐……."
한 다크 엘프가 박살 난 오크통 위에 처박힌 채 허공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그 허공이 일렁이더니.......
웅一
그곳에서 한 남자가 현현했다. 그는 방금 벗은 검은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는 어딘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자식이 터미널 출입관 맞나?”
"뭐? 네가 내 신상을 어떻게……."
그때, 계단 밟는 소리가 나더니, 몇 개의 그림자가 이곳, 지하 와인 숙성고로 내려왔다. 그런데…….
“헉! 너, 너희는一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얼마 전에 쿠테타로 무너진 다크 엘프 왕국의 제2 왕자, 클라이페우스 그리세오, 그가 그곳에 있었다.
"플로스 루베르가 나를 죽이지 않고 가뒀다.”
"이런 젠장, 그것이 기어코 실수했구나!”
제2 왕자는 말없이 다가와 ‘출입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번져 나왔는데……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서 그 손바닥을 이현욱의 얼굴에 얹고 빛을 뿜자一
우우우우——
그의 얼굴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게 아닌가?
이어서 김세희와 박준모 역시 주변에 쓰러져 있던 다른 다크 엘프들의 신체로 ‘폴리모프’ 되었다.
“……큰 귀가 영 거슬리는군.”
이현욱이 폴리모프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출입관’이 꽥 소리를 질렀다.
"一네놈, 내 얼굴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이현욱은 말없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등 뒤의 모글레이가 쏘아져서 한쪽 벽을 허물어 버렸다.
쾅——!
그 벽 뒤에는 웬 거대한 구체가 숨겨져 있었다.
그건 다크 엘프 왕국의 ‘터미널’로 통하는 게이트였다.
이현욱은 그 앞에 서서 제2 왕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네 ‘권좌’를 되찾아줄 거다.”
“……그래, 정말로 때가 왔군.”
"하지만 그 직후 네가 해야 할 일을 잊지 마.”
권좌(權座), 그건 중의적인 의미가 있었다.
우선, 다크 엘프 왕국의 통치권을 의미했다.
그리고 둘째로, 왕의 군대의 통솔권을 말했다.
이현욱이 말한 건, 두 번째에 해당했다.
‘다크 엘프 군단 중 최고 전력은 <바인가드>다.’
그건 다크 엘프 황제의 친위대를 의미했는데, 머리 기생 식물을 심어서 뇌를 완전히 대체해버린 다크 엘프로, 특정 마나 패턴을 통해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 패턴을 송신할 수 있는 게 바로 황제의 ‘권좌’였다. 즉, 그걸 차지하기만 한다면…….
‘이번 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뒤엎을 수 있다.’